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는 지식으로 살아간다. 지식은 정보의 축적이다. 그 정보는 외부에서 들어온다. 지혜는 내면에서 나타난다. 지식은 남의 것을 축적한 것이고 지혜는 내 것을 일으킨 것이다.
지식은 선생이 가르치고 지혜는 스승이 도와준다. 선생은 인생에 도전을 북돋우고 스승은 그 도전을 멈추게 한다. 선생은 몸이 살도록 가르치고 스승은 마음이 살도록 훈습한다.
선생은 동쪽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스승은 서쪽으로 가는 길로 안내한다. 가는 방향이 극과 극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가르치고 지혜타령을 해서는 안 된다. 그 기능 자체가 딴판이다.
선생은 인간이 되라고 한다. 스승은 인간은 부처가 미친 변종이라고 한다. 선생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지식으로 가르치고 스승은 인간을 벗어나는 방법을 지혜로 각성시킨다.
지식은 6근으로 들어온다. 수도관이 더럽다면 몸이 병든다. 정보가 들어오는 6근의 통로가 오염되었다면 마음이 병든다. 마음이 병들면 실체없는 세상이 꼭 있는 것처럼 이렇게 보인다.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면 이런 세상을 본다. 그 전에는 지식의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범부가 지식을 버리면 실상의 세상을 본다. 그 전에는 이런 허상의 세상이 실상인 줄 안다.
세상은 쉼 없이 돈다. 한 시도 그냥 있지를 않는다. 태양도 계속 타고 바다도 항시 출렁인다. 그 속에 있는 물상도 끝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세상엔 동명사 뿐 명사라는 것은 없다.
세상이 돌기 때문에 시계침은 계속 돈다. 하지만 그 침들은 글자판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도 윤회 속에서 계속 돈다. 시계 침이 자기가 도는 것을 모르듯이 우리도 도는 것을 모른다.
그런 세상을 움직이는 마음으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알 턱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세상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계속적으로 떠든다.
사실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른다. 그냥 TV화면에 나왔다 사라지는 배우들처럼 전생의 업으로 왔다가 금생의 업을 보태 떠나가는 것이다.
지식의 기능에는 세 가지가 있다. 기억과 꾀, 그리고 감이다. 기억은 정보의 축적이고 꾀는 순간적인 판단이며 감은 예감되는 느낌이다. 이 세 가지로 인간은 미물의 영장이 되었다.
그 영장이 이룬 것 중에서 단 하나도 완벽한 것이 없다. 언제나 수정 보완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다 종극에 이르면 그 지식으로 이 세상을 파괴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또 세운다.
정신병자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그는 비정상이다. 범부로써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본인은 물론 처자식의 본래 이름조차 모른다. 그들은 반풍수다. 그런데도 자기만이 잘났다 한다.
그래서 범부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봐서 안다는 것과 들어서 안다고 하는 것이다고 했다. 범부가 배웠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고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될 수는 없기에 그렇다.
지식에서 중생의 삶에 필요한 정치 경제 사회 과학과 의학이 나오고 심리학이 나온다. 불교가 과학인가. 불교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라고 할 때 불교는 이미 그 속성을 잃는다.
불교는 심리학의 결정판이라고 서울 어느 여자가 말했다. 불교는 범부의 잣대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심리학으로 불교가 어떻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불교는 이미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범부가 알 수 없다. 그냥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불교를 안다고 하는 즉시 그 불교는 과학이고 문학이고 심리학이 된다. 그러면 그에게서 불교는 없어진다.
그래서 지식으로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신행을 하지 않는다. 신행은 신앙을 모태로 하는데 이미 다 꿰고 있다면 더 뭐 알려고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가며 신행을 하겠는가.
지식은 분별식이다. 분별은 학교에서 증대시킨다. 학교라고 할 때 학은 배울 학이고 교는 헤아릴 교 자다. 즉 머리 쓰는 법을 배우는 곳이 학교고 그 반대가 불교의 수도원이다.
머리를 써서 얻는 것은 지식이고 머리를 완전 쉬면 지혜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지식으로는 불교의 지혜를 일으킬 수가 없다. 명심해야 한다. 지식을 버릴 때 거기에 지혜가 있다.
지식과 지혜는 혼용할 수 없다. 그것은 주행하는 차에 후진기어를 넣는 것과 같다. 그냥 범부로 살기위해 지식을 쌓든지 아니면 범부를 벗어나는 지혜를 찾듯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종에 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 들어올 때는 세상에서 배운 지식과 앎을 다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식 너머에 있는 지혜의 세계를 넘볼 수 없다.
움막에서 고급아파트로 이사하면 움막에서 쓰던 물건은 다 버리고 간다. 아깝다고 들고 가면 자신은 물론 고급아파트의 생활품격이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들어가는 사람은 세속에서 익힌 지식쓰레기는 다 버리고 간다. 가져간다만 자신은 물론 수도원의 수행품격이 그대로 떨어진다.
그런데 불교에 들어와서도 세속의 지식쓰레기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거기다가 불교의 색채까지 덧씌워 더 요란하게 자신의 세속이력을 자랑한다. 진짜 웃기는 사람들이다.
세속에서 배운 정보의 지식으로는 절대로 인간의 생로병사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냉철히 알고 출가를 했다. 상징적으로 삭발을 하고 괴색 옷을 입었다.
삭발은 세속에서 지식으로 배운 모든 정보와 학습을 버리겠다는 뜻이고 괴색 옷은 특별한 색채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삭발한 자가 더 세속의 학문을 익히고 괴색 옷을 입은 자가 더 세속적 명예를 탐한다면 어찌될까. 그렇게 내용은 빠지고 모습만 출가자가 되어 있다면 그 형태가 기괴하지 않는가.
풀소유가 뭔지 아는가? 재물만을 기준으로 무소유니 풀소유니 하지만 문제는 재물보다도 세속의 지식을 사원에서 내세우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수행은 억겁동안 본능과 지식으로 쌓아온 업장을 털어내는 것이지 뭘 더 배워 보태는 것이 아니다. 금덩이에 덮인 오물을 닦아내듯이 식장에 축적된 지식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런 수행이 불교에서 나와야 하는데 불교까지도 세속처럼 지식을 탐구하는 곳이라면 불교가 구태여 있어야 할 당위가 없다. 그래서 불교가 점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지식의 세계에는 불교가 없다. 그것은 뱀의 허물과 같다. 뱀의 허물에는 뱀이 없다. 그처럼 세월이 남긴 문화재나 장소, 그리고 의식 행사에는 불교가 없다.
불교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는 중생의 지식 그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범부의 지식과 생각으로 불교를 안다고 하지 말라. 안다고 하는 자는 망상가인 돈키호테다.
그가 알고 있다는 불교는 불교에 들어가도록 하는 입문지식에 불과하다. 불교는 그 지식을 넘어 그 안쪽에 있다. 입구에서 얼쩡거리며 보고 들은 잡식으로 불교를 안다고 떠들지 말라.
설악산 사진만 보고 설악산을 안다고 떠든다면 그 사람 좀 이상하지 않는가. 불교는 수행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지식으로 탐구해서 알아지는 대상이 아니다. 정신 좀 차리시기 바란다.
수행하지 않는 자는 두 부류다. 하나는 아직도 불교가 뭔지 감을 못 잡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를 안다면서 수행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불교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이 아만으로 신처럼 모시고 있는 지식의 볼펜구멍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바로 광대하고도 심심한 불교가 하늘처럼 거기에 변만해 있다.
그런데 그게 만만하지 않다. 금생에 배운 담배 하나도 쉽게 끊지 못하는데 억겁을 두고 쌓아 온 지식을 어떻게 가볍게 버리겠는가. 그래서 그 버림의 수행이 정말로 어렵다는 것이다.
ㅡ下로 계속ㅡ
출처:대승기신론 해동소 전문도량 원효센터 1부법회 중 공파스님 법문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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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최고다 할 때 대승기신론전문가는 말한다. 인간에게 지식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고 한다. 그런 것인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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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식이 위험한 이유는 지식 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 지식으로 파악하려하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지식은 지식의 울타리에 갇혀 더 이상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아버리니까요.
선생은 유교에서 가장 학덕있는 분을 지칭할 때 쓰는 존경어지요.
즉 학예에 뛰어난 사람을 존칭하여 이르는 말이지요.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분이면서
인생의 표상이며 도덕의 지표가 되지요.
그런 좋은 존칭어를 두고 꼭 스승이라는 말까지 가져가야 할 필요가 뭐 있나요.
유교에서는 선생 도교에서는 도사 불교에서는 법사 그러면 충분한거 아닌가요.
무당도 보살이라 불리는 시대에 사는 것이 참 부끄럽습니다. 부처님 오신지 벌써 2천5백7십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자고 기어이 태어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인지....
요즘은 스님 위에 학자들이 있는 듯 하고 불교경전은 논문 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듯 합니다.
현대심리학으로 대승기신론을 논하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반야심경을 푸는 시대. 과연 경전과 논서의 핵심에 진입할 수 있는걸까.
이상하게도 신심이 일어나지 않는 글들.
6식 위에 7식 8식 그 識을 버린 존재도 계신데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
장님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먼저 빛을 본 스승.
지식의 그물에 갇혀 있는 중생들을 탈출시켜 지혜의 바다로 들어가게 하는 혁명가.
그분들이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에고 불자라면 부끄러움을 알고 좀 솔직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버림의 수행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지 않나요?
집착을 버려라, 내려놓으라는 말은 복없는 범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 범부는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복이 쌓이면 저절로 더 좋은 것을 찾아 이전의 보잘 것 없는 것을 버릴 뿐.
옛날에는 일반 사람들보다 선생이 더 많이 배웠다고 다 존경하고 따랐다.
지금은 선생이 수많은 직업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농부 어부 청소부 의사 군인처럼 그냥 학교라는 장소에서 정보를 가르치는 공무원일 뿐이다.
그러니 스승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다. 선생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굳이 스승이라고 할까마는 선생님이란 호칭이 적합하다.
요즘 다들 많이 배우니까요.
중학교 기말고사 영어문항이 잘못되었다고 학부모가 영어선생님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겁나는 세상입니당~
하지만 가끔씩 불교철학 '평생 무상 보증'을 약속하는 철학과 교수님은 뵌 적 있습니다.
20년 넘게 학생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선생님~
우리동네에 불교전시관이 있다. 불교 용품 전시관이라해도 되는데 기어이 불교전시관이라고 간판을 걸었다.
거기 어디에도 불교가 없다.
들어가면 99퍼센트가 무당용품이나 푸닥거리용품 49제용품 들이다.
안에서 피우는 향냄새 그것 밖에까지 흘러넘친다. 길가는 사람들 다 제사냄새같아 안 좋아한다.
죄송합니다.
가장 위대한 지도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승가에 대한 본래 면목을 명확히 알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