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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모화(慕華)사상의 뿌리 주자학(朱子學) 비판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한국의 유교 문화 전통을 보여주는 성균관 문묘(文廟) 일무(佾舞) 장면. /공공 부문
영국 경험론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비판 철학 등 서양 근대 철학은 중세 스콜라철학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엄격하고 철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반면 20세기 초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에서 급조된 ‘중국철학’은 전통적 사유 체계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기보다는 동양적 사유의 고유성을 다시 찾아 지키겠다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수세적 자의식(defensive self-consciousness)에서 시작되었다. ‘동양에도 서양 못지않은 위대한 철학이 있다’는 명제가 그 대전제였다. 그 결과 100년 넘게 축적된 중국철학의 연구는 중국적 사유의 독보성과 심오함을 미화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오늘날 강단의 철학자들은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방대한 지적 전통에서 역사와 문학은 전면 배제한 채로 오직 과거 몇 명 학자들의 관념적 논의만을 쏙 빼내선 ‘철학’이란 명목 아래 맹목적으로 주해만 하고 있다.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역사의 선례를 탐구해서 새로운 사회·경제적 제도를 입안하고, 잘못된 정책과 그릇된 관행을 비판하고, 정부의 무능과 관리의 부패를 규탄했던 경세가(經世家)들이었는데, 현대의 ‘중국철학’은 그들을 수도승처럼 마음공부만 하며 우주의 섭리만 궁구하던 관념의 철인들로 왜곡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철학’은 중세 스콜라철학을 방불케 하는 협소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인 관념 유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렇게 협소하게 정의되고 편협하게 탐구되어 온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이 1960-70년대 대만에선 국민당 정권의 이른바 유교 파시즘(Confucian Fascism)과 공명했으며, 오늘날 중국에선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화해(和諧)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차차 밝히기로 한다.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악영향과 부작용도 이제 점검할 때가 되었다.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은 한국 사회에서도 중국 문명 자체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을 만들어냈으며,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비판 자체를 막는 낡은 이념의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철학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주자학(朱子學) 비판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한국은 지금도 지폐에 주자학자를 두 명이나 싣고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폐 속의 퇴계와 율곡
1975년 이래 대한민국 조폐공사는 1000원권, 5000원권 지폐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초상화를 실어 왔다. 언젠가 한국에 다녀온 한 미국인 과학자가 그 점이 참 인상적이더라며 “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인 화폐(philosophical currency)”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가 물었다. “지금도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철학 사상을 설파했는가?”
외국인으로선 당연한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이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아니라면 지폐에 실릴 이유가 없다. 지폐에 실릴 정도라면 두 사람의 철학은 깊은 통찰과 독특한 사상을 담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국과 달리 다른 나라의 지폐에는 철학자가 아니라 통상 정치 지도자나 근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실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화폐 견본. /IBK기업은행
물론 외국 지폐에도 철학자의 초상화가 실린 사례가 없지는 않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Vichy) 정권 아래서 대륙 합리론의 선구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지폐 인물로 잠시 등장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1987년부터 2002년까지 25년 동안 지폐에 실었다. 전 세계 교양인들은 데카르트라 하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프로이트 하면 리비도(libido)와 초자아(superego)를 연상할 정도로 이 두 인물의 영향은 현재도 건재하다.
반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은 데카르트나 프로이트만큼 깊은 통찰과 독창적 사상을 담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황과 이이의 철학을 이해하는가? 두 사람의 철학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일본과 비교해 보면, 이황과 이이의 초상화를 고집하는 한국 지폐의 특이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일본 지폐 1000엔에는 저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928), 5000엔엔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 1만엔에는 계몽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초상화가 실려있다.
세 사람 모두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을 흡수하여 개인적 성취를 이룬 근대적 지식인들이다. 일본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이다. 일본 사회 어디를 가도 박물관처럼 에도시대의 유적이 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그 두 역사의 영웅 대신 근대의 지식인들을 지폐 인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현행 지폐. 2024년부터 일본은 지폐 속 인물들을 모두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계획이다. /공공 부문
에도(江戶) 시대 일본은 270여 번(蕃)으로 나뉘어져 있던 봉건(封建) 사회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이른바 ‘폐번치현(廢藩置縣,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함)’의 과정을 거쳐서 근대 국가로 재탄생했다. 오늘날 일본은 에도 시대가 아니라 메이지 시대의 연장이며, 현대 일본의 정신사는 메이지 시대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을 흡수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단계로 돌입했다.
새 나라의 지폐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새로운 인물들이 실린다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망해버린 왕조의 전근대적 인물들만 실려 있는 한국의 지폐가 특별해 보인다. 왜 한국의 지폐에는 16세기 조선의 철학자들이 실려 있는가? 이황과 이이가 그만큼 한국인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존경받고 있기 때문인가? 한국의 근대에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전혀 없기 때문인가? 아니라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을 부흥시켜 현대 한국인의 도덕성과 윤리 의식을 함양하려는 국가의 의도인가?
이황과 이이는 주자의 제자들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논하자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은 송원(宋元) 시대 중국에서 발흥한 주자학(朱子學) 혹은 성리학(性理學)의 본령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주희(朱熹, 1130~1200)라는 남송(南宋, 1127~1279)의 철인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 큰 스승으로 추앙하면서 오로지 주자(朱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고, 설파하기 위하여 한평생 노력했던 16세기 조선의 주자학자(朱子學者)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주자의 제자임을 자부했고, 오늘날 동아시아 철학사를 정리하는 학자들도 대개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의 연장으로 정의한다.
주자학은 12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보편적 학문으로서 막강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의 사대부가 주자학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먼 옛날부터 인류는 인종, 지역, 나라에 상관없이 먼 곳에서 발원한 종교, 철학, 사상, 제도, 예술, 복식, 음식까지 무엇이건 유용하고 좋으면 주저 없이 가져다 썼다. 그러한 문화 교류와 상호 침투의 과정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사가 전개되었다. 이른바 중화 문명도 예외가 아니다. 일례로 당(唐, 618~907) 제국은 불교, 이슬람, 기독교, 배화교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였다. 중세기 유럽 각 지역의 지식인들 역시 그 시대의 보편 철학을 수용하여 라틴어로 사유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본질적 문제는 퇴계와 율곡이 주자학을 통해서 얼마나 심오하고, 독창적이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철학 사상을 만들었냐이다. 주자학을 수용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인간의 심성(心性)과 우주의 질서에 관한 나름의 독특하고 심오한 철학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두 사람의 철학이 조선 고유의 참신하고 독특한 철학이 아니라 주자학의 연장이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두 사람의 문집 어디를 읽어봐도 주자학적 기본 전제의 타당성 여부를 캐묻고 따지는 비판적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들은 16세기 조선에 태어나서 주자학을 배우며 자랐고, 주자학의 심층적 이해를 위해서 철학 논쟁을 벌였고, 주자학의 확산과 보급에 힘썼던 주자의 제자들일 뿐이었다.
중국 남송 주자학의 장시자 주희(朱熹, 1130-1200)의 초상화. /공공 부분
퇴계는 주희의 이기설(理氣說)을 탐구하면서 이(理)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이발설(理發說)을 제창했다. 율곡은 주희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을 발전시켜 이통기국설(理統器局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정도 언명만으로는 21세기 한국의 지폐에 초상화를 실을 만큼 대단한 철학적 성취라고 할 수가 없다. 기껏 이(理)와 기(氣)라는 주자학의 개념 틀에 갇혀서 주희의 이론을 정교하게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16세기 중세 철인들의 지적 탐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대 데카르트는 인식의 확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악한 악령이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전개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합리적 사유는 퇴계나 율곡의 주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전제와 가설을 회의하고 검증하는 데카르트적 회의에 빚을 지고 있다 하면 과언일까.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계 철학계의 그 누구도 퇴계와 율곡에 그 정도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주자학은 동아시아의 중세적 사유 체계
주자학은 개개인의 비판적 사유가 아니라 전통적 사유의 답습을 강요하는 닫힌 이념이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은 고대(古代)로부터 성인(聖人), 곧 성스러운 인물들을 통해서 전승되는 도의 계보, 곧 도통(道統)을 전제하고 있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까지 이어지다가 천년 넘게 단절된 도의 계보를 성리학의 선구인 북송오자(北宋五子, 북송대 다섯 스승)가 다시 찾아냈고, 그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남송의 주희가 마침내 세상에 도를 알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주자 이후로는 중국 사상사에서 학파의 분기는 계속 일어났지만, 도통의 담론은 전개되지 않았다. 주자의 권위가 그만큼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논어(論語)’ 구절이 암시하듯, 전근대 유가(儒家) 경학사(經學史)에선 비판하고, 도전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일개인의 지적 모험심은 억압된다. 성인의 말씀에 이미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면, 개인의 독창적 사유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답습하고, 주석하고, 설파하면 그 정도에서 학인의 지적 의무는 완수되기 때문이다. 전통을 넘어서는 개인의 독창적인 생각은 사특한 망념으로 여겨졌다. 그 점에서 퇴계나 율곡은 물론, 그들을 떠받든 후대 조선의 유학자들 거의 모두가 자발적으로 주자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던 주자의 제자들이었다. 퇴계와 율곡의 학문은 주자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주자의 절대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 퇴계와 율곡의 학문도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전국 시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이미 “책을 다 믿느니 차라리 책이 없는 게 낫다(盡信書不如無書)”며 ‘서경(書經)’의 절대 권위를 부정했다. 비판적 독서만이 지적 계발에 도움을 준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언명이다. 혈연적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퇴계와 율곡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오히려 맹자의 비판 정신에 따라 그들이 숭상했던 주자학의 철학적 전제를 비판할 때다. 철학으로서 주자학은 과연 어떤 한계를 보이는가? ‘슬픈 중국’에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주자학 비판으로 시작하려 한다. 오늘날 한국인의 심리 속에는 여전히 주자학적 사유 방식이 남아서 합리적 사유와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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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생들의 한문 실력은 과연 어땠을까?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한문을 익힌 덕분에 그들은 양반의 지위를 유지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반상도(班常圖). /공공부문
한문에 빠졌던 조선 유생들, 무엇을 얻었나?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자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어디서나 언어를 사용해서 권력을 놓고 싸움을 일삼는다. 언어의 싸움에서 외래어의 사용은 때론 큰 힘을 발휘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언어 실력은 강력한 무기고, 외래어 구사력은 비밀 병기다.
조선 유생들은 왜 그토록 중화 문명에 매료되었을까? 실질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할 순 없겠지만, 매번 조선 유생의 문집을 들추다 보면 중화 문명을 우러러보고 떠받들었던 그들의 순수한 경외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 경외감의 8할 이상이 중화 문명의 지적 유산이 그 실질적 내용보다는 한문(漢文)이라는 고전 언어로 전수됐기 때문이라면 과언일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이 임종 직전까지 주자 문집을 들추며 “리도(理到)”의 의미를 고구(考究)했던 이유도 한문이라는 고전 언어 자체의 지배력과 무관할 수 없다. 리도라 하면 뭔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데, 한국어로 풀어서 “리가 온다”고 하면 그다지 대수롭잖게 들릴 수 있다. 리(理)를 순우리말로 풀어서 “결”이나 “무늬”라고 하면 더더욱 그 의미가 하찮게 들린다.
주변부 지식인들에게 외래어가 내뿜는 마력은 비단 한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언어학 연구에 따르면, 현대 영어는 어휘의 29%가 라틴어, 29%가 불어, 26%가 독일어로 구성돼 있다. 소위 고급 영어 문장에는 라틴어나 불어에서 유래한 어휘들이 많이 쓰인다. “ipso facto,” “ad hoc,” “bona fide,” “caveat,” “de facto,” “verbatim” 등은 영어권 사람들이 일상어에서도 흔히 쓰는 라틴어들이다. 라틴어 단어를 섞어 쓰면 유식한 느낌을 풍길뿐더러 때론 힙(hip)하고 쿨(cool)하게 들리기도 한다. 몰라도 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익혀서 잘 쓰면 학계나 비즈니스계나 정치판에서나 매사 유리할 수밖에 없다.
캐나다에서 초중고 모두 불어 학교를 나오고 대학에서 그리스 고전학을 전공한 후 현재 한 고등학교에서 불어와 라틴어 등을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Christopher Miller)는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어도 꽤 잘하고, 한자 공부도 열심히 한다. 언젠가 그는 내게 “어려운 영어 단어는 거의 다 쉬운 라틴어 단어(all the difficult English words are easy Lantin words)”라면서 마찬가지로 “어려운 한국어 단어는 거의 다 쉬운 중국어 단어가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생각할수록 문화 접변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위계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질문이란 생각이 든다.
바다와 대양(大洋), 땅과 대지(大地), 사람과 인간, 나라와 국가, 풀밭과 초원, 사슴뿔과 녹용, 살림살이와 경제생활 등등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대비해 보면, 한자어에 학술적 전문성과 공식적 권위가 실림을 부인할 수 없다. 선진 문명의 외래어는 토착어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하고 심오하고 문화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같은 의미라도 외래어를 쓰면 교양 있고 박식해 보이는 까닭은 언어가 의상만큼이나 민감한 패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상한 언어는 그 자체로 타인의 마음을 열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다.
<<논어(論語)>> 문구를 순우리말로 풀어서 인용하면 고리타분한 덕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같은 문구를 한문 그대로 읊조리면,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의 언어처럼 들린다. “기소불욕(己所不欲)이면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 했다”고 하면 그럴싸하다.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뜻을 풀어서 말하면 뻔한 소리 같다. 옛날 시골 노인들이 입만 열면 문자를 쓰는 까닭은 경전의 언어로서 한문이 갖는 권위에 있다.
조선의 유생들은 평생의 노력으로 힘겹게 한문을 익혀서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공리공담에 허송세월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문을 익힌 덕분에 그들은 양반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 양반이라면 전답과 가택과 노비를 소유해야 하지만, 경전을 졸졸 암송하는 문화적 교양이 못잖게 중요했다. 필요할 땐 언제든 붓을 들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유장한 문장을 지을 수 있는 한문 실력이 있어야만 양반 행세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유생들의 한문 실력은?
조선 시대 유생들의 한문 실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그들이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만큼 수려하고 정교한 문장을 지을 수 있었을까? 과연 그들이 오늘날 고등 교육을 받은 한국의 교양인이 한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듯이 거침없이 자유롭게 문장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한평생 중국의 유학 전통을 탐구한 두웨이밍(杜維明) 전(前) 하버드대학 교수는 2000년대 초반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傳習錄)을 강독하는 대학원 수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한 한국인 교수에게서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선물로 받아서 읽어보았는데, 조선(朝鮮)의 이이(李珥, 1536-1584)가 왕양명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 유려한 한문 문장으로 매우 정교한 논리를 펼치고 있어서 실로 감탄했다.”
두 교수는 그렇게 이이가 문장력만으로도 당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했음을 흔쾌히 인정했다. 중국학 대가의 평가라는 점에서 두 교수의 이 발언은 의미심장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이는 너무나 비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이가 누구인가? 여덟 살에 시를 짓고, 열세 살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아홉 차례 과거에서 모두 장원으로 발탁되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던 조선이 낳은 최고의 천재 문장가였다. 그런 이이가 두 교수를 감탄하게 할 정도의 수려한 한문 문장을 지었다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두 교수의 평가가 공정하고 정확하다고 할지라도 이이의 문장으로 조선 유생들의 문장 수준을 가늠할 순 없다.
이이의 문집 율곡전서(栗谷全書).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도의 전설적인 수학자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 1887-1920)은 정규교육도 거치지 않았지만 15세부터 혼자 책만 보고 수학의 대가가 되어 해석학, 정수론, 무한급수 분야에서 큰 공헌을 했다. 그렇다고 라마누잔의 수학 실력이 당시 인도 지식인의 수학 실력을 대표한다고 믿을 바보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이의 한문 문장력을 근거로 조선조 평범한 지식인의 한문 실력을 평가할 순 없다.
대다수 조선 유생에게 한문은 평생의 노력으로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높다란 언어의 장벽이었다. 29세부터 46세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명나라 북경을 다녀오고, 또 명나라 사신들을 응접했던 성현(成俔, 1439-1504)은 최후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우리나라(我國)와 중조(中朝, 중국의 황조[皇朝], 곧 중국)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소리마다 토씨를 달아서 읽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가 없다. 중국 사람들은 말하는 바가 곧 문자라서 따로 소리의 의미를 해석하는 구결(口訣)을 쓰지 않아서 배움이 쉽게 나아간다.”
성현의 이 한마디 속엔 변방에 살면서 중원의 중심 문화를 익혀야 하는 조선 유생들의 처절한 고통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실시간 인터넷을 통해서 영어권의 일상어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요즘에도 외국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영어를 구사하기란 절대로 쉽지가 없다. 천자문(千字文)으로 기초 한자를 익히고 나선 곧바로 유가 경전의 세계로 들어가서 한문을 학습해야 했던 조선 유생들이 과연 한문을 얼마나 자유롭게 쓸 수 있었을까?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현이도(賢已圖) 장기놀이.” 견본채색. 31.5 x 43.4 cm. 간송 미술관 소장
조선 땅에서 평생 중국 본토의 사람과는 말 한마디 섞을 일 없는 절대다수의 조선 유생들은 오로지 책만 읽고 외는 방법으로 한문을 정복하려 했다. 외국어 학습의 측면에서 본다면, 구어와 완전히 떨어진 문어의 학습은 최악의 공부 방법이다. 대다수 조선 유생은 이이처럼 명문장을 지을 능력도, 과거에 통과할 재간도 없었다.
그러한 조선 유생의 고충을 무시하고선 왜 그들이 숭명(崇明) 사상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변방의 외국인으로서 아무리 익히고 써도 쉽게 한문으로 멋진 문장을 지을 수 없기에 더더욱 중화 문명 최고 지식인들의 한문 문장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명문(名文)처럼 보이는 것이다.
99.9%의 사람들은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교향곡을 쓸 수는 없지만, 그의 음악을 감탄하면서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조선 유생은 한문 교육을 통해서 좋은 한문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인용하고 음미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지만, 독특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한평생 노력으로 제아무리 문장을 써도 주자(朱子)처럼 훌륭한 문장을 지을 수가 없다면 주자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그의 인격을 존숭(尊崇)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구어와 유리된 문어로 사유하고 글을 써야 하는 변방 지식인의 불행한 숙명이었다.
조선 5백 년 문과 급제자의 총수는 14,600명에 불과했다. 연평균 과거 합격자가 29명 정도였다. 거의 모두가 한평생 유가 경전을 배우고 익혀서 정기적으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하는 인생을 강요받았다. 그들 대다수는 낙방생의 좌절감에 시달렸기에 도리어 유가 경전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칭송하진 않았을까? 그래야만 낙방으로 점철된 인생이 어리석은 공염불이 아니라 숭고한 구도행으로 인정되는 심리적 보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중국도 마찬가지로 중앙과 변방의 갈등이
한반도의 유생들이 유가 경전을 읽으며 힘겹게 한문을 공부할 때, 중화 대륙의 유생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갔을까? 성현이 말하듯 중국 사람들은 구어와 문어가 분리되지 않아서 구결도, 토씨도 달지 않고 쉽게 한문을 익혀서 자유롭게 쓸 수 있었을까?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성현의 일반론이 중국에서도 잘 통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자가 전통 시대 중국을 통일했다는 주장은 로마자가 중세 유럽을 통일했다는 말만큼이나 어폐가 있다. 현재 유럽 대륙에서는 200여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현대 중화 대륙에서는 300여 개의 각기 다른 지방어가 사용되고 있다. 언어학적 연구에 따르면, 중국 푸젠성에서 사용되는 민화(閩話)와 중국 북서부 산시(陝西)성의 지방어 사이에는 영어와 스웨덴어, 혹은 포르투갈어와 루마니아어 정도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 베이징 사람은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광둥어를 단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쓰촨 사람은 상하이 사람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2002년 나는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지방에서 지방사 연구팀의 일원이 되어 여름을 났다. 그때 중국 지방어의 다양함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인구 400만의 진화 지방에는 전통적으로 예닐곱 개의 현이 존재해 왔는데, 지금도 그 현의 행정 경계를 넘으면 언어가 달라져서 통역을 따로 써야 할 정도였다. 한국으로 놓고 보면, 강원도 영월의 말과 바로 인근의 평창, 정선, 제천 말이 다 달라서 지방민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얘기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사람들이 한문을 익히고 배울 때도 조선 유생들을 절망하게 했던 거대한 절벽 같은 언어적 장벽에 직면해야 했다. 변방 중국인들이 중심의 중화 문명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세기 말 미국 성경 협회(American Bible Society)가 쑤저우(蘇州)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하여 번역 출판한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첫 장
20세기 초반까지 중국의 남방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던 대다수 인민은 한문은커녕 만다린이라 불리는 북방 중심의 언어를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편전쟁 이후 푸젠성에 들어가서 전도 활동을 벌였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결국 푸젠성 일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민화(閩話)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해서 기독교 성경을 통째로 번역하는 전략을 취했다.
187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선교사들은 한커우(漢口), 쑤저우(蘇州), 상하이(上海), 닝보(寧波),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등 중국 남부 지역의 주요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하여 성경을 번역·출판했다. 이미 성경은 한문 및 베이징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지방 사람들 거의 모두가 한문은 고사하고 한자도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남부의 지방어들이 북방의 구어와는 완전히 다른 중국 내부의 외국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관해선 다음 주에 상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