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수필 쓰기의 재구성
1) 조선시대의 해학
어떤 선비가 양반집 문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 집 종 아들이 엽전을 삼켰다고 난리가 났다. 선비가 하는 말, “아가야, 네 집 주인은 수만 냥을 먹고서도 끔쩍 않는데 한 냥 먹었다고 무슨 일 있겠냐?”라고 했다는 것. 지금 세상이라고 이런 꼬락서니가 없겠는가. 풍자 치고는 격이 있다.
수필의 골계滑稽를 주장한 논의는 193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어 문인들은 펜을 들고 나라를 찾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것. 그리하여 글이나 갈고 다듬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지식인들이 즐겨 쓸 수 있는 장르가 웃음을 소재로 한 해학적 풍자수필이지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38년 창간한 수필 전문잡지 박문博文과 본격적인 문예지 문장文章(1939)·인문평론人文評論(1939)은 작품성과 예술성이 풍부한 수필 창작의 산실이었다.”라고 김진악 씨의 한국수필의 골계이론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양호 씨는 월간 수필과비평의 ‘수필의 전범을 찾아서’에서 한국문단사에서 ‘수필’과 ‘에세이’의 용어 문제는 일찍이 대두되었는데, 1922년 3월 개벽지에서 이광수 씨는 「문학에 뜻을 두는 이에게」에서 수필과 에세이의 용어 문제를 규정한 바 있다고 수필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있다.
수필문학 이론에 관한 모색은 김기림, 김광섭, 임화 등 주로 시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필의 골계를 언급하였다. 그중 시인이요, 수필가였던 김기림은 “향기 높은 유머와 보석과 같이 빛나는 위트며 대리석같이 찬 이성과 아름다운 논리와 문명과 인생에 대해 찌르는 듯하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와 그러한 것들을 짜내는 수필의 독특한 맛이 이 시대 문학의 미지의 처녀지가 아닐까 한다.”라고 1933년 신동아 9월호에 썼다는 것이요, 이 글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과서와 문학개론서에 실려 있어 수필 헌장같이 되어 있다고 말한 이도 있다.
김광섭 또한 수필은 흥미가 있어야 한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수필을 읽는 재미는 글이 담고 있는 유머와 위트(익살)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골계가 없는 수필은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골계적 요소는 수필의 속성은 아니지만 본질과 같이 인식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1960년대 이후 수필문학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골계수필의 영역이 넓어지는 가운데, 고하 최승범 선생님은 수필ABC에서 유머와 위트를 수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1972년 창간되어 수필 문단에 지대한 공적을 세운 수필문학은 1980년 1월호를 유머수필을 특집으로 장식하였고, 박연구 씨는 한국 유머수필 58선 바보들의 천국을 1984년 출간하였다.
골계滑稽는, 어지러울 골, 부드러울 골, 조아릴 계, 헤아릴 계이다. 이것은 한자로서의 사전적 해석이고 국어사전적 해석은 익살이다. 남을 웃기려고 일부러 하는 우스운 말이라고 하였다.
해학諧謔은 익살스러우면서 풍자적인 말이나 짓이요, 유머(humor)는 익살스런 농담과 해학으로 나타나 있다.
풍자諷刺는 ‘무엇에 빗대어 재치 있게 깨우치거나 비판함.’ 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풍자문학은 사회나 인물, 시대의 결함, 과오, 모순 따위를 은근히 빗대어 꼬집음으로써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자로써 깨우치는 말과 글이 있다면 풍자의 웃음, 사나운 웃음, 폭풍의 웃음이 있을 법하다. 그리고 해학은 희롱거릴 학謔으로서 농담 쪽이요, 즐겁게 노는 웃음일 것이다. 풍자소설이 있고 풍자문학이 있다면, 당연히 풍자수필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열정적이거나 격렬한 자도 해학수필보다는 칼럼 성격이 내포된 풍자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은 나와 이웃은 웃지만 당사자인 너는 우는 웃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풍자수필은 ‘풍자+해학’이 될 것이다.
2) 눈물 많은 한국사회에서의 수필
눈물 많은 대한민국이다.
일제강점기, 6·25사변, 4·19혁명, 5·16군사정변, 5·18민주화운동, 삼풍백화점 붕괴, IMF, 세월호 침몰, 촛불정국, 청년일자리사태, 코로나 등 슬픔 많은 이 나라의 현실 앞에서 남을 웃긴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더욱이 글로 웃긴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웃음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최상의 감정문화이다. 동물 중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농담할 처지가 못 되고 익살스러운 짓을 해서 오해 받을 처지라면 곤란하다. 웃음거리가 없으면 골계수필도 풍자·해학수필도 불가능하다. 목석같이 단정한 독자, 엊그제 가족을 잃은 사람과 완전무장한 군인, 매사 사무적인 사장이나 헌법재판관 같은 이를 웃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삶에 윤활유 같은 골계와 해학과 유머도 세상 따라 삶의 문화가 부드러워질 때, 너와 나의 만남에 있어 계산이 앞서지 않을 때, 웃을 수 있고 웃길 수 있는 분위기를 타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의 유머는 어렵다고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사람들은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한국인은 화낼 준비가 된 사람 같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유머와 해학에 능했던 조선시대의 오성과 한음, 백사 이항복과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방랑시인 김삿갓(병연)의 시행 속 패러독스와 해학은 물론 양반을 놀리는 탈춤과 가면극은 마당에서 펼쳐지는 희극적 고발이었다. 「심청전」·「흥부전」·「춘향전」의 판소리는 골계연극이며 웃음의 극치를 이루는 유머이다. 대사 속에 녹아 든 해학적 흥과 사회적 고발정신은 배꼽의 외출을 막고 그 비평에 더욱 귀기울이게 한다.
근대 만담가요, 웃음전도사로서는 장소팔과 고춘자, 구봉서와 배삼룡, 김희갑과 서영춘으로 이어져, ‘못생겨서 미안해요’의 이주일, 그리고 오늘날의 개그콘서트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웃고 살고자 하는 유머정신 유전자는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일부 시인들은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지요’라고 했다. 역사상 많은 외침을 받은 민족으로서 이 얼마나 웃음을 사랑하고 해탈한 경지의 표현인가! 은근히 존경스럽다.
그렇다 하여도 억지로 웃기려 들면 천박해진다. 웃음이 지나치면 품위를 떨어뜨린다. 실없이 웃으면 비웃음이 되고 실답지 않게 웃기면 분수를 모르는 놈이 된다. 오늘날 많은 지성인들은 사대부집 자손이다. 선비정신을 생각하며 살아온 양반집 후예요, 체면을 중시한 사람들이다. 엄숙주의요, 경건주의자요, 관료적이다. 그렇게 팽팽한 분위기의 문단이나 교단에서 지내온 분들에게 서투른 웃음의 글을 썼다가는 꼭지가 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분위기 파악 못한 존재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태껍질 씹는 맛 같은 문장 가운데 익살스런 문장과 단락이 있어 경건성의 무장을 해제하고 무릎을 치고 웃으며 천정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웃음의 힘은 문학의 저력이 되고 붓의 힘이 될 것이다. 그 작가의 역량이 되고 한국인의 삶에 또 다른 문화적 풍류를 탄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김구 선생도 말했다. 한 사람의 즐거운 문화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그래서였는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서 독립된 그 순간이었다. 한 기자가 우리나라에서 지금 제일 시급한 문제와 소중한 힘이 무엇이냐고 김구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문학적 소양과 예술 감각적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문장의 유머라면 독자는 지혜의 샘물과 같은 신선한 느낌에 눈을 비벼가며 웃게 될 것이요,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글이요, 글이 사람이라는 뜻에서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웃음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 수필, 수필과 사람을 연상하여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경직된 내 삶의 환경과 생각에서 훌훌 털고 일어서고 싶다. 높은 산 암자에 기거하면서 실컷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고 헛웃음도 날려보고 싶다. 한 사람의 개체로서 옹색한 처지에서 어렵게 공부함으로써 차렷 자세가 된 경직성을 벗고 싶다. ‘얌전하다’는 그 굴레를 벗어 불태우고 싶다. 잊을 만하면 부상당하듯, 당하고만 살아온 과거에는 삶에도 글에도 웃음이란 언어와 단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수필을 보는 눈을 달리하겠다. 삶의 문화도 정리하고 정제하면서 한국화에서의 여백미를 생각해야 하겠다. 흥부전과 심청전 같은 판소리의 해학적 문화 유전자를 높이 바라보며 수필을 써야겠다. 수필쓰기의 해체에서 다시 쓰기까지의 고민의 길은 멀고도 멀다. 그래도 웃자. 어린 천사로서 아가는 하루에도 400 번이나 웃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른은 하루에 네 번밖에 웃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꼬워 웃고, 메스꺼워서 웃고, 기가 막혀 웃고, 울지 못해 웃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