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은 정말 여불위의 사생아였을까?
진시황이 여불위(呂不韋)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는 정말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였다는 말은 《사기 여불위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불위는 한단(邯鄲)의 미인들 가운데 뛰어나게 아름답고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루는 자초(子楚)가 여불위와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반해서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여불위에게 축수를 올리며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전 재산을 자초에게 투자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이 기이한 보배를 낚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마침내 여자를 자초에게 바쳤다. 여자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만삭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곧 진시황 정(政)이다.”
여불위는 양책(陽翟)1)의 대상인이었다.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으로 장사 나갔던 그는 진(秦)나라의 왕족으로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자초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기이한 보배가 이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초는 성이 영(嬴)이고 이름이 원래 이인(異人)이었으나 나중에 자초로 고쳤다. 그의 조부는 진의 국왕인 양왕(襄王)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태자인 영주(嬴柱)였다. 진은 조와 결맹을 체결하기 위해 자초를 인질로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으로 파견했다. 얼마 후에 진은 조와의 결맹을 깨뜨리고 조나라를 침공했다. 이인은 비록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비참한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지나 다를 바 없는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한단에 있으면서 그의 정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인을 설득하여 진의 왕위를 차지할 계획을 세웠다.
여불위는 우선 노래와 춤을 잘 추는 조나라의 미인을 골라서 황금 500근과 함께 인인에게 보냈다. 또 따로 황금 500근으로 진귀한 보물을 사서 진의 수도인 함양으로 갔다. 그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설득하기로 했다. 화양부인은 진의 태자인 영주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여불위는 그녀를 설득하여 이인을 태자로 삼도록 했다. 그 결과 이인은 영주의 뒤를 이어 진의 양왕(襄王)이 되었다. 여불위는 승상이 되었으며,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져 지금의 섬서성에 속하는 남전(藍田) 일대의 12개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여불위가 이인에게 바친 여자는 조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조희(趙姬)’라 불렀다. 그녀는 이인이 진에 도착한 후에 나중에 진황이 된 영정(嬴政)을 낳았다. 영정이 여불위의 아들인지 자초의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사마천은 엄격한 자료를 토대로 《사기》를 기술했다. 그가 《사기》를 완성했을 때는 여불위가 죽은 지 120년이 지났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이 자기 마음대로 날조된 것은 아닐 것이다. 동한의 반고(班固)는 한서에서 이러한 사마천의 견해를 지지했다. 심지어 후대의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조금도 의구심을 가지지 않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여불위는 한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이인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반하게 만들었다. 이인이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여불위는 짐짓 화가 난 척하다가 마침내 여자를 이인에게 바쳤다. 기한이 차서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영정이다.”
사기와 문장은 다르지만 여불위가 바친 조희가 낳은 아들 영정이 나중에 진시황이 되었으며,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재된 내용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은 사람은 명대의 왕세정(王世貞)이다. 그는 《독사후변(讀史後辨)》에서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는 설은 위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첫 번째로 여불위 자신이 오랫동안 부귀를 누리기 위해 허황된 말을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여불위의 문객들이 나중에 주인이 죽은 후에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해 지어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학계의 거장이었던 왕세정이 의문을 제기하자 후대의 학자들도 다투어 고증을 통해 진시황의 생부를 가려내려고 노력했다. 특히 소설가들이 더욱 열심이었다.
1940년대에 곽말약은 《십비판서(十批判書)》에 여불위와 진시황의 관계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을 실었다. 그는 우선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열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했다.
1. 《사기》에 기재된 기록은 《국책(國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증거가 없다.
2. 춘신군(春信君)의 경우와 너무도 흡사하다. 마치 소설가들이 지어낸 말이나 다름이 없다.
3. 《사기》의 여불위열전은 사마천의 문장과 다르다.
그러므로 곽말약은 사마천이 지었다는 여불위열전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억측에 불과하므로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곽말약이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자 많은 역사학자들도 사마천의 관점을 부정했다. 임검명(林劍鳴)은 《진사고(秦史稿)》에서 곽말약의 시각에 동의하면서 역시 여불위가 진시황에게 자기 아들임을 암시하여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퍼뜨린 말이라고 했다. 마백비(馬白非)는 《진시황전(秦始皇傳)》에서 여불위가 여자를 자초에게 바쳤다는 자체가 허망한 말이라고 했다. 그는 사마천이 6국의 일을 기록할 때 《전국책》에서 많은 자료를 인용했지만, 《사기》에 기재된 여불위가 미녀를 자초에게 바쳤다는 기록은 전국책에 없다고 지적했다. 《검교중국진한사(劍橋中國秦漢史)》의 부록에는 원래의 《사기》에 없던 내용을 첨가한 것을 싣고 있는데, 그 첫머리에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누군가가 진시황을 여불위를 사생아라고 《사기》에 기재한 것은 진시황을 비방하고 정치적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말에 이르자 학계에서는 다시 진시황의 출생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재현되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곽말약의 견해에 반대하고 사마천의 기록을 지지했다.
곽지곤(郭志坤)은 《진시황대전(秦始皇大傳)》여불위가 기이한 보물을 낚으려고 미녀를 자초에게 바쳤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록하면서 곽말약의 3가지 의문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막수장(莫秀璋)은 《대진제국(大秦帝國)》에서 사마천의 기록은 허구가 아니며 여불위전의 문장도 후대에 첨가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1990년대 말에는 임검명이 《여불위전》에서 자신이 10년 전에 《진사고》에서 발표했던 견해를 수정하여,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은 후세인들이 진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에 도덕성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생아’ 또는 ‘사통(私通)’이라는 극도의 치욕적인 비난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 진시황의 정적들이 그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해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또 실제로 진의 궁실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도록 어떤 엄중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진시황의 정적들이 그것을 공격무기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후세인들은 진시황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여불위와 사통을 했던 사실을 들어 진시황을 여불위의 사생아라고 공격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또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였다고 해도 그것이 진시황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실제로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사생아였지만 그것이 그의 위대함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첫댓글 고대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는 사생아내지는 사생아 신화적 역사 인것 같습니다. 알에서부터 박까지 아마도 새로운 피가 필요 했었나 봅니다. 몽골이나 알래스카의 마누라 빌려준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후학들이 완벽한 증거를 제시하시 안는한 정황으로 부정하는것도 경계해야겠지요.새해에는 공부도 좀 할까요?..새해에는 책도 많이 내시고,영화시나리오도 몇편하시겠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J^
좋은 자료,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