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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사뭇 깁니다. 용서를 먼저 구하고요. 종교라는 주제에 대해 한 번에 다루다보니 부득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네요. 사익을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니 읽어보시면 참고 정도는 되리라 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부터 계시록 까지 달렸습니다.
1. 종교라는 어휘의 문을 살짝 열어보다
교회개혁적 시각에서는 종교라는 어휘가 상징하는 바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종교는 우리를 망치는 누룩인가 아니면 최선책인가를 부득이 고민해야 할 주제다.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종교'라는 의미의 religion을 영어 성경에서 사용한 용례는 총 5회다(English KJV version). 宗敎는 어원적 의미로는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불교 용어지만 일반적인 의미는 '인간이 삶의 불확실성에 기인되는 현실의 고뇌들을 해결할 목적으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신앙 체계나 문화적 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더 원초적으로 표현하자면 크게 샤머니즘적 지분 비율과 삶의 궁극의 의미를 추구하는 지분 비율로 나뉜다. 어떤 사람은 샤머니즘적 지분이 높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해결하고 캐묻는 것(형이상학적 추구)이 더 높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는 여기서 그치고 성경적 시각으로 종교의 의미를 관찰해보자.
우선 영어 성경에서 religion 을 사용한 곳을 살펴보면 총 5회 중(신약에서만 사용됨)
1, 2 번째의 용례는 사도행전 25장과 26절에서 유대교 지도자 그룹이 바울을 제거하려고 종교적인 송사를 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어졌다. 바울은 이 소송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유대교 지도층이 갖고 있는 종교와의 갈등이라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한다. 종교 VS 종교의 문제가 아님을 이야기 한 것.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저쪽(유대교) 사람들이 종교 문제로 끌고 가려한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종교와는 구분됨을 아그립바 왕에게 상기시킨다.
3,4 번째 용례는 갈라디아서 1장 13, 14절에 '내가 이전에는 유대 종교에 몸 담았을 적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고 열심히 유대교의 전통을 열심히 따랐었다'는 장면에서 서술되었고(탈종교 했음을 선언)
5번째 용례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religion이 갖고 있는 참 가치는 어려운 시국의 삶에서 고아나 과부를 돌보려는 자세라고 못박는다(비판적 시각에서 종교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킴).
이상의 사례에서 본다면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religion은 단 한 차례도 사용되지 못한다. 즉, 예수님은 religion의 대상으로의 성경적 지침은 없다. 예수님은 오히려 종교(유대교)를 싫어하셨다. 성경도 religion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 宗敎와 religion의 어원의 옷을 벗기면
글자 그대로의 宗敎는 원래 불교 용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런 느낌으로 유교나 도교도 가르침의 체계를 宗敎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고 봐야 한다. 宗敎라는 단어의 원래 동양적 의미는 道에 가깝다.
그러면 religion의 어원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re(반복) + ligate(라틴어; 묶다)의 합성어로 함께 칭칭 묶는다는 것을 뜻하며 집단적으로 문화적, 신앙적 체계를 공유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과 함께 묶는다 또는 인간이 하나님께 귀의한다'라고 자의적 해석을 하고 있으나 religion이 성경에서 유래된 어휘가 아님은 분명하므로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 통속적 의미에서의 종교라는 어휘가 갖고 있는 뜻
통속적 의미(학자나 고상한 이들이 생각하는 것에서는 사뭇 다른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종교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신앙의 대상인 神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현실적, 내세적 욕망을 삶에서 표현하는 일련의 행동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교회개혁 관점에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더러는 '구원이나 영생을 확신 내지는 선점'하고자 하는 욕망(또는 유화적 의미로서는 소망)에 대한 지분율 + 현실에서 불가항력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 神을 통해 이를 해결 받고자 하는 염원, 기도, 소원을 반복하는 지분율 + 순수한 열정으로 神에게 감사나 존경이나 숭배하는 행동의 지분율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현실에서의 바램 = 샤머니즘적 경향이 짙다.
4. 샤머니즘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마태복음 5장) 하시고 나서 가장 먼저 경계할 덕목으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지 말아라 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최우선적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 하나님의 정의(seek first his kingdom과 and his 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샤머니즘적 종교를 정면으로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가 시험한 '돌이 떡이 되도록 해보라'는 것과 마귀에게 경배만 한다면 '세상의 온갖 영화를 다 얻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유혹 과정과 사뭇 궤를 같이한다.
우리 신앙의 목적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신 그것에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셔서 나의 육신을 만족케 하고 무엇을 입어서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게 할까에 우선적 가치 부여를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침의 서두에서 못 박고 있다. 옷을 입는 다는 것은 종종 신분과 직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이 가르침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많은 예배당의 사제들이 먹고(eat) 마시고(drink) 입는(ware)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라고 부추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적지 않게 오염되었다.
5. 종교는 어디로부터 기원되었을까?
이제 매우 중요한 것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사적인 문제며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세계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이 정확하게 지적된다면 우리는 인생의 비밀에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종교(샤머니즘적)의 문제는 인류의 근본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면서 계시록적 결말까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종교의 흔적은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연관이 매우 깊다. 누구든지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하나님이 창조한 우월한 생명체였으나(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 그 스스로가 갖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이 왔다. 마귀(뱀)가 그들에게 접근함으로써 흔들어 놓는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불확실성을 고민했을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경고인 "너희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그날에 죽는다"는 것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죽음의 의미가 갖고 있는 공포심은 그들을 흔들어 놓았다. 죽음을 본 적도 없었고 경험한 적도 없었기에 이 미지의 사건 앞에 그들은 겁을 냈다. 아담과 하와는 이 가볍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서로 많은 대화를 했었을 것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와 상징성은 매우 희미하게 성경 여기저기에 실낱같은 힌트를 제공하고 있을 뿐인데 필자는 이 나무의 정체가 바로 종교(음녀적 경향)를 아담과 하와에게 심어준 존재로 본다. 그 열매를 먹었다는 의미는 사람의 존재 안으로 무엇인가 들어와서 소화가 되었다를 뜻하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어떤 그럴싸한 과일을 먹었다고 순진하게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단 사이비적 주장들은 종종 사단(타락한 천사)과 하와가 섹스를 했다는 유별난 해석을 하는데 필자는 이 이론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나무가 아님을 에스겔서 31장을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외에도 에덴동산에 있었던 나무에 대해 성경 몇 군데에 살짝살짝 숨겨 놓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담과 하와를 좌절과 고통에 빠뜨렸으며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나름대로 시도했다(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극점에서 마귀는 적절한 타이밍에 보기 좋게 속였다. 마귀는 그들을 사단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침을 준다. 맙소사!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가르침을 존재 안으로 받아들였다(열매를 먹었다).
이것이 종교의 시작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미래에 대한 존재의 불확정성,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종교는 교묘하게 후비고 들어가서 어퍼컷을 날린다. 거기에 걸리면 카운터다운이다. 인간에게 종교를 가져다준 존재는 바로 사단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정확하게 지적하신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야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일갈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을 얻어먹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자부심은 메시아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작동했던 것처럼....
6. 종교의 유전
그 종교는 이제 인간 숙명과 불가분의 관계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의 첫 자식이었던 가인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수고의 결과로 먹을 것을 얻었다. 노동이란 얼마나 신성한 것인가? 땀 흘려 일하면 땅은 노력한 대가만큼을 제공한다. 그런데 어떤 일인지 가인은 하나님께 이 곡식을 가져와 제사하면서 "욕망(탐심)"을 개입시켰고 하나님은 그 예배를 거부하신다. 예배의 중심에 욕망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가인은 이 정곡을 찌른 지적에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다. 그것이 가인이 행사했던 예배의 정체다.
가인은 농사를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에덴에는 먹을 것이 넘쳐났는데 거기에서 쫓겨난 인간은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기후도 완전히 제멋대로여서 노아 이전에는 비도 내리지 않았다. 아마도 가인은 물을 힘들여 떠다가 밭에 뿌려야 했을 것이고 메마른 땅에서 꽤나 고생했음이 눈에 선하다. 그런 가인이 이해가 된다. 식구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을까. 그렇기에 가인은 조금이라도 편한 농사를 소망했을 것이다. 글자 그대로 몸으로 때워 농사를 짓는 것은 진짜 힘들다(내가 해봐서 아는데 ^^). 가인은 그러므로 고통스러운 땅에서의 노동에 대해 늘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쉴 틈 없이 자라는 잡초 더미와 농작물을 갉아먹는 벌레들.... 가꾸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는 곡식들...... 이건 진짜 형벌이다.
개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에녹서에는 가인의 최후가 어이없으면서도 애절하게 묘사된다. 가인은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짐승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자신 손자의 화살에 맞아 죽는 최후를 맞이한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져 매일매일이 고통의 연속이다. 누군가 아벨의 복수를 위해 그를 기습 할 수도 있게 여겨졌을 것이고 사람의 시선을 피해 방랑하며 매일 매일 편한 잠도 잘 수 없었으리라.
가인과 후손들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손자 에녹(하늘에 올라간 에녹이 아님) 대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다. 그리고 이것이 본격적인 문제의 시작이다. 그리고 인류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 후손들이 바벨탑을 짓게 되는 시점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인간은 방종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며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임의대로 결정지은 결과였다. 이미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들은 욕망대로 엄청난 문명의 진보를 거듭했다. 특히 거인족 네피림들이 있었기에 그것은 더 비약적이고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다. 지구 전체에 산재해 있는 미스터리 한 거대 석조 문명의 흔적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키 최소 3m에서 15m에 이르는 거대한 체구의 네피림들은 현대의 발전된 기계 문명에서도 불가능한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돌들을 레고 퍼즐보다 더 완벽하게 다듬어 건축물로 쌓아 올렸다. 현대의 발달된 기계 문명으로도 고대의 거석 문명을 흉내 낼 수 없다 한다).
7. 종교의 발전
바벨탑은 찬란하게 꽃피었던 최초의 인류 문명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온갖 대단한 기술들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야금, 음악, 건축, 문학, 예술을 비롯한 전체적 문명들이 꽃을 피웠고 그들은 이 결과들을 흡족해하며 더 높은 문명의 발전을 지속시켰다. 그러는 가운데 에덴에서 일찍이 인류를 망가뜨린 사단과 마귀들도 그들과 은밀히 함께 있었다. 바벨탑에서는 종교도 꽃을 피웠다.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변호하며, 포장하며 불안감을 달래주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처럼 연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은 집단적인 종교의식이다. 사단 마귀는 종교의 설계자다.
바벨탑의 위치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 주변에는 지구라트라고 하는 신에게 제사하는 거대 건축물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벨탑은 사단과 마귀들의 놀이터요 활발한 활동무대가 되었다. 바벨탑에서 종교적 발전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배후는 이들이었다.
바벨탑은 종교의 기원이 되는 온갖 음행의 내용물이 발효 숙성된 장소인데 성경에서는 음녀라고 묘사될 성질의 것들이다. 우선 바벨탑의 중심 인물들을 추적하면 니므롯에 이른다. 니므롯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함의 자손이다(함의 자손은 이집트와 아프리카로 확산 되었다). 니므롯의 아내는 인류 종교사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한 세미라미스다. 세미라미스는 사생아를 낳았고 이 때 니므롯의 시체를 토막내어 각 지방 토호들에게 보내고 니므롯이 자기 몸을 통해 아기로 환생했다고 전갈한다. 그 아이가 담무스(에스겔 8장에 언급됨)이며 세미라미스는 신의 어머니가 되고 담무스는 환생한 니므롯이 된다. 여신과 아기신의 정체는 여기서 기원 되었다. 결정적 타이밍에 사단이 이렇게 개입한다.
세미라미스는 담무스를 창세기 3장에서 말한 여인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자기는 여신이 되고 담무스는 태양신이 되고 후에는 아들 담무스와 결혼하는 해괴한 음행의 역사가 열린다. 이런 마당에서 바벨탑에서의 종교가 건전할 리는 만무하다. 온갖 괴상한 이방 종교의 발원지가 바벨탑이며 거기에서 인류의 도시문화도 동시에 꽃을 피웠다. 이 문화의 흔적은 애굽으로 흘러갔다.
8. 종교의 다양한 분화와 전래
비록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인류 대청소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실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노아가 거대 선박을 건조하던 과정에서 어쩌면 순박한 네피림 몇몇 정도는 협력했을 수도 있고 노아 가족 외에 협력했던 네피림이 동승했을 수도 있다. 나중에 다윗 시절에는 가나안 땅에 남아있는 네피림들을 도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는 인류 DNA에 잠복해 있다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하여튼 노아 홍수 사건 이후에도 네피림은 일정 숫자를 유지할 만큼은 존재했다.
현재 지구 상에 남아있는 가장 흔한 광범위하고 오래된 종교의 흔적은 여신 사상과 여신의 아들이며 남편이 된 태양신 담무스다. 니므롯의 아내인 세미라미스와 그 아들 담무스(에스겔 8장)는 신적 존재로 격상되었다. 가톨릭에 혼합되어 있는 음행적 요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는 여신을 싱무(성모)라고 칭하며 인도는 여신을 인드라니 또는 크리슈나라고 부르며 로마에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가 있었다. 애굽에서는 아이시스 여신이 있고 아들 신은 호루스다.
역사적으로 이 흔적들은 바벨탑-바벨론-앗시리아-페르시아-애굽-가나안-그리스 로마 곳곳에서 발견되며 수많은 음녀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전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유대인들에게 누룩처럼 숨어서 전승되어 온 종교의 흔적들이 성경에서 자주 출몰하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종교적 습성이 유대인들 생활 깊숙이 숨어들어 발효되고 숙성되어 하나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연대기적으로 아브라함의 3대째 손자인 요셉대에 이르러 유대민족은 애굽땅에서 번성을 시작한다. 함의 자손이 다스리는 애굽땅, 바벨탑의 문화가 계승된 태양신의 나라 애굽에서 숫자가 거대해진 유대민족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엄청나게 번식한다. 이 때 까지는 아직 유대교라고 할 수 있는 내용적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출애굽 과정에서 벌어진 바벨탑적 음행의 종교 흔적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오랜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으면서 애굽의 종교 문화가 습합되어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지 않고 불안한 인간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우상에게 그들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걸하기 위하여 욕망을 투영한다. 그것이 종교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던 시점에는 사단과 마귀로부터 전수된 종교의 모습들이 유대교 깊은 뿌리에서 발견되어졌고 그것을 자주 언급하셨다.
9. 하나님 나라를 해법으로 제시하시다
예수님은 인간을 꽁꽁 묶어 얽매도록 하는 종교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시도하셨다. 그리고 항구적인 방책으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을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도록 남겨놓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축에는 성령이 있으므로 사단이 무너뜨리기 불가능한(음부의 권세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학살과 핍박을 성도들은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초기 사도 시대의 상황들을 성경 속에서 살펴보면 종교적인 요소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늘날 굳건한 유전을 형성한 개신교의 모습과 초대교회의 모습은 전혀 같지 않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을 당한 원인을 보면 늘 종교 패권을 행사하는 자들에 의해 교회 내부에서 폭력이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교, 초대교회를 말살하려고 했던 유대교, 제세례파와 개혁교회의 태동을 막느라고 수천만명의 순교자를 살해했던 중세 카토릭이 그러하다. 그들의 배후에는 늘 사단 마귀가 있었다. 사단 마귀의 행동 패턴은 이렇게 일관 된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에게 운명 지어진 기본적 숙명이며 계시록에서 보증된 미래이다. 역사는 돌고 돌아서 예수께서 고대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본격적 회복을 이야기한다. 본격적 회복이래 봐야 천년왕국이라든지 기독교 황금 천년기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은 버려야 한다. 계시록으로 사기 치는 대표적인 구라쟁이들이 들고 나오는게 천년왕국 썰이요 14만4천명이 이 지구를 다스린다는 따위의 구라다. 결단코 그런 것은 없다. 우리의 왕 노릇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고 넘어서서도 안된다. 예수님이 떵떵 거리며 무소불위로 휘두르고 군림하다 가셨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뭐 초림과 재림은 격이 다르다고 구라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의 깨달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구라를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데 있다.
10. 종교의 종말
옛뱀, 사단, 용이 드디어 최후를 맞이 한다. 음녀와 짐승과 거짓선지자는 종교를 구성하는 삼위일체다. 음녀의 정체는 바람난 마음(지적 또는 영적 체계)으로 표현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구조체라면 짐승은 음녀가 깔고 앉은 하드웨어적 체계다. 그리고 거짓선지자는 그런 종교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사제 역할을 하는 사람 존재다. 거짓선지자의 숫자는 생각 이상으로 많다고 성경은 못박는다(마태 24장 11절). 거짓선지자는 예수님표 옷을 입고 여러분 앞에 나아온다(양의 탈을 쓰고 여러분의 재산과 시간과 영혼을 약탈한다). 거짓선지자는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실상 거짓선지자는 우리 신앙의 테두리에서 자주 출몰한다. JMS라든지 문선명이라든지 이마니 같은 사람이 거짓선지자라고 퉁쳐서는 안된다. 거짓선지자는 여러분 옆에 친근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고 자신이 거짓선지자인지도 모른체 숨을 쉬고 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 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갈라디아서 2장 3절의 말씀은 얼마나 절묘한가.
앞으로 다가올 종교적 변화 양상은 가장 먼저 거짓선지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음녀가 될 수 있는 존재는 교회밖에 없다. 예수님의 신부였다가 바람이 났으니 교회가 타락하는 것이 바로 음녀의 정체다. 계시록적 전쟁의 양상은 기독교권과 비기독교권과의 전쟁일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계시록의 갈등 양상은 양과 염소의 분리에 대한 서사다. 계시록에서는 가장 첫번째 심판이 거짓선지자들로부터 시작됨을 볼 수 있다. 사단 마귀가 잡히는 시점보다 무려 천년이 앞선다. 거짓 종교로 밥벌이를 하는 존재들의 운명이다. 종교의 종말이 여러분 눈에 보인다면 그 시간표가 여러분 앞에 펼쳐짐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선지자가 활동을 못하게 되면 당연히 그들을 주축으로 형성된 종교단체나 기관은 힘을 잃게 된다. 오늘날의 종교를 보라. 그들은 짐승과 같아서 계속 먹을 것을 게걸스럽게 요구한다. 바벨탑 같은 큰 집을 짓자. 흩어지지 말자.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거대한 성을 쌓고 거기서 종교 파티를 열자.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 다음 우리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우상 하나님에게 요구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밤낮으로 경배해야 한다. 이것이 종교의 줄거리다. 죽음에 대한 공포,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감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종교는 작동한다. 그러나 그 끝은 공허하다. 이것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육육육은 뭔가?
이마에 표가 있다고?
오른손에 표가 있다고?
혹자는 이것을 바코드나 생체칩이라고 침을 튀기며 주장한다. 다시 한 번 글에 밝히지만 본인은 IT 전공자로써, 유비쿼터스라는 학문도 쪼끔 했다. 일반인보다 쵸큼은 더 안다. 바코드나 생체칩의 주 기능은 개인식별코드를 부여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여러분 손에 들린 핸드폰 단말기는 USIM이라는 개인 식별코드가 다 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핸드폰을 머리에 대고 통화하고 손에 들고 다니니 666표를 받은 것인가?
현재 IT 기술은 먼지보다 작은 분자 레벨에 식별 코드와 정보를 새길 수 있다. 인체로부터 미약 전류를 얻는 기술도 간단하며 밧데리를 끼우지 않아도 된다. 할 수만 있다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바코드를 이마나 살갗에 새기거나 생체칩을 심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제발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에 여러분 지력이 낭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666이란 생각하는 이마와 일하는 오른손이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를 자문한다면 쉽게 의문이 풀리리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 우상에게 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그것을 위해 음녀와 짝이 된 종교에서 우상에게 절하고 있지 않은가를 고민해봐야 된다. 만약 인류가 그것을 눈치체고 각성을 하게 된다면 인류 문화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것이다. 666이 짐승의 표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짐승은 먹을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짐승에 대한 묘사는 유다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된다. 짐승은 가공의 괴물이거나 바코드를 생산해 내는 유럽연합의 비밀 장소에 있는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일 수 있다).
종교의 종말은 계시록에 명백히 나와있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인류 근원적 문제를 향해 각성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나는 꿈을 꾼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현상, 우리 인격적 존재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계시록적 역사가 구체적으로 시작되고 표현될 시점이 드디어 도래하는 그 때를 꿈을 꾼다. 그 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먹을 것을 위해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삶 가운데서 즐거이 실행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보편적 문화로 자리잡을 날이 반드시 도래하리라.
나•라•협•동•조•합 -iDea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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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하는 것은 도전이고 반향입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사고하고 경험하는 폭을 넓히는 도전 정신은 인간 누구에게나 권장 할 만한 일이죠.
행25:19 종교=데이시다이모니아: 데일로스(두려움)+다이몬(악령) 악령을 두려워함.
본문의 종교= 베스도의 말.
행26:5 종교=드레스케이아스 (종교, 하나님예배, 숭배하다)
본문의 종교= 바울의 말
(골2:18,숭배함) (약1:,26-27 경건)으로 번역됨
올리신 좋은 내용의 글을 통하여 말씀을 다시 살피게 하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로인하여 종교로 번역된 성경의 내용들은 위와 같이 대강 정리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입니다.
초림과 재림은 격이 다르다고 구라치는 자들의 다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질문이 애매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
사실 초림과 재림은 다르지 않은가요? 혹 하신 말씀을 오해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
네 재림의 주제를 놓고 현혹하는 현상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서로 의견이 확연히 갈라질 수 있는데 저는 예수님의 재림이 심판주로써가 아닌가 확신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전천년주의적 환상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기나긴 통치 기간(소위 천년왕국)을 갖게되고 이때 왕이 된 사람들이 빌붙어서 떵떵거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최대 약점은 예수님이 이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전천년주의에 따르면) 엄청난 반란의 무리가 이 땅을 미혹하고 거대한 영적 전쟁이 계속 됨을 볼 수 있죠. 그러면 그 이론에 입각한 예수님의 입장은 완전히 무능한 왕 그 자체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저에게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지배적인 신학 경향은 미국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전천년주의적 환상이 짙습니다. 또 실재로 계시록으로 장난친 사람들이 소위 정통교단이라고 자부하는 내부에서도 많이 나왔죠. 지금도 굳건히 자기의 밥통을 계시록으로 구라 치면서 지키고 있는 목사들도 있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사람이 최근 그가 소속되었던 예배당을 은퇴하고 200억을 축적해서 부동산 다툼의 재판에서 승소한 사실이 있죠. 예수님 곧 오신다며 구라치고 돈은 뭐라고 모으는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들고 왜 종교의 길로 가게 되었는가는 우리가 늘 고민하고 경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뜨문뜨문 봤습니다만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인 것 같아 신선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종교의 기원으로 보신 것은 좀 상상과 비약이 섞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은 말씀 그대로 주신 의미를 상고하는게 유익하겠지요.
저는 종교가 인간의 생존본능 같은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종교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고요. 목적은 물론 안전과 과시를 위한 물질에 대한 욕망. 돈을 사랑하는게 일만악의 뿌리라고 한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선악과는 없고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성경에 있습니다. 이는 주마간산의 거꾸로 개념이죠. 선악과를 집중하면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간과하게 마련입니다. 받는 은혜마다 다릅지요.
종교를 비판적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며
예수님이 무엇과 그렇게 충돌하며 싸워야 했는지에 대한 시대 상황은 바로 그것을 시사하죠. 누군가는 그 '종교'를 이용해 사람의 자유함을 빼앗음과 동시에 반사적 이익과 지위를 확고히 하죠.
그러한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서 이웃을 대한다면 그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 중 하나겠죠.
@iDeaRush 알파와 오메가
종교의 시작과 현재진행형..., 그리고 종교의 종말(미래 언제일지...?)
사람도 피조물인지라...,
종교도 인류와 문명과 함께 했는데...,
인간과 사단의 충돌과 싸움, 곧 영적 전쟁은 참으로 지긋지긋하게 오래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