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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지요!
그런데 무슨 조화속인지, 그 맹세 잊고 오르면서, 다음에는 오르지 않겠노라고 헛된 맹세를 또 해봅니다.
퍼질러 앉아 숨을 고르면서 고통스러웠던 기억 같은 것은 쉬이 잊고 살기에, 고단한 산행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선의 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행로난(行路亂) 이라는 시로 산행기를 시작합니다.
그대는 행로의 험난함을 보지 못했는가
무주에서 진안 사이 산중을 가 보아라
(君不見行路難 茂朱鎭安山峽裡)
높은 곳은 사다리로 하늘을 오르는 듯
낮은 데는 땅 속 깊이 들어가는 듯
(高者如梯天 下者如入地)
벼랑타고 만길 아래 내려다보면
몇 걸음 걷기가 천리처럼 시름되네
(綠崖俯萬仞 寸步愁千里)
정오에도 봉우리가 해를 가리고
해지기전 행인들이 뚝 끊어지네
(停午日隱峯 未夕行人絶)
따뜻하면 진흙이요, 추워지면 얼음 되어
빙판에 미끄럽고 진흙 빠져 힘이 드네
(暖則泥融寒則氷 氷滑易顚泥陷沒)
호랑이는 산에 있고, 이무기는 물에 있어
행로의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노라
(虎豹在山龍在水 行路之難不可說)
한 치 사람 마음속에 구의산이 있다지만
그대 말을 마오, 이곳 행로험난 말로 할 수 없다오
(人心方寸有九疑, 君莫道行路之難不可說)
* 구의산
중국 호남성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아홉인데, 그 형세가 유사하지만 보는 사람이 현혹된다고 하는 산. 마음속 구의산이란, 마음이라는 게 천변만화 요동을 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에 올라가야 하므로, 등산동호회에 참석하기가 여의치 않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 고사했지만 또 어찌하다보니 대구지검에 와서도 등산동회회장이 됐습니다.
첫 산행을 제 입맛대로 팔공산이나 비슬산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홍대철 간사는 그곳은 직원들이 많이 가봤기에 참석율이 좋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지리산 천왕봉을 원점회귀방식으로 돌아오자고 했습니다.
등산일자는 6. 2. 로 정하고,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 그리고 장터목 산장을 거쳐 중산리 계곡 쪽으로 내려오기로 정했습니다.
6. 2. 아침, 홍 간사는 도착하는 회원들에게 아침용 도시락을 나눠주고, 청사현관 여기저기에 자유스럽게 앉아 아침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아침 6시까지 청 현관에 집결하여 출발하기로 했으나, 몇몇 직원들로 인해 30분가량 늦게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출발했습니다.
중산리 매표소에 도착하기 직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회차토록 했습니다.
몇몇 직원이 내려가 매표소 앞까지 가자고 사정했지만, 안 된다고 하더랍니다.
어떤 직원 왈, 옛날 같으면 어디 직원이다라고 하면 보내주었겠지만, 요즘은“모범의 보여야 할 분들이 왜 그러시냐!”고 오히려 핀잔을 듣기 십상이어서 어디 근무한다는 소리도 못한다고 투덜거리데요.
일단 전부 내려서 간단히 제가 인사말을 하고, 각자 관등성명을 대는 것으로 서로 인사를 했습니다.
대구고, 지검과 서부지청 직원까지 모두 26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회차한 지점, 아스팔트 길에서 약10분가량 체조를 하며 몸을 풀었습니다.
9시22분,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앞을 통과했습니다. 공원 입장료를 받지 않아 매표소는 철거되고, 번듯하게 관리사무소가 지어져 있었습니다.
날씨가 흐렸고 ,운무에 덥힌 골짜기에서 세찬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항상 그렇듯 전, 초장에는 그럴싸하게 걸었지요.
선두에 서서 헐떡이며 걷다보니 칼바위 직전에 숨이 차, 멈춰 앉아 숨을 골랐습니다.
천천히 가야하는데, 처음부터 너무 빨리 걷는 게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산행은 내 능력껏, 하고 싶은 데로 하기 위해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간혹 더불어 살기도 해야 하므로, 함께 등산할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혈기왕성한 사람들의 페이스에 맞추다보면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데요.
출렁거리는 철다리를 건너서 장터목산장으로 가는 길과, 법계사로 가는 길 삼거리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습니다.
가파른 산길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천천히 올랐습니다. 숨이 턱에 찰 때쯤이면 퍼질러 앉아 숨을 골랐습니다.
배낭 안에 1리터짜리 물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낸 보이차를 꺼내 마시기도 했습니다. 수건으로 말아와서인지, 아직도 따뜻했습니다.
그러면서 글 머리에서처럼 왜 또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점점 후미로 쳐졌습니다. 해발 1,066미터 망(望)바위에 도착해 헐떡이며 올라온 길을 되돌아봤습니다.
이제 겨우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지리산 종주를 하던 1985년 여름, 저녁을 먹고 어둠이 자욱하게 깔릴 때쯤 중산리 매표소를 출발해 로타리 산장에서 1박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두워, 로타리 산장 오르는 길이 얼마나 가파른 길인지도 모르고 걸었지요.
아예 모르고 가는 것이 두려움을 걷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이윽고 로타리 산장에 도착하니, 먼저 갔던 직원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사진도 몇 장 찍고 수통에 물을 담았습니다.
천지는 운무에 뒤덮여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법계사 위 쇠줄을 박아 둔 바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데, 천지가 운무에 뒤덮여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무리를 지어 걸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지금까지는 무리를 지어 올라올 수 있으나, 이제부터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그야말로 혼자서 걷게 되는 길입니다.
등산은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든 산행 길은 오만가지 생각들을 지워줍니다. 정상, 천왕봉을 생각한다고 천왕봉에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것 같지 않더군요.
산행이란, 한발 한발 떼서 앞으로 가는 것이지, 뒤쳐졌다고 세발자국 네발자국 건너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데요.
남들 한발 한발 걸을 때, 경치 좋다고 구경하고 노래 부르고 놀면, 당연히 뒤쳐지지요. 따라서 뒤쳐진 것은 다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니, 왜 나는 뒤쳐졌냐고 후회하고, 남의 탓할 것 없지요.
그 대신 꽃향기 코끝에 묻히고 느리게 가는 산행도 좋은 것 아닐까요!
산을 오른다는 것은 수양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퇴계 이황 선생님께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겠지요.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산을 유람하는 것을 말하더니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도다.
공력을 다하는 것도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는 법
깊게 깨닫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달린 것
조용히 앉아 일어나는 구름으로 오묘함을 알고
근원을 찾아가면 사물을 시초를 알게 되리
그대들에게 높은 절정을 찾으라 권하지만
노쇠하여 중도에 그만 둔 내가 부끄럽다.
해발고도 1,700미터 개선문(凱旋門)에 도착했습니다. 또 한고비를 넘긴 셈입니다.
그곳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작년에 서부지검 해오름 산악회원들과 천왕봉을 오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개선문에서 다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아도 운무에 덮힌 산하는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고빗길로 향했습니다. 천왕봉 바로 밑 천왕샘에서 찬물을 한잔 들이키고, 심하게 경사진 철 계단을 올랐습니다. 하산하는 어떤 등산객이 철 계단 끝에 가면 고생 끝이라고 위로했습니다.
철 계단 끝에서부터 그야말로 은산철벽 천왕봉의 마지막 경사진 길이 시작되는데, 고생 끝이라니...뻥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운무에 뒤덮여 정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늠이 되지 않지만, 숨이 턱에 걸릴 때쯤, 해발고도 1,915미터 천왕봉에 도달했습니다. 오후 1시 5분이었습니다.
서부지검 등산동호회원들과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무려 네 시간이나 걸린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증거를 남겨야 한다며, 정상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고, 빗에 젖어 온몸이 얼어붙는 듯 추웠습니다.
서둘러 배낭 안에서 점퍼를 꺼내 입었습니다. 오래 머물 수 없어서 서둘러 장터목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하산했습니다.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하자, 고지대여서인지 옅어 하얗기까지 한 철쭉꽃이 아직 화사하게 무더기로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올라오던 사람들이 꽃 보라면서, 내려올 때 사진을 찍자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무래도 선발대와는 상당한 시간차이가 나, 장터목산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석봉에 도달하기 전, 바람이 잦아드는 곳에서 여직원들을 포함하여 6,7명의 직원들과 김밥으로 점심을 간단히 해치웠습니다.
다시 짐을 꾸려 제석봉으로 향했습니다. 세찬 바람과 우유빛 운무 속에서 앙상하게 말라, 가늘디가는 팔을 내뻗친 고사목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 몸을 비틀고 있기도 했습니다.
장터목산장에 도착하여 취사장을 둘러봤지만, 우리 청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발대와 너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장터목산장에서 중산리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 내려갔습니다.
서부지청 김대석 수사관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산했습니다.
하산 길은 비에 젖어 미끄러워 조심스러웠습니다. 때로는 계곡이 산사태를 맞았는지 허물어져 내린 곳도 있었습니다.
계곡 물소리가 우당탕 세차게 들리다가 어떤 곳에서는 자갈밭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완전히 잦아들어 적막감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계곡물을 볼 때면 어느 선비의 노래처럼 홍진에 썩은 제 몸을 씻고 싶더이다.
“온몸에 찌든 사십년 찌꺼기를 천말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오장에 흙먼지가 남았거늘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南冥 曺植)라고 격하게 노래한 지리산의 선비처럼...
맑고 푸른 물이 담겨있는 곳에서는 고개를 돌려 한참동안 그 풍광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큼직큼직한 돌멩이들로 계단을 만들어 둔 길을 계속 걸어오다 보니 발바닥에 불이 났습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내려오는데도 우리 직원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늦었다 싶었습니다.
다시 법계사 쪽 방향과 장터목산장 쪽 방향이 합쳐지는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산길이 편해졌습니다. 드디어 앞서가던 우리 일행 중 최혁 검사를 비롯해 홍 간사 등 직원들 일부를 만났습니다.
중산리 관리사무소 입구를 통과하니 오후 4시 22분이었습니다. 딱 7시간 걸렸습니다.
상가입구, 용궁식당 야외 좌석에 퍼질러 앉았습니다.
빗방울이 들이치는 것을 막겠다고 파라솔을 설치했지만, 비를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습니다.
회원들 7,8명과 후발대가 오기까지 동동주를 마시자고 제의해, 파전, 두부, 감자전을 안주 삼아 동동주잔을 비웠습니다.
비가 와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실내로 들어갈 수 없어서 야외에서 먹다보니 불편했지만, 음식점 주인에게“바쁜데 우리까지 와서 미안합니다.”라고 설레발을 쳤지요.
술잔에 파라솔을 타고 내린 빗방울이 떨어지고, 옷은 비와 땀에 젖어 냉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그리고 행로의 어려움(行路之難)을 벌써 잊고, 마음은 산행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워졌습니다.
대구에 와서 첫 산악회를 무사히 마치면서, 백호 임제님의 행로난에서 시작한 우리의 행로지난은 결국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행로난(行路難)을 산행기 마지막에 부칩니다.
황금술동이엔 맑은 술이 만말
옥쟁반에 진귀한 만금의 성찬
(金樽淸酒斗十千 玉盤珍饈直萬錢)
잔 멈추고 젓가락 던져 먹지 못한 채
칼 뽑아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음은 아득
(停杯投箸不能食 拔劍四顧心茫然)
황하 건너려니 얼음이 강물을 막고
태행산 오르려니 눈이 하늘을 어둡게 하도다.
(欲渡黃河冰塞川 將登太行雪暗天)
한가로이 푸른 시냇물에 낚시 드리우다가
홀연히 배를 타고 해 향해 가는 꿈을 꾸니
(閑來垂釣碧溪上 忽復乘舟夢日邊)
인생살이 어려워라, 인생살이 어려워라
갈 길 많으니 지금 이 길 어디인가
(行路難行路難 多岐路今安在)
긴 바람 타고 파도 만날 때 기다려
구름 높이 돛달고 넓은 바다 건너리
(長風波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
등산동호회원 여러분, 회장을 비롯한 후발대 때문에 고생 많았습니다.
○ 등산동호회 참석자 명단(고검, 지검, 서부지청 합동 산악회, 직위생략)
강영권, 유석환, 최혁, 김명규, 김정원, 손영일, 신범수, 안준열, 이범재, 이승환, 최병학, 김대석, 김동준, 김용길, 김이섭, 홍대철, 박창범, 송혁진, 최용태, 진정식, 최영광, 박재규, 나희선, 박영란, 정명주, 정은옥
첫댓글 우리 영권이 친구는 글을 맛갈 스럽게 잘 써. 대구 에서도 건강 관리 잘 하시게나. 석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