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신세를 진 화찻간은 이튿날 곧잘 어디론가 없어지곤 했다. 더
러는 하루 저녁에도 몇 번씩 이 화차 저 화차 자리를 옮겨 잡아야 했
다. 자리를 잡고 누우면 그런대로 흐뭇했다. 나이 어린 나와 하원이가
가운데, 두찬이와 광석이가 양 가장자리에 눕곤 했다.
이상한 기척이 나서 밤중에 눈을 떠보면, 우리가 누운 화찻간은 또
화통에 매달려 달리곤 했다.
"야야, 깨 깨, 빨릿……."
자다가 말고 뛰어내려야 했다. 광석이는 번번이 실수를 했다. 화차
가는 쪽으로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뛰곤 했다. 내리고 보면 초량 제4
부두 앞이기도 했고 부산진역 앞이기도 했다. 이 화차 저 화차 기웃거
리며 또 다른 빈 화차를 찾아들어야 했다.
"야하, 이 노릇이라구야 이건 견디겐."
"……"
"에이 망할놈의."
광석이는 누구에라 없이 짜증을 부리곤 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넷은 가지런히 제3부두를 찾
아 나갔다. 가지런히 밥장수 아주머니 앞에 앉아 조반을 사먹었다.
"더 먹어라."
"응."
"더 먹어."
"너 더 먹어."
꽁치 토막일망정 좋은 반찬은 서로 양보들을 했다.
어두운 화찻간 속에서 막걸리 사발이나 받아다 마시면, 넷이 법석대
곤 했다.
우리들 중 가장 어린 하원이는 늘 무언가 풀어헤치듯,
"야하,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 어잉 야야, 벌써 자니 이 새끼, 벌
써 자니. 진짜, 잉. 광석이 아저씨네 움물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 뒤
에 상나무 있잖니? 하얀 양산처럼 되는, 잉. 한번은 이른 새벽이댔는
데 장자골집 형수, 물을 막 첫 바가지 푸는데 푸뜩 눈뭉치가 떨어졌
다, 그 형수 뒷머리를 덮었다. 내가 막 웃으니까, 그 형수두 눈 떨 생
각은 않구, 하하하 웃는단 말이다. 원래가 그 형수 잘 웃잖니?"
광석이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토백이 반원새끼덜, 우릴 사촌끼리냐구 묻더구나. 그렇다니까, 그
러냐아구, 어쩌구. 그 꼬락서니라구야. 이 새끼 벌써 취핸?"
조금 사이를 두어,
"야하, 언제나 고향 가지?"
두찬이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제 금방 가게 되잖으리."
"이것두 다아 좋은 경험이다."
"암, 그렇구말구."
"우리, 동네 갈 땐 꼭 같이 가야 된다, 알겐."
"아무렴, 여부 있니. 우리 넷이 여기서 떨어지다니, 그럴 수가. 벼락
을 맞을 소리지. 허허허, 기분 좋다. 우리 더 마실까. 한 사발씩만 더,
딱 한 사발씩."
광석이는 쨍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두찬이는 화차 벽을 두드리며
둔하게 장단을 맞추었다. 하원이는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했다. 술을
한 병 더 받아 온다, 담배를 사온다. 나는 곯아떨어져 잠이 들어 버리
곤 했다.
<중략>
이럭저럭 한 달쯤 무사히 지났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갈
수록 아득했다. 이 한 달 사이에 두찬이는 두찬이대로, 광석이는 광석
이대로 남모르게 제각기 다른 배포가 서게 된 것은(배포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 없는 일이었다. 쉽사리 고향으로 못 돌아갈
바에는 늘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달리 변통을 취해야겠다, 두찬이
와 광석이는 나머지 셋 때문에 괜히 얽매여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생
각하게 된 것이었다. 자연 우리 사이는 차츰 데면데면해지고, 흘끔흘
끔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끔 됐다.
광석이는 애당초가 주책이 없다 할까 주변이 있다 할까 엄벙덤벙 토
박이 반원들과 얼려 막걸리 사발이나 얻어 마시곤 했고, 주변 좋게 보
탬을 해서 북쪽 얘기를 해쌓고, 이렇게 며칠이 지났을 땐 어느덧 반원
들은, 나나 두찬이나 하원이와는 달리, 광석이만은 오래 전부터 사귀
어 온 친구처럼 손을 맞잡고는,
"나왔나!"
"오냐, 느 형님 여전하시다."
"버르장머리 몬쓰겠다. 누구보꼬 형님이라 카노."
"자네 언제부터, 말버르장머리하곤, 허 요새 세상이 이래 노니."
농담조로 수인사가 오락가락했으니, 나나 두찬이나 하원이는 광석
이의 이런 꼴을 멀끔히 남 바라보듯 바라다봐야 했다. 광석이는 차츰
반원들과 얼려 왁자지껄하는 데 더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고, 날이 갈
수록 자신만만해졌다.
그 꼴사나움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더더구나 주변 없고 무뚝뚝하고
외양보다 실속만 자란 두찬이는 저대로 뒤틀리는 심사를 지닌 채 다른
궁리를 차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즈음부터 두찬이는 부두 안에서
얌생이를 해도 다만 밥 두 끼 값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주는 법이 없이,
일판만 나오면 혼자 부두 앞 틈 사이 샛길을 허청허청 돌아다녔다. 이
런 두찬이는 으레 술이 듬뿍 취해 화찻간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하원이는 자주 울먹거렸다.
"야하,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
하고 애스럽게 지껄이곤 했다.
<중략>
두찬이는 벌렁 자빠져서 화차 안이 쩌렁쩌렁하도록 그냥 어이어이 울
어 댔다.
이튿날 아침 두찬이는 보이지 않았다. 부두 일판에 나가도 없었다.
사흘쯤 지난 뒤, 어두운 화찻간 속에서 하원이는 지껄였다.
"야하, 우리 이젠 꼽대가리(밤낮을 거푸 일하는 것) 자꾸 해서 돈
좀 쥐자. 그러구 저기 염주동 산꼭대기에다 집 하나 짓자. 거기 집 제
두 일 없닝기더라야. 잉야 조카야, 흐흐흐 우습다. 진짜 우스워. 난 너
두 두찬이 형처럼 그렇게 될까 봐 얼마나 떨언 줄 안. 광석이 아제비두
맘은 좋은 폭은 못 됐시야, 잉. 우린 동네 갈 젠 꼭 같이 가자. 돈벌어
서, 돈벌문 말야, 시계부터 사자, 어부러서. 그까즌 거, 꼽대가리 대구
하지 머. 광석이 아저씨까 두찬이 형은 못 봤다구 글자마, 알 거이 머
야, 너까나만 암말두 안 헌 담에야. 그저 대구 못 봤다구만 글자마. 낼
부터 나 진짜 꼽대가리 할란다. 잉, 조카야 우습다. 잉? 이케(이렇게)
잠이 안 온다야. 우리 오늘 밤, 그냥 밤새자. 술 마시까, 술?"
나는 그저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이 내리는 눈송이여, 아, 눈송이여."
무엇인가 못 견디게 그리운 것처럼 애탔다. 그러나 누가 알랴! 지금
내 마음 밑 속에서 일어나는 돌개바람 같은 것을…… 아, 어머니! 이
미 내 마음은 하원이를 버리고 있는 것이다. 순간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와락 하원이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두 볼에 흘러내렸다. 하
원이는 흐흐흐 웃었다. 지껄였다.
"이 새끼 술도 안 먹구 취핸. 참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 눈두. 이북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 광석이 아제비네 움물 말이
다. 야하, 굉장헌데. 새벽엔 까치가 울구, 그 상나무 있잖니. 장자골집
형수 원래 잘 웃잖니. 하하하 하구. 그 형수 꽤나 부지런했다. 가마이
보문, 언제나 새벽에 젤 먼저 물 푸러 오군 하는 게 그 형수더라, 잉.
야하, 눈 보구 싶다, 눈이."
-이호철, <탈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