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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9일충북 제천 금수산에 있는 정방사에 참배 기도를 ..
8시 좀 못된 시간 출발하여 사시예불에 참석하는것을 목표로 움직였다.
남제천 IC를 지나 이름 모를 동네의 편의점을
정방사 가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
날씨 탓인지 정방사 초입에는 사람들과 차가 뒤 섥여 있었고
10시가 갖지난 시간이지만 계곡은 사람들로 비좁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에 의하면
정방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금수산(錦繡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1954년에 지은 「정방사창건연혁기」현판을 통해 보면 662년(문무왕 2)에 의상(義湘)이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이 강원도 원주에서 공부하다가 신통력을 얻은 뒤 조용히 공부할 절을 창건하고자 석장을 공중에 던졌는데,
그 석장이 날아서 현 절터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1825년(순조 25) 중건하여 1825년(순조 25)과 1838년(헌종 4)에 중수하였다.
1950년대에 혜봉(惠鳳)이 일주문을 세우고 1970년대 후반에 범종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825년에 건립한 목조 법당과 칠성각·산신각·종각·일주문(一柱門)·요사채 등이 있다.
법당 내에는 높이 60㎝의 관세음보살좌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정방사 가는길은 좁은 일차선 시멘트 도로입니다
중간 중간 차가 교행할 수 있게 만들어 져 있고.
정방사 주차장은 3곳으로 모두 합쳐 12-15정도 주차 가능한것 같읍니다
좁은 길을 따라 올라 가면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정방사 입구 입니다
저는 우측의 레일이 사다리 인줄 알았읍니다
저것 타고 가는줄 알았읍니다.
저 물건은 ..
정방사 팻말을 보고 10여미터 가노라면
정방사 일주문이 나옵니다
법보신문에서 정방사에 관한 기사에 의하며
아래 그림은 마지막
돌 두개가 일주문 역활을 한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해우소가 나옵니다
해우소
첨 보는 배치 입니다
앉아서 문을 보는 구조가 아니라
앉아서
아래와 같은 그림을 보는 구조 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우측으로 돌아서 10여 미터 걸어가면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를 지나
우측엔 종각 좌측에는 정방사가 있읍니다
어떤이들은 기암 절벽에 매달려 있다고도 표현 합니다
위 그림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아래와 같은 광경이 펼쳐 집니다
정방사는 관세음보살 좌상을 모시고 있읍니다
원통 보전 입니다
반대편에서 본 원통 보전입니다
원통보전엔 세 개 편액이 걸렸습니다
정방사, 원통보전, 유구필응(有求必應).
<<有求必應 ...원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응답하리라>>
이 각도로 몇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모두다 저 두분 모델로 등장 하였읍니다
신심 깊은 부자 사이인것 같읍니다
원통 보전에서 모시는 관세음 보살님.
보현보살님도 함께 하십니다
원통 보전 측면을 보는 구조로 나한전이 있읍니다
나한전을 지나면 해수관음보살님께서
청풍호를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해수 관음 보살님을 저는 바닷가에 만 있는줄 알았읍니다
낙산사 해수 관음보살님.(홍련암)
남해 보리암 해수 관음 보살님.
강화도 보문사 해수 관음 보살님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 도량이기도 하지요
보문사 가는 인연이 닿지 않아 아직 참배를 못하고 있읍니다
해수 관음 보살님을 지나면
바른쪽에는 지장전과 우측 위로 산신각이 있읍니다
법문신문의 기사에서는
지장전을 아래와 같이 표현 하였읍니다
<<지장보살 뒤 바위에 마애불로 지장불이 새겨졌다.
은은한 눈빛의 지장보살 뒤에서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라고.
나한전 뒤로 이동하면
암벽 아래에 웃물이 있읍니다
웃물 앞에는 동전도 참 많이 있읍니다
암벽사이에 동전을 끼워 넣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도 있읍니다
정방사 식수로 사용되는 물 이라 합니다
아래 그림은
나한전에서 바라본 청풍호 전경입니다
공양을 거르고 물로 배채우고
정방사를 나오면서 찍은 마지막 컷입니다
주차장에 버티고 있는
나의 발이 되어주는 놈 입니다
경사가 좌측 후면 다 급합니다
혹 뒤로 밀려 내려가거나 좌로 쿵 할까봐..
저놈 과 같이 움직일려면 출발 준비가 10여분 필요합니다
옷 갈아 입고
헬멧쓰고
네비 켜고
능엄주 플레이 하고
그렇게 준비하는 동안 정방사 주지 스님을 뵙게 되었읍니다
젊은 시절 대구 수창 국민학교 요즘은 초등학교지요
후문쪽에 절에 계셨을때 얘기를 하였는데
제가 고2때 그 절에 대한 인연이 있었읍니다.
주지스님의 절얘기와 저의 그 절에 대한 인연은
각기 다르지만
주지 스님 뵙게 됨으로 인하여
불변함이 있음을 느끼었읍니다
()()()
담에 와 차나 한잔 하세란 말씀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감사합니다 하고
정방사를 떠 났읍니다
덕주사를 향하여 하산하는 길에
골짜기 마다
삼겹살 냄새가 들썩들썩 하네요
월악산 덕주사를 가는길에는 송계 계곡이 있읍니다
오늘은 강가의 돌만큼이 많은 사람들이 강에 있었습니다
차도 참 많구요.
[ 德周寺 ] 덕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의 덕주사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앞에 있었는데,
1951년 군의 작전상 이유로 소각하였다.
창건 당시의 절을 상덕주사, 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 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무렵 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상덕주사는 1622년(광해군 15)에 중수되었음이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지금의 덕주사에서는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금구(禁口)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덕주사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중창되었고, 1970년과 1985년에 각각 중건하였다.
덕주사에는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으며,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절의 승려들이 건물이 협소하여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할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다.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마애불 밑에 서므로 그곳에다 부속건물을 지었고,
소는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또, 부도에는 환적당(幻寂堂)·부유당(浮遊堂)·용곡당(龍谷堂)·홍파당(洪波堂)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1985년 중창 당시에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 약사여래 입상을 덕주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밖에도 덕주사 전방 약 2㎞ 지점에 있는 빈 신사 터에는 보물 제94호로 지정된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이 있으며,
덕주사 주변의 덕주계곡·송계계곡(松界溪谷)·월악계곡(月岳溪谷) 등은 풍치가 좋다.
덕주사에 도착하여
아내가 아침에 준비해준 도시락을 나무 아래서 먹었읍니다
도시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침개 입니다
먹고 나니 살것 같읍니다
덕주사에 오면 마애불에 가야 합니다
하산하는 사람에게 여쭤 봅니다
마애불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빠른걸음으로 1시간 걸린다 합니다
2시30분이 지난 시간에
아래그림의 다리를 건너 갔읍니다
능엄주를 듣고 염하면서 마애불 가는 길은
시간을 멈추게 하였읍니다
중간에
이런 산성도 있읍니다
목적지까지 1/3 지점 입니다
지난번 백운사 가는길은 고무신 신고 간다 고생햇는데
이번에 전투화를 신었는데
다음부터는 등산화를 준비해서 다녀야 겠읍니다
등산길에는 이것 저것 무관한데
하산길에는 영 아니옵니다
매애불과 극락 보전 입니다
마애불에는 감로수가 있습니다
하산하여 덕주사 약사전 관음전 종각 대웅전을 지나면
대불정주범자비가 있읍니다.
대불정주범자비에 대한 설명 그림입니다
설렁설렁 또 바빠 집니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 옵니다
미륵사지를 들러 석종사 저녁예불을 볼려고 하면 많이 바쁩니다
왜 이렇게 사는지
중원 미륵사지
이제는 중원미륵사지로 갑니다
미륵사지에 대한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의 설명입니다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절터.
사적 제317호. 지정면적 80.454㎡. 사지가 있는 곳은 평균해발 378m 이상의 비교적 높은 지대로서
사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하늘재’라고 하는 한훤령(寒暄嶺)을 넘어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 접하고 있다.
이 절터는 1977년·1978년·1982년 세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절터의 규모와 성격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쌓아올린 뒤 나무로 만든 목조가구(木造架構)로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석굴형식은 경주 토함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석굴의 돔형(dome形) 지붕과는 다른 방식으로 된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석굴암 석굴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남아 있는 석굴에는 본존불로 모셨던 석불입상이 있고,
석굴벽에는 이 본존불을 장엄하기 위하여 조각한 여래좌상·삼불좌상(三佛坐像) 등이 있다.
그리고 사역(寺域) 내에는 화강암제의 괴산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석등(石燈) 등이 남아 있다.
특히, 괴산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은 모두 4개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 10.6m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로서 정면을 위주로 조각되어 마치 돌기둥을 세운 느낌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이른바 석주형(石柱形)의 거대한 석불입상은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이나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7호) 등의 예가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수습된 유물 가운데 ‘彌勒堂(미륵당)’·‘彌勒堂革(미륵당혁)’·‘院主(원주)’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있고,
지금도 이곳의 지명이 미륵리로 되어 있어 원래 석굴사원의 이름이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굴 축조에 관하여는 고려 태조 왕건의 경영설,
고려 초기 충주유씨(忠州劉氏)의 지원설이 있으며,
또한 석굴축조와 석굴입상 조성을 동일시기로 보는 견해와 서로 다른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동일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절에 얽힌 전설로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의 망함에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러 가던 길에,
누이인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월악산(月嶽山) 덕주사(德周寺)를 창건하여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원 미륵사지는 아내가 소위 임관후 일주일 휴가 기간중에 수도병원으로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이곳을 관광으로 왔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노선버스가 결행이 되어 둘이 걸어서 수안보로 가고 있는데
대우 로얄 프린스를 타는 어떤 맘씨 좋은 부부
도움을 받은적이 있읍니다
그후 90년 후반 둘째가 어릴때 왔다 오늘에야 얼추 15년만에 다녀 가네요
그때 보지 못한 편안함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급하게
급하게
진짜로
급하게
석종사 저녁예불 보러 갔더니
도착시간이 6시 10분
땡.
삼배하고
석종사 대웅전 입니다
석종사는 일년에 4-5번 기도 하러 가는 곳 입니다
이제 집으로 갑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감사한 하루 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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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뱡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덕주사와 미륵세계사는 알겠는데 정방사는 제가 25년전쯤 가보았던 때와는 달리 불사을 많이 하셨네요.
좋은 성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합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