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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은총의 지렛대와 마중물인 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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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08 04:32
- 은총의 지렛대와 마중물인 죄
오늘의 주제는 죄인의 회개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래서 내가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별로 죄지은 것 같지 않고 뭘 회개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느닷없이 사는 게 다 죄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아니지, 사는 게 다 사랑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거의 매 순간 사랑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 맞는지 생각해보니 둘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죄인이고 노상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저는 늘 사랑하고 있고 죄보다 사랑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에 어른들이 죄 고백하러 들어오셔서는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시며 사는 게 다 죄라고 하신 것도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잘 못 느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죄보다 은총을 더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저의 죄가 많고 많지만 제게 은총이 충만히 아니, 넘치게 주어지기에
은총을 보면서 저의 죄는 못 보는 것인데 이는 거지가 햇빛을 쐬면서
더러운 자기 몰골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만 보는 것보다 은총을 보는 것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옛날의 저는 저의 죄만 보고 하느님 은총은 못 봤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보게 된 것은 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을 보게 된 것이 하느님의 은총 중의 은총입니다.
문제는 은총을 누리기만 하고 죄는 보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이고,
앞으로 별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죄를 은총의 지렛대 정도로 삼고 살겠습니다.
또는 저의 죄를 은총의 마중물로 삼으며 살고 싶습니다.
이런 저, 너무 뻔뻔한 죄인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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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현실과 더불어 고요하게 앉아있기!
하느님의 숨
2025.03.07. 17:2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7일 금요일 (호명환 번역) 열 번째 주간: 존재들의 눈물
예언자라고 해서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는 자신이 예수회의 평화 활동가인 대니얼 베리건 신부(Fr. Daniel Berrigan: 1921-2016)의 비폭력 평화 운동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미라바이가 자기 친구이자 이콘 화가인 윌리엄(빌) 맥니콜스 신부(Fr. Bill McNichols)와의 대화를 통해 받은 영감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대니얼 베리건 신부를 따르던 이들 중 많은 이가 알지 못했던 것은 그가 슬픔을 가눌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비폭력의 선구자였던 댄은 전쟁의 문화가 기울어들 것이라는 조짐을 많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끈기 있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참된 예언자가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비폭력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우리는 비폭력적으로 살라는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비폭력 혁명을 통해 우리는 미국을 되돌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며, 또 이 한 가지가 이 비폭력적 혁명을 지지해 줍니다. 그것은 폭력이 아무것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그는 또한 말했습니다. "평화를 조성하려는 노력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그 노력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2]
젊은 예수회 회원이던 빌 신부는 뉴욕시에 있는 한 공동체에서 댄 베리건 신부와 함께 살았습니다. 때로는 댄이 저녁 식사를 들러 내려오지 않으면, 빌이 위층으로 올라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곤 했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것처럼 보였어요." 하고 빌 신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가 받은 비난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이 그에게 계속 공격적인 비난을 당하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댄은 "그것이 마치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고뇌를 짊어지고 세상을 걸어 다니는 느낌이에요!..."라고 말했답니다. 빌 신부가 말하기를 댄의 그 엄청난 큰 슬픔이 자기 마음에 너무 깊이 다가왔기에 그가 그 순간에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어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그 순간은 마치 고통스러운 욥을 방문하는 것과 같았어요." 하고 빌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예언자라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또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 가한 피해를 복구하여 평화가 퍼져나가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신비주의자도 하느님과의 일치가 하느님에 대한 갈망의 결과라는 것을 절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편안하지 않습니다. 사실,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은 크나큰 슬픔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공허, 그런 기다림, 그런 경계 구역 안에 머묾은 신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신비주의자와 독선적인 활동가 혹은 영적인 자기애주의자를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생명의 기적이 인내심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 내면의 사막입니다. 이 땅은 겉으로는 척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내면에 생명이 넘쳐 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더 온 정성을 기울여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그것이 드러내 주는 아름다움이 우리 시야에 더 집중적으로 들어옵니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상처나 있지 않고, 그래서 고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언자-신비주의자는 이 현실과 더불어 조용히 앉아 수양을 합니다. 조용한 경청의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알게 되고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활력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선천적 권리를 받아들이고, 신비로운 유대교의 가르침인 티쿤 올람(tikun olam)의 정신 안에서 상처난 세상을 고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성의 그물망 안으로 모든 것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매일 아침 차를 내려 성찰하고 글을 쓰고 CAC 공동체와 함께하기 위해 그 찻잔을 들고 저의 신성한 공간으로 물러갑니다. 저에게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를 끌어안아아 준다고 느낍니다. 그러고는 종종 제가 함께하는 이 공동체의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 묵상 시간 동안, 저는 하느님께서 제가 알고 있는 짧은 성경 구절로 제 영혼에 해 주시는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씀을 저의 특별한 일기장에 적습니다. 저는 또 종종 하느님 현존과 저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압도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Janice D.
[1] Daniel Berrigan, The Trouble with Our State, edited by John Dear (Resource Publications, 2021), vii.
[2] As quoted in John Dear, “Daniel Berrigan, Apostle of Peace: An Introduction (of Sorts),” in Apostle of Peace: Essays in Honor of Daniel Berrigan, ed. John Dear (Wipf and Stock, 1996), 16.
Mirabai Starr, “Inconsolable: The Path of the Prophet-Mystic,” ONEING 12, no. 2, The Path of the Prophet (2024): 51–52, 53.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oé Barnett, Untitled (detail), 2024, oil paint,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노에 바넷(Noe Barnett)이 그린 위 그림의 이미지가 리처드 로어의 책 존재들의 눈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엄청나게 다정다감하고 엄청난 배려심으로 눈물 한 방울을 붙들고 있는 저 손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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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08. 05:43
우리는 흔히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도 합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 말이지요. 이는 사회의 통념입니다.
그런데 이 상식이 예수님께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 통념이 예수님께는 전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멸시받는 이들, 내쳐진 이들, 불신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등등....
사실 우리는 예수님과 복음을 이해하려면 이런 통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1코린 1,21).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는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별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육을 취하시어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오신 분이 죄인들인 일반 대중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자주 우리가 올바라야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선을 지향하고 악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완벽하게 이런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심지어는 그로 인해 우리가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꺼이 맞아들이고자 할 때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선을 향해 나아갈 더 큰 힘을 사랑과 자비의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요!!
우리가 우리의 고정관념(통념)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선악"의 게임 안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자신들의 알몸이 부끄러워 하느님께로부터 숨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받았던 벌보다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는 사실(창세 3,21) 말입니다!
창세기 2장 마지막 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의 부족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 채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은 후 그들은 자기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하느님을 피하게 되었던 것이고, 여기서부터 우리 인간은 옳고 그름의 게임에 빠져 살아가는 운명을 안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수치심을 덮어 주십니다.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요.... 그리고 마침내는 이런 우리에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셔서 우리의 수치심(죄)을 완전히 덮어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옳게 되려는 고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과 자비의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이미 초대된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이들의 부족함을 같은 마음(同情)으로 받아드리고 덮어 줄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과 자비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감사와 겸손의 마음으로 받아들여 우리 이웃에게도 같은 사랑과 자비를 나눌 수 없다면 우리는 마태오 복음(22장)과 루카 복음(14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에 초대는 받았어도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잔치 상에 앉아 있던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늘 당신의 완전함에 초대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언제나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이 삶의 모든 상황이 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궁극적인 복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한 상황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절대 우리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상황이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말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문제로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우리 에고가 만들어 내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는 "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바리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 즉 우리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내가 꺼려하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인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과도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시기가 바로 사순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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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08 05:34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디서 정보를 얻습니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거의 스마트폰을 열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질문하면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 심지어 초등학생도 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야단스러운 소음과 수만 가지의 관심사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 조그만 스마트폰 하나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리도 많은 소리가 있는데 과연 주님의 말씀을 침묵 속에서 듣고 또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쉬울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소리 속에서 주님께 대한 친미와 사랑 가득한 대화만 쏙 빼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동창 신부가 어느 순간 아침마다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나면 습관적으로 뉴스를 계속 검색해서 보는데, 아침이나 저녁이나 새로운 뉴스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똑같은 뉴스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 큰 반성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을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만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레위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큰 잔치를 벌이지요.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요?”(루카 5,3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를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이고, 또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만지는 우상 숭배자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영적으로 건강하다면서 자기들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많은 말들. 영적 교만으로 가득한 생각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전혀 다름을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라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세상 안의 기준을 따르면서 세상의 말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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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밤이 있으면 낮이 있게 마련이고, 일 년 중 밤의 길이는 낮의 길이와 같다.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도 존재한다(카를 구스타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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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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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테클라 2025. 03.08. 03:51
아...
신부님께서 일상생활로 복귀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성모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께 힘과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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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서는 사순과 대림이 시작되면 ‘성경 쓰기’를 권장합니다. 작년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하였고, 저는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선물 선정은 수녀님이 하였습니다. 사순 때는 믹서기를 마련했고, 대림 때는 멸치와 김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사순에는 구약성서 중에 ‘코헬렛,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필사하도록 했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의 삶은 허무하지만, 최선의 삶은 하느님을 믿는 마음 안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빗기는 ‘좋은 또는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주인공 토빗의 이름을 딴 것으로 삶과 죽음, 건강과 고통, 기쁨과 슬픔 같은 대립된 현실 모두가 결국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딧기는 아시리아 대군의 침략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과부 유딧의 활약에 힘입어 그들에게 맞서 승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을 희망하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그에 합당한 삶의 실천뿐임을 강조합니다. 에스테르기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학살될 위기에서 구원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섭리와 구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신앙과 용기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도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선물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사순 특강에는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사목하고 있는 신부님이 오십니다. 신부님은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 동안 선교사로 사목하였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 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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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끼리끼리 논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까요? 비슷한 말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곤 그저 한마디 하십니다. “나를 따라라”라고 말입니다. 그 한마디로 세리는 큰 잔치를 엽니다. 그 잔치에는 세리뿐만 아니라 다른 세리들과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참석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잔치를 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일이든 결혼이든 회갑이든 어떤 잔치든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생면부지인 사람들일까요?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람들 혹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세리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모습을 서로가 위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참여한 다른 죄인들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주님께서 들어가십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주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죄인들 사이에 계십니다.
또한 우리 마음 죄스러운 그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서 계십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왜 당신의 스승은 죄인들 가운데 있는 것이오?’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스승님의 모습입니다. 죄인인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신 분. 우리를 지켜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분. 우리들의 어두운 부분에 서서 빛이 되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스승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도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그러므로 기도는….
입으로 시작할지 모르지만, 몸에서 끝나야 합니다.
마음으로 시작하고 발과 손에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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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추종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레위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가 뜻밖에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분명 레위의 내적 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선행하는 레위의 주님을 찾는 내적 갈망입니다. 만일 이런 내적 갈망이 없었다면 주님은 그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영원한 현재성을 지니는 말씀입니다. 삶의 방향을, 삶의 길을,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해, 또는 잃어버려 방황이요 혼란이자 불안이요 두려움입니다. 바로 레위가 주님을 만남은 그대로 구원이었으니 삶의 방향을, 길을, 희망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주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제대로 주님을 따라갈 때 제대로의 참삶입니다. 한두번 따름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버리고 비우고 주님을 따라야하는 “추종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이에 응답하여 오늘 복음의 레위처럼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다음 대목이 상징성이 깊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대로 레위의 내적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새삼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제 지론이 생각납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새롭게 주님을 따라 나서는 파스카의 삶, 이래야 비로소 영적탄력 좋은 삶입니다.
삶은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여정입니다. 레위는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고,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주님의 제자들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제 레위는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에 합류한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공동체에 합류한 우리를 방불케 하는 공동식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항의성 질문과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들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형제임을 몰랐던 편견에 눈이 멀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즉각적인 통쾌한 답변이 평생 묵상자료가 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왔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하는 “병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회개와 더불어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으로부터의 치유의 용서가 이뤄짐을 봅니다.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는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의 공동체요, 날마다 용서받고 치유받아 새롭게 추종의 여정에 오르게 하는 미사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천주교는 힐링의 종교요 총체적 힐링에 미사전례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들은, 치유를 필요로하지 않는 건강한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주님의 부르심을, 용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병자라는 엄연한 사실이 우리를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 이사야서 말씀도 사순시기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단식의 정신이자 회개로 용서받아 새롭게 주님을 따라나선 우리를 고무하고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내 제자들 공동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시야를 전 인류 가족인 사회 전반을 살펴보게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솟아 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 회개의 실천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하는 이상이 참으로 영감이 넘치고 아름답고 현실적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지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 지리라.”(이사55,12)
이어지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주일에 대한 우리 자각을 새롭게 합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어봅나다. 이렇게 주일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청정욕淸淨慾도 듭니다.
“네가 삼가 주일을 짓밟지 말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 다면,
네가 주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주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너무 아름답고 고무적이라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어보며 욕심을 내어 써 봤습니다. 비단 주일뿐 아니라 이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이 일상으로 확장되었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너무 지치고 피폐해진 영혼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관상적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시편86,11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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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홀로 너머 함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참으로
의로운 이
홀로 의롭지 않으니
곁에 있는 악한 이
의롭게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이
홀로 따뜻하지 않으니
곁에 있는 차가운 이
따뜻하게 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끗한 이
홀로 깨끗하지 않으니
곁에 있는 더러운 이
깨끗하게 씻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밝은 이
홀로 밝지 않으니
곁에 있는 어두운 이
밝게 비추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참된 이
홀로 참되지 않으니
곁에 있는 거짓된 이
참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새로운 이
홀로 새롭지 않으니
곁에 있는 낡은 이
새롭게 보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이
홀로 살아있지 않으니
곁에 있는 죽어있는 이
살아있게 북돋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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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루카 5,29)
레위의 믿음을 일깨운 잔치|
그다음엔 세리에 대한 영적 부르심이 이어집니다. 몸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오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강탈하던 직책을 버렸습니다. 예,그렇습니다. 수치스런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기 안의 집에 영접하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넘치는 기쁨을 맛보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꺼이 그 집에 들어가시어 당신을 믿은 자의 품성을 즐기십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엑카르트는 고통을 버리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 고통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야말로 두 배의 고통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사십 마르크에서 등을 돌려, 남아 있는 육십 마르크에 집중하고,뚫어지게 바라보고. 말을 걸어 보십시오 ... 선한 것은 위로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찮은 것, 선하지 않은 것, 내 것이 아닌 것, 내가 잃어버린 것은 반드시 절망과 고통과 괴로움을 주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괴로운 날에는 좋았던 날들을 생각하라”(집회 11. 25 참조).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그대가 괴로움과 고통에 빠져 있거든,그대가 지니고 있는 선과 위로를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사물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투명함을 경험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집착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모든 고통은 사랑과 애착에서 비롯됩니다. 만일 내가 덧없는 것들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도 덧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애착한다는 뜻이고, 내가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345)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하느님 신앙과 동학의 시천주
강령 주문 21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은 ‘한울님을 모신다’는 세 글자 '시천주’라는 ‘주문’ 이다. 이 세 글자로 인하여 동학은 전통적인 유불선(儒佛仙) 3교로부터 자신을 뚜렷이 구별하여 자기 정체성을 지니게 되고, 이 세 글자로 인하여 최제우와 최시형과 동학인들은 당시의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서학도당의 아류’라고 박해받고 참형을 당했다. 최재우는 ‘시천주’ 에 대하여 <동경대전> 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사자(侍者)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자야(名知不移者也) 주자(主者) 칭기존이여부모(稱其尊而與父母)
동사자야(同事者也)
“모신다는 것은, 몸 안으로는 신령한 기운이 있고, 몸 밖으로는 기화가 있으며 , 온 세상 사람이 모두 각각 알기를 옮기지 않는 것이다. 주(主)란 존경하여 부모처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는 뜻이다.
이 짧은 해설문에서 ‘시천주’의 신묘한 종교적 체험 상태를 충분하게 드러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동학(천도교)의 핵심 가르침인 ‘시천주’가 불교나 유교와 어떤 점에서 다르고 특이한 경지인가를 알기엔 충분하다.
‘시천주’의 핵심은 궁극적 실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체험적 진리이지 인식론적인 종교 지식이나 교리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 실재이신 ‘자기로서의 한울님'은 지극한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자기 생명 속에 모실 분이지 사색의 대상이거나 타계에 대상화시켜 놓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주객 구조’ 안에서 예배하거나 관조할 객관적 대상이 아니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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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회개의 이론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실무 이론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08. 03:06 ㅣNo.180571
회개를 해야 한다고는 하는데 그렇다면 하라고만 했지 어떻게 하는지 만약 그 방법을 모른다면 회개를 하라고 하는 그 외침이 부질없는 외침과도 같을 것입니다. 세상에 회계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저는 언어유희를 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회개도 회개학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의도는 세상에도 어떤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가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길이 있다고 해서 가기만 한다고 그 길을 잘 가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순히 회개하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걸 뉘우치라고 하는 것 그게 일차적인 회개의 의미라고 알고 있습니다. 액면적인 뜻은 맞지만 이면에 있는 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부님들께서 하시는 신학적인 뜻의 의미로 흔히 돌아선다, 방향을 돌린다, 등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아무리 신학적인 뜻이 어떻다고 해도 그게 단순히 그 뜻만을 강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탁상공론처럼 소모적인 낭비만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뜬구름은 아니지만 뜬구름 같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입니다.
저는 군에서 통신병을 했습니다. 통신 작전 장교는 전자에 관한 학문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실제 현장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병이 더 잘 대처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통신 작전 장교가 더 지식도 많고 더 잘 해야 하는데 아무런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사병이 더 잘 한다는 건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이건 지식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이론과 실제는 현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계학을 요즘 다시 틈틈이 공부를 합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가령 어떤 회계학 문제를 풀 때 보면 회계학에서 원론적으로 하는 정석대로 풀이를 해야 하는데 정석대로 하면 국내 회계학 관련 모든 시험에서는 시간이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편법은 아니지만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신기한 풀이법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엔 이게 너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맨 처음부터 이렇게 그냥 해서 실무에서도 회개처리를 하면 될 텐데 왜 구닥다리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냐고 누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가 신앙에 적용해보면 배울 점이 있습니다.
방금과 같은 방법으로 만약 회계학이라는 학문을 배운다면 그냥 임시방편적인 방법으로 어떤 현상만 제거할 수는 있는데 근원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배양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어떤 회계 시험에 합격해 그 분야에 가면 원래 이론과 실무도 실제 다른데 그나마 이론만이라도 착실하게 정석대로 해결하는 능력을 함양한 사람은 실제 실무에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그걸 가르치게 되면 정석대로 배운 사람은 그걸 이해하는 습득능력이 있어서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근데 어떻게 편법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단편적인 답 찾기 식으로 회계를 배운 사람은 실무에서 실무적인 방법을 배워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게 보통 보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재정과 기업 경영주체에서 사용하는 회계 말고 신앙에서 사용하는 말인 회개도 이와 똑같다고 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해서 회개를 하고 싶어도 자기 자신은 회개라고 생각해 했다고는 하는데 그게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처럼 난감한 상황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론적인 내용만 저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지만 실제 세상학문인 회계가 실무에서 사용하는 방법처럼 이 회개도 실무적인 요소는 어제와 오늘 독서가 그 길잡이 역할을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점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들께서 어제와 오늘 복음을 강론하실 때 복음도 복음이지만 복음의 해설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독서의 내용에 대해 깊은 강론 준비를 하셔서 신자에게 그 의미를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다시 재해석해 영적으로 유익한 강론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대한민국의 모든 사제분들이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 봤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게 전제되지 않는다면 몰라서도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런 것을 한번 제안해보고자 합니다. 전례력에 따라 시기도 시기이지만 늘 하는 그런 원론적인 생각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저는 새로운 방향의 회개를 한번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회개를 무거운 의미로 다가가기보다는 일상에서 아주 소박한 회개를 하는 걸 일상화하는 게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탈피해 이렇게 하는 게 영적인 건강 측면에서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묵은 때를 제거하는 것보다 평소에 묵은 때가 되지 않기 하기 위해 자주 가벼운 세탁을 하는 것처럼 회개도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건강한 영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제요건이 있습니다. 세심증처럼은 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신앙인이라면 이 정도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 지점까지의 양심인 마지노선만큼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마음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결단만 있다면 우리는 무거운 주제로 다가오는 회개가 마치 가벼운 소일거리처럼 일상 속에서 어떤 부담 없이도 건강한 영혼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부연설명 : 묵은 때 이야기에 대한 것입니다. 흰 메리야쓰 런닝 같은 속옷도 보면 예를 들면 매일 매일 세탁을 하는 경우와 며칠씩 만에 세탁을 하는 경우를 보면 처음엔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나중에 시간이 계속 누적되고 경과되면 매일 매일 세탁한 런닝과 비교를 해보면 확실한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 세탁 주기나 갈아 입는 주기를 마치 회개를 하는 횟수처럼 생각을 해보면 그것도 재미 있는 묵상이 될 것입니다. 신선한 묵상이 될 것입니다.
깨끗하게 세탁을 했다고 해서 입기는 입어도 그래도 처음 입을 때 이왕이면 아주 깨끗한 백색 런닝을 입는다면 약간 누렇게 변색된 런닝을 입을 때랑 기분에서도 조금은 찝찝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해를 묵은 때 씻는 것처럼 씻어낸다면 나중에는 그게 마치 죄는 씻겨나가도 아주 깨끗한 속옷처럼 되지 않고 약간 누런 변색된 감이 있는 속옷처럼 우리의 영혼도 그럴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것도 보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아무리 좋은 표백제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는 표백처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그냥 간단하게 표현을 해서 제가 좀 이해의 편의를 돕고자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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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죄인 취급받는 이를 구하시는 예수님 /
박윤식 [big-llight] 2025-03-07 ㅣNo.180567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임을 믿는 우리도 가끔 자신에게 ‘나는 진정 행복한가?’ 라고 정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잠시 느끼는 만족을 행복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삶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 이미 언젠가는 그 기쁨을 잃어버릴 ‘허망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기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에 연연하는 것은 삶에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따랐다. 우리는 이 레위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레위는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의 천덕꾸러기였다. 무시할 수도 없고 가까이하기도 힘든 존재였다. 로마는 골치 아픈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단다. 그러니 당연히 탈세를 할 수밖에.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느닷없이 세무 사찰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리들이 그 하수인 역할을 맡았다. 그러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여, 그들과 어울리는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러한 세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당시 상식으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이에 감격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고기만 잘 잡은 어부 출신의 다른 제자와는 어쩜 다른 모습이다. 세리는 돈도 제법 있고 여유도 쾌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세리 ‘레위’는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마태오’이다. 아마도 그는 제자가 된 뒤에 이름을 바꾸었으리라. 이제는 세리 레위가 아니라 주님 제자인 ‘마태오’로 살겠다는 다짐일 게다. 마태오의 뜻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아무 조건 없이 세리를 제자로 삼으신 예수님 모습에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비로움을 만난다. 이는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행동강령일 수도. 우리도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듯, 그가 세리로 눈총 받는 죄인일지도 무조건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하여야만하리라. 미워한다고 낙인찍어서도 안 되고, 오히려 공동체에서 복음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만 할 게다.
이렇게 레위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랐다. 믿음 만으로만 사는 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세리였지만, 그분께서는 개의치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 일 맡기시려고 부르셨다. 우리도 언제라도 그분 부르심에 합당한 이 되어야 할 게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고 무슨 말씀 하셨을까? 어느 분이 대답하시기를, ‘너 행복하냐?’라고 하셨을 것 같단다. 세리라는 소리 들으면서 돈이나 모으고 죄인 취급 받는 게 정말 행복한지를 예수님께서 물어보셨다나. 사실 그 질문은 레위를 닮은 바로 우리에게도 하나같이 주어질 물음일 수도.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하는 일, 추구하는 이상이 영원한 것으로 닿아 있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리라. 왜냐면 그것은 언젠가는 허망한 슬픔으로 바뀌기에.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레위의 그 삶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내면이 어두운 삶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에. 예수님을 만난 세리는 새로운 삶을 가졌다. 내면의 행복을 영원히 찾은 것일 게다. 주님 만난 우리도 그런 행복을 찾아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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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세리가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세리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레위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들은 무시와 멸시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세리들은 압제자인 로마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면서 같은 민족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거나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 정결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세금을 부풀려 걷거나, 중간에서 자기 몫을 부정하게 챙기는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식탁의 친교에 많은 세리가 참석한 것은, 세리들이 더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도 세리들이 의사가 필요한 병든 이며, 회개해야 하는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세리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을 거룩한 상태로 지키려고 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함께하시며 그들도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셨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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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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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부르시고 응답하는 두 개 절로 모든 것이 끝나서
레위의 응답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과연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도 그렇게 즉시 대답할 수 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레위의 응답은 정말 한 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응답이 있기까지
그는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았고
자기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생각한 것은
스스로 바뀌기에는 자기에게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초대에
그는 이제 더 고민할 필요가 없음을 생각하고
그 즉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내 안에 변화의 힘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포기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원하지 않기에
내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그들과 싸우는 것
혹은 그들을 설득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내 삶의 길을 함께 걸어주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사람들의 수많은 반대에도
하느님의 초점은 변화를 원하는 우리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께 의지해서
우리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삶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지금의 삶이 전부 만족스럽지 않아도
변화의 시도보다는
안주하게 됩니다.
그 시도가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한 번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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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 32)
사람들의
잔치와
하느님의
잔치는
다릅니다.
우리를
회개의 잔치로
이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타인의 잔치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의
잔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무나 많은
판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행복입니다.
단순한 행복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죄인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길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합니다.
회개는
사랑의 바보가
되는 단순한
기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이
너무나
똑똑한 척
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하는
죄인들의
잔치입니다.
우리의
셈법으로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느님의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회개로
회개는 잔치로
우리를 이끕니다.
죄인을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감사
드립니다.
전혀 다른
바보들의
행복입니다.
관점이
바뀌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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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복음서를 펼칠 때 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를 해드릴까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도 똑같습니다.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속이 많이 상하지? 내가 네 고통, 네 눈물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
힘들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내밀고 있는 내 손을 잡거라. 일어서거라.”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위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 한 말씀을 또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애지중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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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27절) 하셨다.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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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이 기쁘면 회개한 것이다
페니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등장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들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시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을 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의미를 모른 채 복음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맙니다.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 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를 죽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참으로 고통임을 알아 나 대신 살아줄 예수님이 필요하면 그때 회개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무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열심한 신자인 프랑케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부엌방엔 6년간 세 들어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케테도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온통비극이었습니다.
전화교환원인 남편은 가출했으며 남겨진 것은
가난에 중독된 창백한 세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케테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케테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저분한 여관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가난과 고생으로 부쩍 늙어있었습니다.
참다못한 케테는 남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에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 ... ”
이 내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벨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이 눈앞에 계셔도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에겐 도움을 청할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그것이 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낼 참 기쁜 소식이 됩니까?
그러면 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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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는 건강하냐?” 라고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1)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가 되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심이 있었고, 부르심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따라나섰다는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지는 못했을 텐데, 아마도 마태오 사도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응답했고, 응답한 뒤에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큰 잔치’는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또 자기를 제자로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베푼 잔치로 생각됩니다.
그 잔치에 동료 세리들이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태오 사도의 가족들, 친구들, 친지들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이기도 했으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석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 라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고, 같은 죄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염병자와 접촉하면 전염병에 걸린다는 생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전혀 접촉을 하지 않았을까?
만일에 실제로 그랬다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는데, 사실 실제 상황에서는, 친구로 사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더라도, 그들도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접촉했습니다.
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병자를 고쳐 주려면 그 병자와 접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죄인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염병 환자라도, 그 환자를 치료하려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도 ‘병자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말씀에(루카 6,41.42ㄴ) 연결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것은,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말과 “너는 죄인이다.” 라는 말은, 둘 다 죄를 짓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리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또는 병들었음을 부정하는 죄인들(병자들)이었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1,31-32).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회개를 끝까지 거부하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병자라는 것을 부정하고,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병자는,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순 시기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위선들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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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5,27ㄴ-32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철저히 구별하라고 가르칩니다. 거룩한 것이 속된 것과 접촉하면 그 부정함이 물들어 거룩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데,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기에 내가 어렵게 지켜낸 거룩함이 속된 것에 물들지 않도록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소소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도 아니고, 세리처럼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심지어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큰 잘못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냐’며 따졌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은 ‘분리’나 ‘단죄’를 위한 게 아니라 올바른 ‘진단’과 ‘구원’을 위한 것이었지요. 일반 사람은 타인의 부정함에 물들어 자신의 거룩함을 잃게 되지만,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명으로 죄라는 걸 모르고 사시는 예수님, 마음 속에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그분은 오히려 당신 몸에 죄인들의 죄를 묻히심으로써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마치 빨래 비누가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녹임으로써 더러워진 옷감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이라는 빨래 비누는 세탁을 마친 뒤에도 더러워지지 않고 처음과 같은 깨끗함과 완전함을 그대로 유지한다는데에 있겠지요. 예수님은 그 놀라운 권능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시고, 보속을 행하기도 전에 먼저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들만 그런 은총을 받은 게 아닙니다. 하루 하루를 허물과 잘못으로 누비며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분께 충만한 은총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을 죄의 관점에서 심판하고 단죄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부족함 때문에, 또한 영혼과 마음에 든 여러 병증 때문에 그런 일들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음에 마음 아파 하시며, 우리의 그런 병증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도록 이끄시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그런 큰 은총과 자비를 입은 우리에게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 형제 자매에게 용서와 자비를 실천해야 할 소명이 주어집니다. 레위가 자신을 구원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잔치를 베풂으로써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던 수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구원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받은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내가 가진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주님 뜻에 맞게 잘 사용함으로써 아직 주님을 잘 모르는 이들, 그래서 죄의 어둠 속에 갇혀 불행하게 사는 이들을 그분께로 인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가 열심히 수행해야 할 중요한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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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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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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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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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신앙의 에러를 방지하는 삶
<2025.3.8> 아침을 여는 묵상 (눅 9:37~50절)
❝신앙의 에러를 방지하는 삶❞
❚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하신 성품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바른 신앙이어야 합니다.
✔ 바른 신앙을 위해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7~43절).
예수님이 잠시 떠난 곳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신의 외아들을 고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곳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질 못했다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37~40절). ‘외동딸’(9:1)과 ‘외아들’(7:12)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에 예수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41절).. 예수님은 늘 표적과 이적을 원하는 세대를 향해서 믿음을 가지라 초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셨건만(9:1,6),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도 고쳐주고, 심지어는 헤롯 왕까지 당황하게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고, 또한 이유는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강조는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부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이는 삶의 그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믿음을 가지라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꿈꾸기 전에 먼저 내 스스로의 믿음을 온전히 세워야 하겠습니다. 사업의 성공, 시험에서의 합격, 취직 등등 삶에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에 앞서 먼저 믿음을 가지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님의 부재는 삶에 치명적인 에러를 발생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주님이 부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십자가만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44~45절).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고난 즉,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십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절)..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은 오직 십자가만을 향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이 말씀에 대해 예수님께 묻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에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나와 같은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영광과 본향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동시에 이 땅에서도 감당해야 할 사명이 갖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것은 사람들을 위해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빌 1:23~24)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세상의 인기와 환호성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그 길을 걸으셨던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십자가가 아닌 세상 영광에 집중될 때, 우리 삶과 신앙에 치명적인 에러가 발생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46~50절).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에 대해 계속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직접 책망하지 않으시고, 어린 아이를 데려오셔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큰 자라는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46~48절). 지극히 작은 자인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나아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깊고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언짢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사역을 막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를 반대하지 않으면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49~50절).
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인간의 판단 기준은 분명 다릅니다. 힘과 권력과 돈에 의한 지배구조에서 그것을 가진 자들이 윗자리를 차지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판단 기준이라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자,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판단 기준이라는 틀에 나를 끼워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바울은 외모로 하든 참으로 하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단, 요즘처럼 세상 속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그런 교회와 자칭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치명적인 에러가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주님께 하듯 섬기는 삶, 상대방의 능력 그 자체를 인정해 주고,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의 밭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통해 내 인생에 발생할 수 있는 에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겸손과 온유하심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이 바라보셨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삶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신앙의 에러를 미연에 방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눅 9:37~5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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