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41
11월14일[연중 제32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WZneeOJ2gU
[수원교구 한용희 대건안드레아(광북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갑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간절히 입국을 원하는 하느님 나라,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세상 그 너머의 또 다른 세상, 하느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현존 속에 더이상 고통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행복한 세상...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으며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와 관련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물론 이 세상은 때로 정의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고통의 파도로 넘실거리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심을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어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며, 너그러운 마음, 넉넉한 미소 짓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내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에 힘겹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그런 행위는 곧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2lhsM4IqKs
++++++++++++++++++
<어째서 외적 행복이 늘어날수록 내적 행복이 줄어들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착각하였습니다.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외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뤄지는 의로움과 마음의 기쁨과 평화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성령으로 느끼는 행복을 맛보면 세상의 행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연인이 상대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상대의 진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연인이 주는 행복을 완전하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완전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영화 ‘위대한 캐츠비’에서 캐츠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데이지는 다른 행복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캐츠비는 어렸을 때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돈과 명예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캐츠비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미 돈과 명예는 있지만, 바람둥이인 톰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톰은 자기 적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고 데이지도 어느 정도 이것을 압니다. 캐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허울뿐인 행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자기 남편의 내연녀를 차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캐츠비는 그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랑에 온전히 몸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가 이와 같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행복을 신에게 맡겼습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임을 알기에 그는 유일하게 가진 두레박도 개가 입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공허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으니 그만큼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사랑 받는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파홈은 욕심을 부리다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추장의 말에 그는 돌아올 시간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 2미터도 안 되는 땅에 묻혔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그만큼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시작은 선악과, 곧 십일조를 바치므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서울대교구는 명동 계성여고가 있던 자리에 ‘명동밥집’을 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누는 밥집입니다. 기업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온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멀리서 기꺼이 오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며느리가 봉사하러 오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기도 합니다. 봉사하면서 가족들이 더욱 화목해졌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도 고시촌이 밀집해 있는 대학동에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남이섬으로 가을 소풍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며 정을 나눈다고 합니다.
친구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가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단단한 바위 위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길을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와 사랑이 단단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겨자씨와 같던 하느님 나라는 갈릴래아를 넘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1784년 한국의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신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의 성인이 시성되었고, 124위의 순교자가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본인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기쁘게 본당 사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고, 함께 해 주신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충남 태안의 천수만에서 가족캠프를 하였고, 베론 성지로 기차 성지순례를 하였고, 절두산 성지까지 도보 순례를 하였고, 멀리 안동까지 연도를 하러 갔었습니다. 저보다 더 성당의 물품을 아끼고, 청소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매주 교우들을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날 성당에 오셔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서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분,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던 분, 본당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시던 분, 기도로서 제게 힘을 주시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아닐까요? 겸손의 계란, 희생의 계란, 십자가의 계란, 나눔의 계란은 단단한 바위에 희망의 꽃, 믿음의 꽃, 사랑의 꽃이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의지에 달렸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합당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지옥의 시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옥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과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봉독되는 필레몬서는 한 장으로 구성되었고,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부유한 신자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가 도망쳤다가 바오로 사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오로를 통하여 입교하였고, 옥중에 있는 바오로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 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안전을 생각하여 그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편지로 오네시모스가 노예로서 지은 죄를 용서하고 신앙의 형제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바오로는 신앙의 지도자로서 필레몬에게 요구할 권위가 있음에도,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필레 14절). 바오로가 이 두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쓴 방식은 권위로 지시하기보다 필레몬의 성숙한 신앙과 애덕을 믿으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필레몬에게 입힌 손해를 자신이 직접 갚아 주기로 합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가 필레몬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사람 사이를 섬세하게 중재하는 바오로의 모습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이 사건을 다시 보며, 그들 안에 있는 성숙한 신앙과 애덕에 기대야 합니다. 권위적인 지시보다, 선의를 움직이게 하는 부탁과 제안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손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중재자의 희생적인 행위도 화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0-25)
1)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종말’이 언제 오느냐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은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느냐고 질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종말은 눈에 보이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다든지 저기에 있다든지 하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나중에 예수님 재림 때에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또는 종말의 한가운데에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가운데’ 라는 말은, 딱 중간 지점이라는 뜻이 아니라, 종말이 한창 진행 중인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2)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종말이 완성되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종말을 완성하러 오시는 분이고,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관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은 “박해와 고난을 겪다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될 텐데”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는 “말할 수 없다.”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만일에 인간들이 종말의 날과 시간을 미리 알게 된다면, 또는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 주신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회개하면서 그 날을 잘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몇 명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인간 세상 전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종말론자들 때문에 많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아는 것은 결코 인간들에게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지금’ 깨어 있으면서, ‘지금’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라는 말씀은, 사이비 종교와 종말론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누가 따로 알려 줄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되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당시 사도들과 신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전에 종말이 먼저 오기를 희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의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겪더라도 영광스럽게 재림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4)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기후 위기 때문에, 또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또 대규모 자연 재난들 때문에 종말을 더 의식하고,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ㄱ)
신앙인들이 기다리는 ‘그 날’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멸망하는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고 완성되는 날인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려면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방식과 장소에 대하여 다룹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여기서 노아의 방주와 롯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어서 롯의 아내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살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생명을 주다’, ‘탄생시키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드물게 사용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자신의 현세적 생명을 희생한 이들이 새로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다음,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설명이 덧붙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며 그것이 평범한 일상 가운데 긴박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일이 어디에서 이루어질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며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는 듯해 보입니다. 전통적으로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구약의 심판 장면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 누구도 종말과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령 성월을 보내며 죽음과 종말,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오늘은 새로운 의미를 찾으며 희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복음서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 역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비유는 대부분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사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리사이들은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질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라고 답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어느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빵 속의 누룩처럼,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크게 자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쉽게 우리 눈에 띄지 않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저기 또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지 묻기보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1)
11월, 위령성월의 거의 반이 지났습니다. 예전 노인 병원에 근무할 때는 죽음이 우리 삶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 와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으며, 그래서 자연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들을 접하게 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란 말인가?’와 같은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평생 죽음을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구의 아버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고서, 죽음을 알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기에 죽음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 연구 결론은 한 마디로 <잘 살자!>인데, 이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게끔 ‘지금 여기서’ 아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곧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해 왔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으면서 늘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요양병원에서 생활이, 제게는 무엇보다도 봉사와 섬김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는데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 존재의 의미가 충만하고 존재의 보람이 풍요로운 곳 그래서 사랑의 기쁨, 사랑의 평화, 사랑의 친교가 충만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고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 혹은 가야 할 곳이 아니라 누리는 것 또는 누려야 할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영혼의 밭에 뿌려진 겨자씨처럼(13,19), 밀가루 서 말 반죽 속에 든 누룩처럼(13,21),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가운데 이미 와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찾아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17,23)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0~21)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으로 느끼는 행복 자체입니다. 만일 하느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나라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 나라를 찾아 나서라고 하셨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충만한 곳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은 하느님 나라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고 하느님 나라를 보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닐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道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그 도를 찾고 싶어 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젊은이는 아주 높은 산에 살고 있는 현자를 만나면 도를 깨우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떠나 마침내 그 현자를 만났습니다. 현자에게 젊은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도가 무엇입니까? 도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이곳까지 무엇을 따라 왔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젊은이가 “몇 년을 걸어서 길을 따라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따라 걸어온 그 길이 바로 도일세. 도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닐세, 자네가 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만나고 부딪치고 했던 모든 것, 사랑하고 헤어지고, 밭을 일구고 달구지를 몰던 그 모든 것이 바로 도일세. 그 안에서 도를 찾지 못한다면 어디 가서도 도를 찾을 수 없는 것일세.』
결국 이 이야기에서 ‘日常卽 道’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는 높은 산에서, 이상한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들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별하고 대단한 사건이나 일들을 통해 오거나, 어떤 거창한 것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그리고 우리가 하는 작고 소박한 일상적인 일들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가는, 나누고 누리는 삶의 실천을 통해 점점 더 커지고 자라나면서 완성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나 누룩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커지고 자라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 주신 삶처럼 우리 또한 그분처럼 사는 데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15,5)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늘 망설입니다. 좋은 책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딱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면,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선택합니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님께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집필하는 데만 무려 25년이 걸린 대하소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 암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르셨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연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필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토지’의 서문에 나오듯이,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면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쓴 글이기에 대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없이 자란 포도는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척박한 땅에서 자라야 스스로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진짜 좋은 포도주를 키우지 않습니까?
고통을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유익함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유익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에 좌절하고 실패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우리에게 모범을 주시는 주님께서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큰 고통이 부활의 기쁨으로 바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고통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희망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시지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에 맞춰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 때문에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 너머에 하느님 나라라는 큰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선물을 주십니다. 앞서 박경리 선생님께서 고통을 마주하면서 ‘토지’라는 대작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고통의 유익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마지막 날 주님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임께서 임 닮은 이들 가운데에>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의 도래, 사람의 아들의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임께서 임 닮은 이들 가운데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믿음이 오시어
믿는 이들 가운데에
희망이 오시어
희망하는 이들 가운데에
사랑이 오시어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에
정의가 오시어
정의로운 이들 가운데에
자비가 오시어
자비로운 이들 가운데에
평화가 오시어
평화로운 이들 가운데에
기쁨이 오시어
기뻐하는 이들 가운데에
섬김이 오시어
섬기는 이들 가운데에
돌봄이 오시어
돌보는 이들 가운데에
살림이 오시어
살리는 이들 가운데에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있으면 천국>
대학 수학능력 시험일입니다. 모든 수고와 땀의 결실을 이룰 수 있길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 21장 3절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 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자-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자주 즐겨 외는 자작 애송이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요즘 만추의 단풍으로 아름답게 타오르는 대한민국은 어디나 하느님 나라 천국같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바라보는 불암산을 바라보며 외우는 자작 짧은 애송시가 기도의 계절, 10월, 11월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아무리 나눠도 계속 나누고 싶은 또 하나의 시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이미 익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현인들같습니다.
“옛 어른들은 항상 삼가고 번민했기에 오히려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다산>
당신 수의를 미리 마련해 놓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던 친지 옛 여러 어른들도 생각납니다.
“군자는 평온하고 너그럽지만, 소인은 늘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논어>
옛 군자라 할 수 있는,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선비들의 삶이 그리워 영조시대, ‘추사 김정희’를 능가한다는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박희병) 2300쪽에 달하는 양권의 방대한 책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옛 아름답고 깊은 전통과 너무 단절되어 있는 오늘날의 얕고 엷은 천박(淺薄)한 세태에서 초연하고 싶은 갈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기도 역시 생각납니다.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시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빛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평화가 되게 하소서”
끊임없이 솟아났던, 한마디로 제 인생자체가 주님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 때 언제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아 나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살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저에게는 매일 수도원 경내 산책이 성지순례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느님 나라의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 가지도 마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살 때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이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는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처럼’, 늘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삽니다. 산과 강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승들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영성이기도 합니다.
바로 성인들이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저절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나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거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빤짝 한번 나오는 제1독서 필레몬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를 위해 필레몬에게 보낸 격조높은 서간이 참 깊고 향기롭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성인들의 글은, 말은 이렇듯 깊고 향기로워 영혼을 위무하고 치유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이런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주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사랑이, 예의와 배려, 존중의 사랑이 가득 담긴 참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간곡한 청이 담긴 서간입니다. 무례하거나 불손한 면이 추호도 없습니다. 오네시모스에 대한 한없는 사랑, 필레몬 동지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구구절절 감동적입니다. 옥중에서 쓴 수인서간이지만 하느님 나라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대자유인 사랑의 사도 바오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서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 각자 삶의 자리, 꽃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가 있지 않는다면>
세상이 아주 어지러울 때 난리, 난리 해도 이런 난리 없다고들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가 이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볼 때의 저는 오히려 냉정하고 침착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냉정해지려고 하고 침착해지려고 합니다. 너무 난리 법석을 떨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저는 꽤나 교만하고 신앙적인 자존심이랄까 자부심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더욱이 수도자라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조금 다른 뜻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분노로 거리로 나설 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려, 특히 분노의 감정과 파괴적인 감정에 휩쓸려 나서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두려워 나서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가 나서야 하며 사람들이 절망할 때 그때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우리의 희망을 두고 믿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이게 나라냐?!’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이 세상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번번이 이런 지도자를 뽑을 것이고 나라는 이 모양이 될 것입니다.
이번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을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전 세계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설마설마했는데 트럼프를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인 히틀러를 뽑았듯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라도 이런 선출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정말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지, 복음의 가르침에 그 어떤 것보다 가치를 두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8년 전 그러니까 2016년에 제가 한 강론의 요약입니다. 수평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8년 전과 올해가 너무 똑같지요? 그래서 마치 올해 강론이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으셨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있지 않으면 이런 어리석음이 반복 또 반복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그 나라에 있지 않고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면 또 그리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느냐?”고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허튼소리나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와 있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고, ‘여기’에 있는데 ‘다른 어디’서 오는 것처럼 묻고 있으니 허튼소리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듯 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면 됩니다.
쉽지 않지요.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아예 제쳐놓지는 말아야 합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향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완성을 향해 차츰 나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 생활이고, 종말론적인 완성을 나이 먹을수록 살아가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ㄴ)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루카17,20-25)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ㄴ-21)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로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나라'이며, '지금 우리 가운데에 와 있는 나라'(Hic et Nunc/여기와 지금)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저 너머에 있고,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큰 은총'입니다.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이들과 교만을 드러내는 이들!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매사에 불평불만을 드러내는 이들! ...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단순하게 믿는 이들', '회개하는 이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이들',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의 날'인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말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에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 충실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열리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의 눈으로
만나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외형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예수님의
고귀한 마음을
만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갈망을
채워주는 것은
마음입니다.
서로의 삶에
진정한
생기를
주는 것 또한
마음입니다.
더더욱
하느님 안에서는
진실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커지면
공간도
환해집니다.
마음이
그려가가는
십자가와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한데 모여 삽니다.
마음도 닦아야
빛을 발합니다.
고난이
있기에
마음이
성장합니다.
고난과
배척으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분명해집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면
이쪽 저쪽
여기 저기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마음을 먼저
성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회개를 낳고
예수님의 배척은
복음을 낳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향합니다.
우리마음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제 어디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한
복음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향하는
복음의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