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1851~1895)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서,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1866년,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간택되어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결혼을 하고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집안의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해 정권이 장악된 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간택하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총명했기 때문에 왕비가 되고 몇 년 후에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결국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이 벌어진 원인은 궁녀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벌어지자 유 최익현에게서 흥선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1873년, 이 상소로 인해 명성황후는 일족인 민씨들을 등용하여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1882년,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대원군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켜 명성황후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으나 명성황후는 궁에서 빠져나와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에 응하여 출동한 청군은 대원군을 체포하여 위기를 넘겼다.
개혁이 늦추어지자 개화파의 불만이 증가하여 급진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는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시 정권은 온건 개화파에게로 넘어갔다.
이후로 계속되는 외교문제가 명성황후의 주도로 해결되고,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내정이 혼란해지자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은거하던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였다.
1894년,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하게 되자 조선에서의 세력확장을 노리던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며 (을미사변) , 명성황후를 폐서인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95년 10월 10일에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대되었고, 1919년, 고종이 붕어하자 2월에 미금시로 이장되었다.
을미사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뒤 박영효·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 아소정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이두황·이진호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