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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러독스
밥 무어헤드 목사는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paradox)’라는 글에서 현대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시대의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작아졌고, 생활은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고, 말은 많이 하지만 사랑보다 오히려 증오를 쉽게 표현 한다.”
영어의 패러독스(paradox)는 모순 속에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 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기독교는 역설(패러독스)의 종교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야말로 역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 안에서 죽어야만 사는 역설이다. 죽어야만 사는 것이 기독교다. 또한 성경은 낮은 자가 높아지고, 약할 때 곧 강해지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고, 어린아이와 같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말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라는 말씀 등은 모두 역설의 진리를 강조하는 말씀들이다.
‘갑질’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갑을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갑 을 병 정 등으로 계약 당사자를 표시한다. 계약서 상 보통 갑이 주문자 또는 계약에서 중요한 당사자가 된다. 그래서 ‘갑질하다’ 그러면 갑의 권리나 권력으로 을이나 기타 병 정 등에게 힘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인터넷에선 갑의 무한 권력을 꼬집는 ‘슈퍼 갑’, ‘울트라 갑’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갑처럼 군림하려 하는 사람을 일러 ‘갑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 여지없는 갑질의 판이다. 사자들의 사회를 보면 수사자는 자기가 사냥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기가 왕이라 생각해 그 누구도 사냥한 고기를 먼저 먹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일 끝까지 수사자의 뜻을 어기고 사냥한 고기를 먹는 사자가 있다면 결국 물어 죽이고 말 것이다. 이처럼 동물의 사회는 거의가 갑질이 당연한 사회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에 갑질을 부도덕하고 잘못된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음양으로 갑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대로 한다면, 성도들의 삶은 진정한 을이 되어야 갑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천국을 얻는다고 했는데, 가난하고 애통한 자는 세상에서는 을이다.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도 역시 을이다. 약해지는 것도 역시 을이다. 죽고자하는 것도 을이다. 을이 되어야 갑이 된다고 하니 과연 기독교는 역설적인 진리임에 분명하다.
온 인류를 구원하여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창조주이고 왕이신 갑이 분명하지만,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을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모든 만물의 왕이 되셨다. 초림으로 오실 때에는 을로 오셨지만, 다시 재림하여 오실 때는 진정한 갑이 되셔서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십자가의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십자가의 패러독스’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은 대적들의 조롱을 이용해서, 십자가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세 가지 비방을 했다.
‘유대인의 왕이다’, ‘남은 구원한다면서 왜 자기는 스스로 구원 못 하는가’, 그리고 ‘이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는 것이었다.
부정적 나쁜 뜻으로 예수님을 비방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적인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모욕적이고 비방적인 말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는 역설적인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위대한 일이지만 의인들만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빌라도, 로마 군병들, 성난 군중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십자가 아래에서 조롱하던 사람들, 이러한 죄인들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에 가장 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패러독스 즉 역설인 것이다.
기독교가 역설적인 진리요 십자가가 역설적인 일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는다면, 성도들의 삶은 더욱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낮고 천하게 겸손의 표본으로 우리 곁에 오신 분이시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런 분이 하찮은 죄인들과 원수들 앞에서 기꺼이 ‘을’이 되셨다. 작은 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생이 그 길을 가셨다면 제자 된 우리도 어설픈 갑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을 따라 을의 길을 가야만 한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이 을의 길을 가도록 여러 가지 환경에서 수많은 갑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가 잘 말하였다. 내가 참으로 그렇다. 그런데 선생이고 주님인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함이며,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행복한 사람들 이라고도 하신다.
우리는 위대하신 스승 예수님을 모시고 그 길을 가는 작은 자들이다. 위대한 주님을 위해 날마다 작아져야 하는 우리는, 위대한 그분의 위대한 자녀들이다.
이안드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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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여호수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