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는 일에 늦은 나이는 없다. 요즈음 스스로에게 자주 들려주는 글귀입니다.
오늘은 정기산행이 있는 날 특히 새해 첫 등반입니다. 여러 개의 Backpack을 꺼내 놓고 만지작 거리다 결국 선택한 것은 18리터의 아주 소형이었습니다. 공지사항에 올라온 댓글을 보니 첫 등반에 참여하는 악우들이 작은 숫자였습니다. 갈수록 참여율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대부분 독감이나 목감기 영향으로 쉬겠다는 댓글이 태반이고 가족들 사이에 약속된 행사로 인하여 참가할 수 없다는 변을 읽은 후 참가한다는 후배와 통화 후 의견일치를 본 것이 종주산행이었습니다. 광나루에서 출발한 후 아차산을 오르고 이어서 용마산을 넘고 마지막으로 시름을 내려놓는다는 망우산자락을 건너뛰어 동구릉까지의 종주산행은 사대문 안의 도심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의 정경을 살피고 외사산의 전경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아차, 용마, 망우산 주능입니다. 우측으로는 한강을 끼고 좌측으로는 도심 전경을 살피며 걷는 길이 바로 아차, 용마 망우 종주 길입니다. 길은 대체로 온순한 편입니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긴 깔딱 고개가 있지만 반대로 치고 오르는 길에는 대체로 유순합니다. 옛 고구려시대 사방을 정탐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보루를 세우고 고구려군의 머물던 곳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도 이곳 산의 지세를 가눔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침은 쌀쌀하였지만 정오로 다가갈수록 봄과 같은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늘 참석하는 악우들이 보이지 않아 최종적으로 전화를 걸어 참가여부를 확인한 후 09시 50분경 출발하였습니다. 산이 지니고 있는 산세 덕분에 장안에 수많은 산객들이 즐겨 찾는 산이라 그런지 상당수의 동호인들이 모여 함께 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린 우회 산길을 이용하여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기 시작하여 암굴이 있는 절을 돌아 일출전망이 아름다운 산비탈 너럭바위에 앉았습니다. 출발부터 산행 후 하산하여 점심을 챙길 계획을 세운 터라 간단한 요깃거리와 반주용 안주용을 겸한 도시락을 내려놓고 산신제를 지내듯 흩뿌리며 소한절기에 봄맞이하듯 30여분 머물렀습니다. 보온쟈겟을 벗어도 햇살이 얼마나 따듯한지 기분 좋은 컨디션을 경험하였습니다. 바위틈 사이로 자란 소나무 작은 어린 목 전형적인 우리나라 소나무 모습을 연출하고 있어 내심 반가워 탐이 났습니다. 생각으로는 번쩍 들어다 산막 모퉁이에 심어 놓고 마음 심지로 삼고 싶다고 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눈으로 보고 그 잔상은 마음에 두고 귀히 여기면 되는 것이 자연에게 받는 아름다움입니다. 곁에 두며 애정을 갖는 것 아주 소중한 일이지만 그리움이란 정념 하나만으로도 그 이상의 인정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후자의 마음을 종유석처럼 마음에 심기로 하고 오른손 바닥을 펴고 쓰다듬고 너럭바위를 떠났습니다.
일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북사면을 오를 때 스틱을 시용하여 균형을 잡고 힘을 안배해 가며 오르니 오름길이 한결 쉬웠습니다. 다시 능선에 오르니 사방의 정경들이 호쾌하게 다가왔습니다.
능선에 올라 시선이 정지되는 곳은 바로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 수락산, 천마산, 백봉, 운길산, 예봉산, 예빈산, 검단사, 용마산, 남한산성, 검단산, 수리산, 청계산, 관악산, 남산, 인왕산 자락이었습니다. 북한산에서는 문수봉, 보현봉, 노적봉,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을 찾게 되고 도봉산에서는 우이령을 비롯하여 오봉, 우이암, 주봉, 신선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사패산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건너 옆자리 불암산과 수락산을 보며 선 그 사이를 흐르는 중랑천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마들평야를 찾았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평야의 우측에 서 있던 봉화산은 앉은뱅이가 되어 빌딩과 아파트 등 문명의 숲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여백이 사라진 도시정경은 숨을 막히게 합니다. 이 사진 하나만으로도 서울의 인구밀도를 가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명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처지지만 인구밀는 자연을 기형적으로 만듭니다. 문명의 욕심은 늘 자연과 상반되지요. 자연의 속성은 있는 그대로의 본모습을 선호하는 반면 문명은 자연을 딛고 무엇인가 설치해야 직성이 풀리지요. 그것을 우린 발전이라 말하며 정당화시키지만 결국에는 독이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석산으로 무제한 개발되던 돌산 용마산은 자연의 소중함을 깼다고 개발로 헝클어진 부분은 자연복원이란 미명아래 자연공원으로 다시 재개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궁여지책입니다. 아차산과 망우산 사이에 놓여 있는 용마산은 가장 높은 산이며 암석 위에 조성된 산입니다. 높으면 전망은 살아 있기 마련입니다. 용마산의 조망권은 한강이북의 동남권역에서는 가장 호쾌한 곳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산마루도 그와 같습니다. 서울의 인구밀도를 가늠하며 0.6km가량 이어지는 깔딱 고개를 내려섰습니다. 구리에서 면목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바로 망우산이 시작됩니다. 망우(忘憂)라는 이름은 조선건국과 관련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태조는 현재 구리에 있는 동구릉 자리를 무학대사와 함께 답사 후 능지(陵地)로 선정하고 그곳에 묻히게 됩니다. 건원릉이 바로 이성계의 능침(陵寢)입니다. 답사 후 궁궐로 돌아가면서 현재 망우리고개에서 잠시 쉬어가며 이성계는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다고 전해 옵니다. 이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사람들은 망우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은 1912-1932 일제식민지시대에 경성 동서남북방향으로 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수철리에 부립공동묘지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동묘지 터가 부족하자 1933년 망우리 일대 임야 75만 평을 매입하여 이 중 52만 평을 묘역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이태원부근에 있던 공동묘지를 해체하면서 이곳으로 이장하고 망우리 공동묘지가 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6.25 전쟁 중에 서울에서 사망하여 서울 지역 곳곳에 묻혀있던 시신을 발굴하여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정객, 문인, 시인, 가수등 예술인들이 묻혔으며 특히 한글학자로서 유명했던 지석영, 박승빈, 이탁 선생이 잠든 곳이기도 합니다.
2021년 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상의 묘를 찾던 묘지에서 시민들이 운동과 산책, 여가를 즐기는 힐링의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가 조성되면서 근현대인문학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또한 2022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로운 출발 전시·교육·홍보의 중추역할을 할 중랑망우공간이 2022. 4.1일 개관하여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롭게 발돋움하게 됩니다.
중랑망우공간에 내려서자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이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커피 향으로 여독을 풀까 하다 물러섰습니다. 우선 점심 겸 저녁으로 치부할 한 끼의 식사가 더 소중했습니다. 때를 놓치면 시장끼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잰걸음으로 오버브리지를 넘어섰습니다, 중랑 숲 공원 사이로 얼핏 보이는 삼각산 중앙 백운대 언저리에 어두움이 내리는듯하였습니다. 손목을 덮고 있는 소매를 밀어 시계에 들어 있는 걸음숫자를 체크하자 18,500보가 떴습니다. 동구릉 자락까지 옮기려던 욕심을 내려놓고 식당을 찾아들었습니다. 반갑게 맞이해 주는 식당사장 안식구, 늘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참 다정합니다. 주문을 챙겨 뒤돌아가더니 곧바로 맥주와 소주 한 병씩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안주를 내려놓고 맥주는 병따개로 열어 놓고 맛있게 드시고 계시면 바로 준비해 올리겠다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언제나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이 정렬합니다. 그 점이 우리를 편하게 하여 이 부근에 오면 늘 찾습니다. 후배와 덕담을 나누며 첫 잔을 기울이자 목마름이 순시 간에 사라졌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하게 반주와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지하철을 이용하여 익숙한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오르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겨울풍경을 경험하는듯하여 신바람이 생겼습니다. 이런 날 강원도 깊은 산골 국형사를 지나 보문사를 오르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저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보문사 요사채에서 스님의 배려로 하루 머물다 이른 새벽길을 떠나 종일 함박눈을 맞으며 종주 끝에 남대봉에 섰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참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때 추억에서 건져준 것은 후배가 보내온 전화였습니다. 형님! 잘 도착하셨지요? 응~~ 집까지 5분 남았다. 그곳에도 눈이 함박눈이지요? 그럼 그렇고 말고, 오늘은 모든 것이 신나는 날이다. 금년에는 모든 것이 신이 났으면 좋겠다. 수고 많았다. 들어가 편히 쉬어라~~ 네 들어가세요.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순간 파란불로 바뀌었다. 건너 정문으로 들어선 후 우리 집 라인 현관문 유리 앞에 서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구경을 하다 등을 돌리자 1층에 나를 기다리는 엘리베이터~~ 지금 이 순간처럼 기쁜 일도 없습니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 경험할 적마다 격한 감동에 휩싸이게 됩니다. 마~악 도착하여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나의 곁을 떠나 제일 높은 층으로 달아나는 경험은 화딱지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앗불싸가 저절로 튀어니옵니다. 언젠가는 각층마다 아이들이 눌러 놓아 시간이 없는데 울화통을 경험하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발전하여 다시 누르면 취소가 되어 상관없지만 그런 시기도 있었습니다. 좋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그리고 두렵지 않도록 도움을 받는 작은 스크린 속에서 옛적 내가 좋아하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살피자 광고배경 음악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흥얼거리며 듣다 버튼을 눌러 열고 들어서자 반려견 파이가 점프하며 달려듭니다. 이 녀석의 인사는 늘 격합니다. 이런 마중은 인간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절제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성의 유혹에 빠져들어 개를 키우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세신 후 책상머리에 조용히 앉아 조금 전 흥얼거리던 음악 파일을 찾아 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