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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민족통일 방향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인천 황해도 도민회 회장 류청영
I. 한반도 분단 과정과 6.25전쟁
1. 한반도 분단 과정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통일은 이 시대 한민족의 최대과제로써 반드시 이룩되어야 한다. 통일을 말하기에 앞서 남북한이 어떻게 분단되었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반도 분단은 3단계로 이루어졌고, 6·25 전쟁으로 인해 같은 민족이 적대감이 더욱 심화되어 민족분단의 고착화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미·소가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함으로서 지리적인 분단이 되었고,
(2) 남·북이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함으로서 정치적으로 분단이 되었고,
(3) 김일성이 적화통일 야욕으로 6·25전쟁을 일으킴으로써, 390만 명의 사상자를 내 같은 민족이 원수로 변하여 민족분단의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지리적 분단은 미·소가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45년 2월 11일 미·영·소 정상이 얄타회담 때에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여하기로 합의해 놓고도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여 34만여 명이 사망하자 미국의 신무기 개발로 일본의 항복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소련군이 8월 12일 나진에, 14일에 청진에 상륙하였다. 이처럼 미군의 원자탄 투하로 말미암아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소련은 일본 땅에 상륙한 사실도 없이 승전국이 되어 나진, 청진 쪽으로부터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남하를 계속하자 미국이 38도선 이남에는 내려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국이 9월에 인천으로 진주하여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됨으로써, 지리적 분단이 이루어졌고,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남북이 분단된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분단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정치적 분단 과정
남북이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정치적 분단이 되었는데 남북이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지리적 분단에서 유일하게 남북한이 합법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UN의 통일방안을 소련의 지시에 따라 북한의 반대로 남북한이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하게 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남북이 미군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고 군정을 하면서 1945년 12월 27일 신탁통치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처리방안을 미·소·영외상 회의에서 모스크바 협정이 이루어졌다. 당시 좌우 모든 정치세력은 신탁통치안을 반대하였으나, 남한은 계속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북쪽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신탁통치를 찬성으로 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남북한 통일 문제가 미국과 소련 간에 합의가 실현되지 못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하기에 이르렀고, UN에서는 UN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하도록 결정하였으나, 북쪽이 소련의 사주로 반대함으로써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의 유일한 기회가 상실하게 되었다. UN 감시 하에 총선거를 북쪽에서 반대함으로서 UN 감시단의 활동이 가능한 남쪽에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하고, 북쪽은 9월 9일 공산정부를 수립함으로서 남과 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정치적 분단이 되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반대로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되고, 소련과 그의 앞잡이들 때문에 정치적으로 분단된 셈이다.
3. 6.25 전쟁과 분단의 심화
6·25 전쟁으로 민족적 분단이 심화되었다.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승낙을 받아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같은 민족이 서로 상대방에게 총을 쏘아 390만 명의 사상자를 냄으로써 같은 민족이 원수가 되어 민족 분단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6·25 전쟁은 김일성이 선전포고 없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기습 남침함으로서 한국 군인은 토요일이라 장교는 퇴근하고, 사병도 3분의 1이 외출, 외박으로 새벽에 비상소집을 해도 비상소집이 되는 않은 상태에서 인민군이 물밀듯이 밀고 내려와 기습 남침이 성공한 것을 확인한 김일성은 11시에 선전포고를 하고 11시 30분에 평양방송으로 남한 국방군이 해주를 침공하여 응전하고 있다는 발표를 함으로써 6·25 전쟁의 책임을 남한에 돌리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지금도 6·25 전쟁을 남쪽에서 북침한 전쟁이라고 허위선전을 하고 있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 대사였던 장면 대사가 미국 트루만 대통령에게 북한군의 남침을 막아줄 것을 간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은 미국 국무장관이 1950년 1월에 애치슨라인 발표로 극동지역 방어선이 일본이기 때문에 한국은 미국의 방어 계획 밖에 있었고, 미국 군 수뇌부에서는 한국전 참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장으로 유럽전투에 참여하였던 군인 출신 트루만 대통령은 미국의 극동지역 방어 계획을 바꾸어 한국전 참전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때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전 참전을 포기했다면 대한민국은 3개월도 안되어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트루만 대통령의 생각은 한국을 포기하여 한국이 공산국가가 되면 공산국가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지구상 곳곳에 공산국가가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건국이념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산인데,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가 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미국 정책에 위배되기 때문에 한국전 참전을 결심하고 트루만 대통령은 UN 안보리 이사회를 소집하였고, 이때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불참으로 UN에서 한국전 참전 결의를 얻어 UN군의 명의로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 맥아더장군에게 한국전 참전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렇게 된 유리한 국제 정세는 거부권을 가진 소련이 UN안보리이사국 회의에 불참했고, 중국은 거부권이 있었지만, 당시 중국은 장개석 정부였고, 모택동의 공산정권은 1949년에 정부를 수립하고, 1971년 10월 25일 UN 총회에서 대만 장개석 정권을 UN에서 축출하고, 모택동 정부가 UN에 가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오산에서 인민군과 첫 접전한 미군은 스미스 부대였다. 스미스부대는 지형에 낯설고 날씨가 덥고, 인민군의 전력을 얕잡아보고 전투에 임한 결과 인민군에게 패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인민군은 일시나마 미군을 물리친 강한 군대로 알려졌고, 대전이 함락 당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넘기게 되었다. 38도선에서 220km 떨어진 대전을 25일만에 빼앗기고 40일쯤 지나서 8월 초에 낙동강까지 진출하고, 김일성은 8월 15일 이전에 부산까지 점령하도록 전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때 낙동강 전선만 무너지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서 UN군은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많은 희생을 무릅쓰며 40여 일을 버티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은 병력을 증강하여도 낙동강에서 38도선까지 회복하기 위해서는 10만 명의 병력소모가 예상되므로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38도선까지 일거에 회복하기 위해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되었는데 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륙의 적지로는 조수 간만의 차가 적을수록 좋고, 상륙지점에 방파제가 없어야 되고, 상륙 후 부대가 거점을 확보할 때까지 시가전이 없는 지역이어야 하나, 인천항은 조수 간만의 차가 9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만의 차가 큰 곳이기 때문에 2시간 내에 상륙을 끝내야 하는 상륙 시간상의 제약이 있었고, 협소한 수로로 군함의 기동 공간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고, 인천항 전체에 방파제가 있었고, 상륙과 동시에 시가전을 하여야 하는 등 상륙작전의 조건이 제일 나쁜 곳이 인천이었다.
간만의 차가 9m나 되는 곳으로 상륙한다면 작전의 성공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하므로 도박이라고 하였고, 미국 군 수뇌부에서도 인천상륙을 반대하고 군산이나 동해안의 주문진으로 상륙할 것으로 권유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인천항으로 상륙을 하면 유리한 점은
① 군수물자 조달에 필요한 항구를 즉시 확보할 수 있고, 군수물자를 부산항에서 운반하는 것보다 인천항에서 운반하는데 시간 절약이 될 수 있고
②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세를 일거에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고, 낙동강에서부터 밀고 올라가는 것보다 병력소모를 10만 이상 줄이고, 한국 국민의 희생도 200만 명 이상 줄일 수 있고, 전쟁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에 맥아더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9월 9일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 작전명을 CHROMITE로 명명하고, 항공모함을 포함해서 미국 군함 226척, 한국 군함 15척, 영국 군함 12척, 캐나다, 호주, 프랑스 군함 등 261척의 함정을 상륙 1일 전인 9월 14일에 덕적도 앞바다에 집결시켰다가 북한군이 남침한 지 80일이 되는 9월 15일 인천항 만조 때를 이용하여 16개국에서 차출된 7만 5천명의 병력으로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28분만에 월미도를 점령하고, 오후에 인천을 장악하고, 9월 20일에 한강을 넘어 서대문구 연희동 고개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여 상륙한지 13일이 지난 28일에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29일에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도 서울을 인도하는 환도식을 가졌던 것이다. 서울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침략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때 낙동강까지 점령하고 있던 북괴군의 주력부대는 보급로의 차단으로 보급을 받지 못하고 인민군의 앞과 뒤가 UN군에게 포위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후퇴할 퇴로가 막히자 주력부대의 일부는 백두대간의 산맥을 타고 북쪽으로 갔고, 일부는 지리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군은 낙동강에서 그 유명한 군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라는 군가를 부르며 후퇴하는 인민군의 뒤를 따라 15일만에 38도선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이 동부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다.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할 때 UN의 결의가 38도선까지의 원상회복이었기 때문에 미군 지휘부에서 38도선을 넘을 것인가에 대하여 논쟁이 벌어졌었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 국무부에서는 이참에 38도선을 넘어 무력 통일을 주장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북진 통일을 주장했으나, 미 CIA에서는 38도선을 넘을 경우 중공군과 소련군의 참전으로 3차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염려해 반대하였으나, 트루만 대통령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10월 10일에 원산 점령, 10월 21일에 평양 점령, 10월 26일에는 압록강이 보이는 곳까지 진격하여 나머지 100km만 더 진격하면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구원 요청을 하여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해전술로 내려오자 다시 전세가 불리해졌던 것이다. 맥아더장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만주에 집결한 중공군을 폭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트루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UN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1개월간 싸우다 후퇴를 하는데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12월에 함흥부두에서 군인 10만여 명과 피난민 15만여 명이 해상 최대의 철수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배를 타느냐 못 타느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걸어서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남으로 남으로 피난 길에 섰던 것이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어주어 소위 1·4 후퇴로 수원, 안성, 원주, 강릉 라인까지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임진강변에서 수많은 중공군을 섬멸하고, 동부전선에서는 한국군이 연천, 철원, 속초를 점령하는 대신, 서부, 중부전선에서는 연백, 옹진 평야를 내어주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함으로써 6·25 한국전쟁은 멈추게 되었고, 250km의 휴전선과 폭 4km의 비무장지대라는 DMZ가 생겨났고, 6·25 전쟁으로 변경된 제2의 38°선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휴전선이 생기게 된 것이다. 휴전협정에는 미국, 중국, 북한이 서명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이에 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북한의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켜 남한 민간인 100만여 명과 북한 민간인 150만여 명, 남북한 군인과 전투요원 140만 명 모두 39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산가족 1,000만 명, 실향민 50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국토의 80%가 파괴되었고 한반도는 처참하게 황폐화 되어 모든 것을 잃고 민족분단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가게 되었던 것이다. 6·25 전쟁은 국제 공산주의 확대 사조 속에서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김일성이 그의 앞잡이 행동대원으로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한반도의 분단은 지리적 분단, 정치적 분단, 민족적 분단 모두가 소련과 북한의 전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II. 휴전 이후의 북한의 도발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56년간에도 북한은 남침 야욕을 버리지 않고 계속 도발을 해 왔으나 큰 사건 몇 가지만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동해안에서 활동하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북한이 납치하였으나, 미국이 보복하지 않고 협상으로 군함은 포기하고 해군만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군이 전방관측에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다가 비무장지대로 무기가 없기 때문에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고,
3. 북한은 남침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기습남침용으로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땅굴을 파내려 왔다.
땅굴 작업에 참가했던 간첩 김부성의 말에 의하면 땅굴은 11개를 파내려 왔다고 하나 발견된 것은 연천에 있는 제1 땅굴, 철원에 있는 제2 땅굴, 문산에 있는 제3 땅굴, 양구에 있는 제4 땅굴뿐이며, 7개의 땅굴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4. 1968년 1월 17일 김신조 일당 31명이 한국 특수부대 복장과 한국군 계급장을 달고 미군 관할 구역 남방 분계선 철조망 밑으로 침투하여 1월 20일 서울 청운동에서 종로 결찰서장 최규식 서장이 김신조 일당을 검문하다가 현장에서 순직 당했다. 김신조 일당 31명 중 29명은 사살되고, 김신조는 생포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에 성공하였는데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공비는 우리나라 부 국방부장관에 해당되는 인민군 무력부 부부장 위치까지 승진하였고, 생포된 김신조는 지금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성락교회 목사로 시무 중에 있다.
1월 17일 침투한 김신조 일당은 산에 숨어 있다가 나무하러간 형제에게 발각되자 침투한 공비들이 형제를 죽이자, 가난한 사람이니 포섭하자는 논쟁 끝에 형제에게 멀지 않아서 통일이 된다. 통일이 되면 남한에서 제일 잘 살도록 해 줄 터이니 신고하지 말라고 하고 형제를 돌려보냈다. 집에 온 형제는 2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공비의 출현을 신고하게 되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비상 상태에서 서울 청운동에 종로 경찰서장이 직접 나가 검문을 지휘하다가 현장에서 순직한 것이다. 만일 나무꾼 형제가 신고를 하지 않아서 김신조 일당을 잡지 못했다면 이들은 헌병도 건드리지 못하는 특수부대 복장에 고급장교 계급장을 달고 당당하게 대로로 서울 청운동까지 와서 청와대에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으로 침투하였을 것이다. 공비의 침투가 성공했다면 대한민국은 큰 혼란이 발생했을 것이다. 공비 출현을 신고한 형제의 공로가 큰데 당시는 간첩신고 포상금제도가 없어서 형제를 취직시켜 형은 인천시청 정문 경비로 동생은 경찰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모두 정년퇴직 하였다.
5. 연평 해전을 통해 남북한 해군의 전력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북한이 NLL을 무시하려고 계속 도발하면서, 남한 해군이 북한 전투함에서 공격하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북한 해군 함정이 NLL을 침범하고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 방송을 해도 이를 무시하고 침범함으로 우리 해군이 북한 해군 함정을 NLL선 밖으로 밀어내려고 북한 함정 뒤를 밀치니까 북한 함정에서 공격함으로 아군 함정에서 응사한 결과 1999년 6월 15일 1차 해전이 일어났는데, 이 때 북한 함정 2척이 침몰되고, 3척이 대파되고 수십 명의 전사로 큰 피해를 보고 북한 해군이 완패하였던 것이다. 아군은 함정 2척이 약간 손상되고, 장병 11명이 부상당하였을 뿐 전사자는 없었다.
북한이 보복을 벼루고 있다가 3년 뒤인 2002년 6월 29일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고, 터키와 우리나라가 준결승전을 하는 날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 2차 연평해전을 계획적으로 일으켰는데 북한 해군이 작심하고 NLL을 침범했고, 아군의 해군 함정에 정 조준하여 기습 공격을 함으로 남측 고속정 1척이 침몰되고,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보았다. 기습 공격을 당해서 피해를 보았을 뿐 남북한 해군이 정식 전투를 하면 해군에 관한 한 북한 해군이 남한 해군을 감당해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남한 해군의 함정 무기는 자동으로 스위치만 누르면 전 자동으로 발사되는데 북한은 수동식으로 발사를 하므로 우리 해군이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전투함이 한국은 120여척, 북한은 420여척, 잠수함은 한국이 10여척, 북한이 70여척, 병력은 한국이 6만 8천여 명, 북한이 6만여 명으로 병력을 제외하고 무기 숫자로는 북한이 많으나, 무기 성능 면에서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은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3차 해전이 있을 경우, 한국 해군의 전투수칙이 과거와 다르기 때문에 북한은 전투함으로 대결하기 보다는 해안포로 공격을 해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앞으로 북한이 휴전선에서 6·25 전쟁과 같은 공격을 다시 해 올 것인가는 의문이지만 휴전선 부근에 설치한 장거리포로 서울을 향해 발포로 부분적인 공격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전면전은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라고 본다. 6·25 전쟁 때에는 남한에 탱크가 1대도 없었고, 북한은 240여 대의 탱크로 공격해 왔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국군이 있기 때문에, 전면전을 일으켜서 기회만 있으면 무력으로 통일할 생각은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북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전면전을 시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라고 본다.
무기 면에서 보면, 한국은 전차가 2,300여 대, 북한은 3,900여 대, 한국은 육군 병력이 60만 명, 북한은 육군 병력이 120만 명과 다수의 특수부대원이 있다. 전투기는 한국이 490대, 북한이 840대이며, 헬기는 한국이 680대, 북한이 310대이며, 예비 병력은 한국이 304만여 명이고, 북한이 770만여 명이다.
III. 통일은 시대정신으로
세계 2차 대전 후 분단된 국가는 오스트리아, 독일, 베트남, 예멘, 한국 중에서 한국을 제외한 4개국은 평화적이든 무력에 의하든 간에 통일이 되었다. 통일의 방법이 4나라가 각각 다르다. 4나라의 통일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우리나라도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할지를 생각해 보고, 먼저 통일한 나라들의 통일이 우리가 바라는 방향의 통일이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모델에 의해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는 동서로 분단되어 동쪽은 소련이, 서쪽은 미, 영, 불이 관리를 해 오다가 분단된 지 10년 후인 1955년에 양 진영의 지도자들의 합의로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었고,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어 서독은 미, 영, 불이, 동독은 소련의 관리 하에 있다가 동독이 서독의 TV 시청 허용과 왕래를 허용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이 서독에 흡수합병이 되었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 관리 하에 있다가 월맹이 무력으로 월남을 통일하였고, 예멘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예멘은 영국이, 남예멘은 소련이 지배하다가 남·북 예멘의 합의로 1990년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통일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근거하여 1994년 남북예멘이 통일국회 형성을 위해 총선거를 실시한 결과, 영국 지배하에 있던 북예멘 체제 지지 국회의원이 남예멘 체제 지지 국회의원보다 더 많이 당선되자,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던 남예멘에서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통일협정을 파기함에 따라 북예멘이 1994년에 무력으로 전쟁을 통해 남예멘을 흡수하여 남북예멘을 통일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나라의 통일의 방식은 각각 달랐다. 바라기는 오스트리아나 독일 모델로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한다고 또 다시 6·25 전쟁과 같은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현실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북한의 현실적 상황으로 보아,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예멘의 통일방식이 전개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여튼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이 60년 이상 다른 이념으로, 다른 경제정책으로 북은 김일성 가족 일가의 독재 정부의 폐쇄정책으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개발을 해온 결과 지금은 남북한 간의 경제력의 격차가 일반적으로는 30배로 보고 있으나, 실제로는 50배로 벌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한과 북한 두 체제 중 어느 체제로 통일이 되어야 남북한 국민 모두 통일하기 전보다 통일 후에 더 잘 살고 더 인권이 보장되고 더 자유가 보장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통일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있던 자유가 없어지고 인권이 탄압받고 잘 살던 우리가 지금의 북한 국민과 같이 굶주림과 억압 속에 살게 된다면 그런 통일은 우리 국민 모두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앞으로 북한과 같은 체제로 통일이 된다면, 지금의 북한과 똑같이 인권이 억압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못살게 될 것도 자명할 것이다.
IV. 남북한 체제 비교
북한체제로 통일이 되면 남북한 주민 모두가 못살게 되므로 잘사는 남한체제로 통일이 되어야 남북한 주민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북한 체제는 왜 못살게 되었고, 또 남한 체제는 어떻게 해서 잘 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북한이 못사는 이유
(1)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하면 왜 못살게 되는가?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재산의 공유화로 빈부의 차를 없애려는 사상이다. 그래서 생산수단을 공유화하고 국가에서 관리하여 평등사회를 이루려는 양적 평등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결과는 빈부차를 없애고 모두가 잘 사는 평등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못 사는 평등사회가 된 것을 그간의 역사가 증언해 주고 있다. 빈부 격차 없이 모두가 잘 사는 평등사회를 이루려는 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이지만,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를 과감하게 개혁하지 않고 그 모순된 체제를 계속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후진된 나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본래 평등사회에서 살았다. 인류가 공동체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일만년 이전의 구석기 시대는 평등사회였다. 사냥해서 잡은 고기를 내것, 네것 없이 같이 나누어 먹었다. 구석기 시대의 떠돌이 생활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강가에 모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열심히 일하고 지혜와 능력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생산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들 사이에 소유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소유의 차이에 따라 불평등사회가 되어 왔다. 소유가 많은 사람은 소유가 부족한 사람에게 자신의 곡식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노예로 삼는 일도 발생하였다. 소유의 불평등에서 소유의 평등사회를 시도하는 공산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는 그 순간은 일시적으로 평등사회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인 평등사회는 이룩할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는 분배를 우선시 하였고, 자본주의는 성장을 우선시 하였다.
비근한 예로, A와 B 두 집에서 각각 닭 50마리씩을 기르는 데 닭 50마리가 하루에 계란 30개씩을 낳는다고 가정해서 A집은 계란 30개로 식구의 배를 채우는 것이 모자라서 하루에 닭 1마리씩을 잡아먹었다. 50일이 지나니 닭은 다 잡아먹고 계란 30개도 낳는 닭이 없게 되었다. B집은 계란 30개를 다 먹어도 배가 고프지만, 20개만 먹고 10개의 계란을 부화시켜 50일 후에 550마리의 닭이 생겨 부자가 되었다. 분배를 우선한 A집은 망하고, 성장을 우선한 B집은 잘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분배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는 망했고, 성장을 우선시하여 효율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질적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경쟁사회가 더 발전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질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질적 평등이란 일한 만큼 임금을 받는 사회를 말한다. 10개 만든 사람은 10개의 임금을, 5개 만든 사람은 5개의 임금을 2개 만든 사람은 2개의 임금을 받는다. 그러니 여러 개 더 만들려고 열심히 일을 하므로, 생산성이 올라가고, 생산성이 올라가니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5개의 임금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면, 10개 받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2개 만든 사람은 가난해 진다. 경쟁사회에서는 이긴 자와 진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정부가 하는 일은 빈부격차의 해소를 위해, 부자에게는 적절한 과세를 하고, 가난한 사람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끌어 올리는 정책을 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복지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데, 세금제도에 누진제도를 도입하여 10개 받은 사람은 20%를, 5개 받은 사람은 10%를, 2개 받은 사람은 세금을 내지 않아 가난한 사람을 끌어올리는 복지정책을 펴나간다. 그러나 지나치게 복지정책을 강조한 나라는 복지정책의 재원마련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걷어 나라에 따라 소득의 50%, 60%를 징수하여 실업자에게 더 많은 실업수당을 주고 있다. 그 결과 일하는 사람과 실업자 간의 소득의 격차가 별로 나지 않게 되자 일 안하고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노동자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 안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생산성이 떨어지므로 생산성 유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소득세를 줄이고 실업수당도 줄여 일하는 근로자가 유리하도록 정책변화를 하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이긴 자와 진 자,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복지제도가 발달되었다. 자본주의는 개방사회에서 경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경쟁력이 있는 기업만 살아남고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자연히 도태됨으로써 경쟁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못사는 것은 경쟁이 없는 양적 평등정책을 고집해서 못살고 있는 것이다. 양적평등이란 경쟁이 없는 사회를 말한다. 10개 만든 사람이나 5개, 2개 만든 사람이나 똑같은 임금을 주니,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 생산성이 떨어지고, 그러니까 경쟁력이 없고 경제가 발전하지 못해서 가난한 나라가 되고 있는 것이다.
(2) 획기적인 개혁 개방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김정일 간의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남한이 개성공단을 개혁 개방의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항의를 하여 노무현 씨는 돌아와서 통일부는 홈페이지 개성공단 코너에서 개혁 개방이라는 용어를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개혁개방이다. 그러나 개혁개방하지 않고 발전한 나라는 지구상에 어디에도 없다. 개혁개방을 거부하여 못사는 나라의 예로 미얀마와 북한이 대표적일 예가 될 것이다. 개혁개방은 경쟁을 유도하고, 경쟁은 생산성을 높이고, 경쟁력이 있어서 기업이 살고 국가가 부강해 지게 되는 것이다.
개혁개방정책으로 잘 살게 된 나라의 예로
㉠ 19세기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서 개방을 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선진문명 국가가 되었다. 일본이 19세기에 개방정책을 쓸 때 우리는 대원군이 쇄국정책, 다른 말로 폐쇄정책을 써서 외국의 문물을 차단하여 못사는 나라가 되었다.
㉡ 1990년대 초에 공산주의 체제의 동구권이 붕괴되고, 13억 인구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도 공산체제를 넘어 등소평이 개방정책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내용의 흑묘백묘론(黑描白描論)의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실용주의(實用主義) 정신을 추구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1975년 공산화된 베트남도 "도이모이"라는 개혁개방 경제정책을 통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이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로 선진화하려는 실용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체제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폐쇄정책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못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다녀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평양을 제외하고 지방도시와 농촌은 한국의 1960년대 말 내지 1970년 초의 보릿고개 시절의 모습이라고 한다.
북한도 개혁개방정책을 쓰면 잘 살 수 있을 것인데 왜 획기적인 개혁개방정책을 못 쓰고 있는가?
개혁개방정책을 쓰면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국민의 생활수준이 올라갈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왜 개혁개방정책을 못 쓰는가? 개혁개방정책을 쓰면 체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주민은 굶어 죽든지 말든지 폐쇄정책을 써야 공산당의 기득권세력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백성은 굶주리고 헐벗고 못 살아도, 공산당원은 당당하게 잘 살고, 보위부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잘 살고, 안전원은 안전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북한체제의 오늘날의 현실이다.
북한정권은 동서독이 통일된 과정을 직시하고 있다. 동독이 서독의 TV 시청을 허용하고 동서독 간의 왕래를 허용하여 개방하였더니, 얼마 안가서 동독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개방정책을 못 쓰고 있으며, 그래서 결국 주민이 못 사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지나친 군비증강 정책 때문이다.
북한은 선군정치로 강성대국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은 총대의식이 강하다. 이것은 총대에서 힘이 나온다는 의식이다. 총대를 통해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은 굶주리고 있는데 주민을 먹여 살릴 돈을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핵 보유만이 북한의 독재체제 유지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CIBM)을 무수히 가졌던 소련이 무너져 내린 사실을 북한은 간과하고 있다.
북한은 전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상비군 120만 명 이상을 유지하고, 2,400만 명의 인구 중 12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려니까 공부할 남자 청년을 10년, 기술병 13년씩 군대에 묵어 놓고 있고, 모든 산업은 소비재 생산을 등한시 한 채, 무기제조 공장 건설에만 치중하고 있다. 군수물자는 소비재가 아니다. 또한 생산된 무기는 30년 40년이 지나면 고철이 된다. 투자된 자본이 회전되지 못하고 고철화 되니 나라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동토의 나라, 못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한국은 소비재를 생산해서 수출을 함으로서 그 가득액으로 잘 살게 되었지만, 북한은 소비재 생산은 거의 하지 않고 무기 생산에만 치중하고, 지나치게 많은 상비군 보유로 인한 지나친 군비 지출로 못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4)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니, 내 집, 내 땅, 내 재산이 없다. 부지런히 일해도 내 것이 없으니, 부지런히 일할 생각이 안 난다. 의욕이 상실 된다. 사람은 본래 내 것은 소중히 여기고 남의 것, 공동의 것은 소홀히 여기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동작업장의 곡식은 시들시들하고 사유지인 내집 앞 텃밭의 곡식은 탐스럽게 자라기 마련이다. 사유재산이 없으니 열심히 일을 안 하고, 열심히 일을 안 하니 생산성이 떨어지고, 따라서 북한 은 경쟁력이 떨어져 못 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5) 자급자족 정책 때문이다.
김일성 주체사상 연구소가 45만 곳이나 있는데, 이곳은 자급자족 갱생제도를 연구하는 기관이다. 근본적으로 북한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전제로 전쟁체제에서 유리한 자급자족정책을 일관해 오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자급자족을 하리만큼 농경지 여건이 남한보다 부족하고 기술과 자본의 부족으로 있는 지하자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다. 남한은 북한보다 지하자원이 훨씬 부족하지만, 남한은 없는 자원을 수입해서 원재료를 가공하여 수출을 함으로써 하역비, 운반비, 보관료, 가공임금 등 가득액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킬 수 있었다. 북한은 자급자족 정책으로 수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한은 수출로 국가경제가 발전하는데, 북한은 수출을 하지 못하고 자급자족 정책을 계속 고집하면서 우리식 사회주의만 주장하고 있으니,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6) 독재정치 체제 때문이다.
한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61년 동안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0명의 대통령을 배출하였지만, 북한은 61년 동안, 김일성이 1945년부터 49년, 그 아들 김정일이 15년 동안 두 부자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지도자가 국운을 좌우하기도 한다. 선장을 잘못 세우면 배가 좌초되기도 한다. 국가지도자는 국가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좋은 실예이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미얀마와 북한의 지도자가 독재정치를 하였다는 면에서 볼 때는 비슷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를 하면서도 국가를 근대화하고 국민이 잘 살게 하였지만, 미얀마와 북한의 독재는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국가를 낙후되게 하면서 정권유지를 위해 독재를 한 것에 차이가 있다.
독재정치를 하면 왜 못 사는가?
한국은 10명의 대통령이 바뀌면서 직전 대통령의 성공한 정책은 계승을 하지만 잘못된 정책은 비판하고 새로운 정책으로 바꿈으로서 발전해 왔다.
북한처럼 1인 독재는 정책의 시행착오로 정책이 실패를 하여도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비판도 못하고, 정책의 잘못된 점을 합리화 해 간다. 잘못된 정책이 지속되므로 발전할 수 없고 따라서 못 살게 되기 마련이다.
한국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민주사회, 정보통신사회를 넘어 선진 사회로 가고 있는데 북한은 정부수립 후 61년 동안 공산혁명사상을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로 변질시켜 고집함으로서 아직도 무기만을 만들고, 핵 개발 이외에는 경제가 농업사회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못살고 있는 것이다.
(7) 국가지도자의 우상화 정책 때문이다.
국가의 지도자는 그 나라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지 결코 통치자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을 숭배의 대상으로 우상화해서 못 살고 있는 것이다.
㉠ 북한 주민은 어린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전 주민이 김일성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다니고 있다.
㉡ 유명한 관광지의 큰 바위나 절벽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그 직계 가족을 찬양하는 선전문구들이 굵은 대형 글씨로 붉게 칠해져 있다.
㉢ 김일성 생일 4월 15일(태양절)과, 김정일 생일 2월 16일은 국경일로 되어 있다. 국가 지도자의 생일을 국경일로 기념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북한뿐이다.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날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묘향산에 ‘국제교류전람관’이라는 명칭의 건물을 만들어 놓고 전시하고 있는데, 그 건물의 건축비와 운영비가 엄청날 것으로 추정된다.
㉣ 김일성과 김정일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 기념물들이 북한 전 지역에 세워져 있고, 크고 작은 김일성 동상이 3만 여 개나 된다고 하며, 북한의 시(市)마다 대형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못사는 나라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비롯하여 소위 공산혁명 열사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상징 기념물들을 건립하는 데 막대한 재정을 우선적으로 지출하므로 못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1994년에 사망한 김일성 주석궁이던 금수산 기념궁전을 리모델링하고 김일성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시설비에 수천억 원을 썼다고 하니, 북한 주민이 어떻게 잘 살 수 있겠는가?
(8) 인간의 기본권적 자유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공기와도 같다. 모든 만물이 물이 부족하면 시들어 죽듯이, 인간에게 자유가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이 영국의 식민 지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 칠 때,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는 쓸 자유, 말할 자유, 모일 집회의 자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할 자유, 살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살 거주 이전의 자유, 믿고 싶은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 정부가 잘못하면 국가의 주인으로서의 국민이 정부에 대해 잘못된 것을 고치라고 말할 수 있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국민 저항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야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감시에 감시, 고발에 고발의 분위기가 겹겹이 둘러싸여 북한체제에 배치되는 자유를 행사했을 때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일일 생활 총화, 주 생활 총화, 월 생활 총화라는 자기비판을 북한체제에 맞도록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숨 막히는 사회가 되었으니, 북한이 어떻게 잘 살 수가 있단 말인가?
V. 남한이 잘 살게 된 이유
(1)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는 단점도 있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하의 경제보다 훨씬 발전적이다. 특히 자유주의 하의 시장경제 체제란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 하에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체제로써, 획일적인 통제경제 체제보다 훨씬 발전적이고 경쟁력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여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식 집단농장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북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국내경쟁과 더불어 국제적인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개방은 경쟁이고, 경쟁은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이다. 한국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기업이 망하고, 수십 개의 기업이 창업하고 있다. 창업해서 경쟁력이 있는 기업은 살아남는 것이고, 경쟁력이 업는 기업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북한은 폐쇄 체제이다. 개방 없는 폐쇄 체제는 경쟁력이 생성될 수 없다. 생산시설이 모두 국가 소유이고, 국가에서 관리하여 계획에 의해 생산하고, 계획에 의해 분배한다. 타자와 별도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경쟁이 없으니 개선과 창조가 없다. 경쟁력 있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니 결국 그런 기업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개방사회로서 부단한 무한 경쟁체제를 도입하여 세계 시장경제에 적합한 물건을 새롭게 만들어 계속 수출하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성공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 2) 민주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을 통해 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였다. 4.19혁명 후 자유를 오용하는 세력들에 의해 사회혼란이 야기되었다. 민주당 정권이 4.19혁명 후 혼란한 정국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무능과 비효율적인 정책의 집행으로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는 가운데, 박정희 소장이 대두하여 18년간 군대식 독재정치를 했다. 그러나 1979년 궁정동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쓰러짐으로써, 공화당 정권은 몰락했다. 하지만 그의 군사정권 색채의 통치는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0년간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민중항쟁 중 1987년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10평화 대행진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중도에 북한군이 개입하여 악화시켰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대두함에 따라 후세에 역사가들에 의해 공정하게 재평가 받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혼란과 무질서, 부작용도 많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국가 중에서 한국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세계인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3) 산업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4.19혁명 후 혼란기에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소신 있는 지도자가 등장함으로써, 낙후된 농업국가를 근대적 산업국가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10명의 대통령 중, 경제를 발전시킨 면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경제의 토대를 구축한 경제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 체제로 인해 때로는 민주인사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낙후된 한국경제를 근대적 산업경제로 도약시킬 기반을 조성한 경제대통령으로서의 공로를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여튼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를 하여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인들을 잘살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반면에 북한은 김일성의 등장으로 못사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의 지도자는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장을 잘못 선택하면 배가 좌초되어, 배가 파산하고 배에 탄 사람들은 큰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4) 새마을 운동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부터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새마을 운동을 성공시켜 낙후된 농업국가를 근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실시하던 새마을 운동의 경험을 많은 나라에서 전수해 갔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룩한 성과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 정신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 지도자의 의지와 지도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새마을 운동은 시대환경에 맞게 봉사와 창조의 정신을 추가해서 더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수출제일주의 정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는 나라이다. 자원이 없으니 없는 자원으로 잘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없는 자원을 수입해서 가공한 후, 다시 수출을 하여 가득액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수출업체에, 근로자를 많이 쓰는 노동집약형 공장에,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기업체에 우선적으로 대출을 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내수용 공장에도 수출을 의무화하였다.
그 결과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 11년이 지난 1964년에 1억 달러를 수출하고, 수출 1억 달러 달성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했다. 그 후 44년이 지난 2008년도에는 4,000억 달러를 수출하여 44년 만에 4,000배로 수출이 증가하였다. 2009년에도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도 수출 면에서 세계 10위권에 도달할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과거에 그러했듯이, 미래에도 수출 없이는 경제성장을 할 수 없는 경제체제이다. 대외 의존도가 70%나 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부존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수출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나라이다. 수출로 우리는 경제력 규모에서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다. 결국 수출정책의 성공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한 것이다.
(6)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세계인의 눈에 한국은 기적의 나라로 비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 국토의 80%가 파괴되고 1인당 GNP 67달러에서 이제 1인당 GNP 2만여 달러로 성장했다. 경제력 규모가 세계에서 12~13위로 성장하였고, OECD에 가입하였으며, 중국 보다 20년 앞선 1988년도에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2002년도에 월드컵을 개최하였고, UN의 원조를 받던 나라가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6.25전쟁 때 UN군 파병을 요청하였던 나라에서, 월남,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동티모르 및 시리아 등의 국가에 해외 파병을 하는 나라가 되었고, UN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가 되었다. 어떻게 50여 년 동안에 위와 같은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나라가 되었는가의 대하여 중국의 인민대(人民大) 마상우 교수는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가 오늘의 한국의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을 한 바 있다.
30년 간의 군사식 통치는 많은 부작용과 비민주적 행태를 들어내기도 했지만, 정쟁(政爭)을 지양하고 능률과 생산적 풍토를 중시하여 효율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성격이 급한데다가 신속히 처리하는 군사문화의 생산적 풍토가 가세함에 따라 고속도로와 각종 중화학 공업시설 등을 빠르게 건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선진국에서 400년 걸려 이룩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의 모델을 배워 50여 년 만에 자원도 없고 산업인프라가 전무한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IT강국으로 자동차, 선박, 전자제품 강국이 되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잘 사는 나라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7) 개방을 통해 세계화 국가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업이 전 세계 진출하지 않는 나라가 별로 없을 정도다. 한국은 세계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노력했고, 세계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많은 한국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다. 그래서 오늘날 삼성, LG, 현대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생기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만일 남한이 북한처럼 우리식 사회주의와 수령중심의 주체사상이라는 편협한 민족주의 정책에 몰두했더라면, 한국은 세계화의 국가로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방사회의 세계화 국가로서의 실증적 지표는 1960년대 80%의 농업인구가 현재 10% 미만으로 떨어진 것을 보면, 극명하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세계 유일하게 1960대식 집단농장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오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북한이 세계화로부터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 국가인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대해 지금도 남한 내의 농민들과 많은 민간단체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지만, 남한이 반대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간 세계무역협정(WTO) 등 각종 세계경제기구에 가입하여 활동함으로써,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여 결국 한국이 세계국가로 우뚝 서 잘 살게 된 것이다.
(8) 교육을 통한 자기성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는 만사라는 말이 있다. 어떤 지도자가 대통령을 하느냐, 어떤 사람이 시장을 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와 그 시(市)의 분위기가 달라지듯이 그 나라에 어떤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 얼마나 있느냐는 그 나라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 한국의 유학생들은 전 세계에 진출해 있으며, 그들이 귀국하여 첨단 기술을 창안해 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간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좌파적 성향의 평등주의를 10여 년간 강조해 오기도 했지만, 그러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 교육은 전체적으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아무리 간난한 사람도 신분과 관계없이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공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판사도 검사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길이 터 있는 것이 남한 사회다. 예컨대, 노무현 씨도 상고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도 했고, 대통령도 했다.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은 가난하기 비길 데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뻥튀기 장사와 환경미화원 등을 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고대 상대를 나와 현재 대통령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확대가 국가다. 똑똑한 사람이 많으면 그 국가는 바르게 합리적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교육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다. 첨단연구 인력이 많아 세계적인 첨단기술을 많이 개발할 수 있다면, 그만큼 세계적인 풍요로운 국가 건설에 원동력이 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삼성, LG 등 한국의 대기업들의 첨단기술 개발 성공이 한국인들을 얼마나 잘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8.15해방과 6.25전쟁 후 북한의 많은 인재들이 월남하여 북한으로서는 많은 인적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북한에서는 수령제일주의, 주체사상, 우리식 사회주의 교육에 몰입하는 편향성에 빠져 있다. 정상적인 합리적 교육을 통한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초점을 두기보다 공산혁명 건설에 얼마나 공로가 있는가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어 충성과 성분이 출세의 관건이 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유학생들을 해외에 보내 외국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기 인색하고 있으며, 외국에 유학 간 유학생들이 자본주의 사상의 물이 들지 않을까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니, 북한이 어찌 잘 살 수가 있겠는가?
IV. 마치는 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선진 G7 국가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192개국 중에서 그래도 세계에서 앞서가는 나라라고 하는 국가들은 대부부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사의 흐름이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추세다. 오늘날 세계적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데 원인을 제공한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 국가들 일부에서는 시장경제 체제를 통제경제 체제로 바꾸고, 심지어 보호무역주의 체제로 가야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라는 큰 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세계 대부분 선진 국가들의 추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냉전체제 하의 소련은 공산주의로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생산시설을 국유화하고 사회가 관리하는 계획경제를 통한 소유의 평등화가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을 중심으로 한 많은 동구권 공산국가들은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고 동조세력의 확장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정책을 펴 왔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 소련은 전쟁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변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공산주의를 고집함으로써 점점 세계 경쟁에서 낙후되어 못살게 됨으로써, 이념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우리들은 공산권에서 정치·경제적 낙후성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그런 변화의 사고를 과감하게 주도한 대표적인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ov)의 개혁·개방이라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그라스 노스트(Glas-nost) 정책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장경제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도,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도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도, 정치적 규제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도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 제도가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가 지향해 온 세계사의 흐름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통제와 구속을 싫어한다. 그 통제와 구속은 인간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발전을 저해한다. 그래서 인간은 될 수 있는 대로 통제와 구속을 벗어나 정치나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자연법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남의 지배와 독재를 배격하고 자유스럽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무한정 자유를 허용하면 악의 세력들이 그 자유를 악용하여 자기 욕망만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를 규제하고 통제해야 공동체 모두가 잘 살수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허용으로 부작용이 있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여 운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이라는 것이 반세기 이상의 미·소 냉전시대의 체제 경쟁을 통해서 세계인들은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값비싼 대가를 통해서 인류가 체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고귀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북한과 같은 낙후된 나라의 체제로 통일이 될 경우, 뜻하지 않게 결국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서 후진국가로 전락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통일 후 남북한 국민이 모두 잘 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입증해 주고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체제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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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