次金孝仲南行韻
雲溪 全以性
歸人催倚渡頭槎。
日暮氷寒着淺沙。
秦地孤雲行欲逝。
吳門匹練去無涯。
一生世故多離別。
千里風埃足坎坷。
怊悵鄕心先寄去。
洛江東畔是吾家。
김효중 남행에 차운하여
운계 전이성
귀향하는 사람들은 나루터의 배에 탈 것을 권유받고
해가 져서 얼음처럼 차가운데 얕은 모래에 도착할 것입니다.
한양 땅의 쓸쓸한 구름이 곧 사라지려 하고
오문(吳門)의 흰 베 한 필같이 끝없이 가고 싶다.
내 인생은 이별로 가득한 고로
천 리 자욱한 풍진 속에서 불우하게 보냈다.
내 마음이 먼저 고향으로 가는 것을 보니 슬프고
낙동강 동쪽 언저리는 나의 고향 집이 있는데….
[국역] 전과웅
[출처] 운계문집
● 진지(秦地)는 장안, 즉 서울을 가리킨다.
● 오문은 오나라 도성의 서쪽 성문인 창문(閶門)을 말한다. 공자가 안연(顔淵)과 함께 노(魯)나라 태산(泰山)에 올라갔는데, 오나라 창문 밖에 백마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안연에게 저것이 보이느냐고 묻자 안연이 한 필의 흰 비단이라고 대답하니, 공자가 그 말을 듣고, “그것은 말이니라.” 하였다는 데서 인용한 것이다. 《論衡 卷4 書虛篇》
● 필련(匹練) :
하얗게 바랜 백포(白布).
● 坎坷 감가
1. 때를 만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해서 괴로움이 큼. 불우(不遇).
2. 길이 험하여 차량(車輛)의 통행(通行)이 불편(不便)함. 감람(坎壈ㆍ輡壈ㆍ轗壈).
● 김영조 [ 金榮祖 ]
정의
1577(선조 10)∼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할아버지는 사의(司議) 김농(金農)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전적(典籍)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正言)·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장령(掌令)·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제학(副提學)·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인조 2)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 내용이 경망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주장하고, “인성군 이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했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해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인조 11)에는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받았다. 1642년(인조 20)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 때 인사 부정의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김영조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忘窩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조 [金榮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