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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생가(옥천) 글/사진: 이종원
돈에 쪼들리고 세파에 찌들릴수록 애틋한 고향이 그리워진다. 고추를 내 놓고 멱을 감고, 숯검댕이를 묻어가며 감자를 구워먹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내 가진 모든 것과 맞바꾸고 싶다. 그 애뜻한 향수가 워낙 가슴 속 깊히 박혀 있어 아리랑이 같은 추억마져 끄집어 내기란 쉽지 않다. 그 고향이 그리워 그곳을 다시 찾았어도 빌딩숲으로 덮혀 있거나 근사한 팬션이 옛 집을 대신하고 있다면 내 향수는 이미 지나간 영화필름이나 다름 없다. 내 고향은 참 편안하고 아늑했던 동네였는데... 토장국처럼 담백하고 질화로처럼 우직한 정에 흠뻑 취하고 싶은 자는 경부선 옥천행 기차에 올라 타라. 손 때 묻은 기차표를 꼼지락거리면서 열차안으로 와락 쏟아지는 햇볕을 마음껏 받아라.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환한 볕이 내비치는 빛줄기같은 곳이다. 대신 옥천에 와서는 화려한 것을 찾지 마라. 흙 내음에 감사할 줄 알고 파란 하늘에 고개 숙일줄 아는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세상 어느 곳보다 행복한 곳이다.
정지용생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몰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정지용의 시 '향수'의 첫소절을 흥얼거리다보면 어느덧 그 싯구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된다. 감동 때문일까 손가락 끝에 작은 떨림을 전해진다. 얼룩배기 황소는 온데 간데 없어도 지즐대는 실개천을 보고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정지용은 1902년 이 곳 옥천 하계리(현 죽향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 때 이 곳이 옥천의 중심지였지만 경부선 철도가 비켜가는 바람에 그나마 조용한 마을을 지킬 수 있었다. 죽향리 지주들이 땅을 팔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빌딩이 들어서고 차량이 홍수를 이루었다면 정지용의 주옥같은 시어들이 퇴색되었는지 모른다.
싸립문을 밀치고 생가에 들어섰다. 본채 부엌옆에 '지용유적 제 1호.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년 5월 15일(음력)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집이 들어섰다.' 라는 동판이 우릴 맞는다. 1996년 옥천군에서 허물어진 옛집을 없애고 본채와 행랑채, 돌담과 우물을 갖춘 초가집으로 단장했다. 나즈막한 흙담 밑에는 봉숭아 꽃망울을 터뜨리고, 한 켠에는 먼지를 잔뜩 머금고 있는 나무 절구가 세월을 망각하고 서 있었다. 우물 물을 들이키며 바짝 정신을 차린 시인의 잔영도 그려본다. 헛간 앞쪽 구유와 지게와 멍석도 그의 향수처럼 초가집을 장식하고 있었다. 본채 안방에는 둥근 안경테를 두른 정지용의 초상화와 그의 시 '할아버지'가 걸려 있다. 할아버지를 그리는 따뜻한 시선에 와락 온기가 느껴진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호롱박이 담벼락에 기대어 방긋 웃고 있다.
장독은 정지용의 질박한 시어를 보는 듯하다.
흙담에 올라선 호박.
생가는 청석교 모퉁이를 지나면 나온다.
정지용의 명작 '향수'다. 어린시절의 공간을 시로 녹여 내었다. 그의 고향 관련 작품은 어린 시절 따사로운 시선과 그 체험이 담겨 있었다.
생가 바로 옆에는 정지용 동상이 서 있다. 지용은 관례대로 12살에 결혼을 하였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린 아내를 고향에 남겨둔 채 서울로 올라가 타향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지용의 마음 속에 향수가 싹 텄을 것이다. 서울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지용은 17세에 휘문고보에 입학했고 그 곳에서 시에 눈을 뜨게 된다. 학교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을 가게 되고 다시 귀국하여 휘문교보에서 영어선생으로 재임하면서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했다. '진정한 한국의 현대시는 정지용의 시에서 비롯되었다.'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한국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6.25 이후 그의 행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온갖 추측과 함께 오랫동안 그는 금지시인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이동원,박인수가 그의 시에 노래까지 붙여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옥천사람들의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다. 시내 어디를 가든 정지용의 캐릭터 그림을 만날 수 있고, '향수'가 걸려 있는 시를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 문학관 2005년 5월 15일. 정지용 102회 생일을 맞아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정지용 문학관'이 생가 옆에 생겼다. 영상실, 문학전시실, 문학교실로 꾸며진 문학관은 그의 업적과 시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짜임새가 있었다. 먼저 영상실에 들르는 것이 좋다. 지용의 삶과 문학 그리고 인간미등 서정적이며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터리를 감상 하다보면 그가 대단한 시인임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문학전시실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상황과 현대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며, 시집의 초간본과 육필원고를 볼 수 있으며 앨범을 넘기듯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특히 주제별로 4구역(향수, 바다와거리,나무와 산, 산문과 동시)으로 나뉘어져 그의 시를 심도있게 감상 할 수 있다.
가장 인기를 끄는 테마는 관람객이 직접 만저보고 듣고 시를 읊어볼 수 있도록 꾸며 놓은 문학체험장이다. 근사한 카페 분위기다. 나무의자 앉아 잔잔한 영상으로 제작된 향수에 흠뻑 뺘져 볼 수 있다.
자신의 손이 스크린이 되어 시를 읽어 볼 수 있는 체험장도 있다. 손박닥으로 주옥 같은 시어가 흘러 간다. 이 밖에 배경영상과 음악이 흐르는 곳에 직접 성우가 되어 정지용의 시를 낭독할 수 있는 시낭송실도 있으며, 듬직한 목소리를 가진 성우의 시낭송도 헤드폰으로 들어볼 수 있다.
문학교실은 각종 문학강좌, 시 토론, 세미나등을 할 수 있는 활동공간이며 단체관람객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과 기타 강좌가 준비되어 있다. 입구에는 밀랍인형이 있어 그 옆에 앉아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매년 5월이면 지용문학제가 이곳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정지용이 어린시절 다녔던 옥천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 옛날 교사도 둘러볼 만하다. 붉은 페인트를 칠한 목조건물이다. 현재 이곳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교실너머로 까까머리 정지용 시인을 상상해보면 좋을 듯 싶다.
옥주 사마소 정지용 생가를 보고 그냥 떠나면 왠지 서운하다. 근처 사마소를 놓치면 곤란하다. 안내 푯말이 제대로 갖추지 않아 헤메기 쉽상이다. 더구나 이곳에 사는 사람조차 사마소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여러 번 골목을 드나들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담벼락아래 텃밭에서 상추를 가꾸고 있는 할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그 굽은 허리를 간신히 펴고 내 손목을 붙들고 사마소 건물까지 안내한다. 푸성귀처럼 풋풋한 그 마음씀씀이에 감격해 본다. 사마소는 학창시절 국사책에서 여러번 접했던 단어다. 조선중기 지방 고을마다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친목과 학문, 정치및 지방행정등의 자문등을 논하던 곳이다. 그러나 그 힘이 커지자 점차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폐단이 컸기 때문에 선조 36년(1603년)에 없앴으나 지방에 따라 그 유습이 지속되어 왔다. 어쩌면 정지용의 문학적 뿌리는 사마소 툇마루에서 글을 읽었던 유생으로부터 나왔는지도 모른다.
옥주사마소는 효종 5년에 빈민구제기구인 의창을 뜯어다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원래는 지금 건물보다 훨씬 컸는데 일제때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야금야금 땅을 파는 바람에 지금은 달랑 건물 한 채만 남아 있다. 왼쪽에 부엌이 있고 가운데 넑직한 툇마루가 보기 좋게 자리잡고 있다. 마루바닥에 호박이 볕을 쬐고 있었다. 내가 본 첫 번째 향수였다.
사마소 지킴이 할아버지다. 조상 대대로 이 집에서 살았고 바로 이 안방에서 자식을 4명이나 낳았다고 한다.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바람에 군청에서 바로 옆에 양옥을 지어 주었지만 그는 거의 이 곳에서 소일을 한다. "우리 집보다 이 곳이 편해요. 제 자식 같기도 하고...."
옥천보건소의 이동목욕차가 지나간다. 거동 불편한 어르신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얼마나 개운할까?
옥천향교 옥천향교 초입에 수 백년된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었다. 그 나무 아래서 마을의 촌로들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엄청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었다. 마을의 어른신들이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뛰어간다. 나도 참 못된 사람이다. 집으로 달려가는 할머니를 붙들고 옥천향교의 위치를 물어본다. 충청도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말로 하기 힘들면 자신이 직접 안내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기어코 향교 홍살문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하얗게 샌 머리에 빗물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옥천에서 만난 두 번째 향수다. 홍살문은 대로변 약간 안쪽에 있다. 한 때는 민가들이 얼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홍살문 안쪽에 집들이 빽빽하다. 조선시대 유학을 가르쳤던 엄격한 학교일진대 사람냄새 때문일까. 텅 빈 향교에 온기가 느껴진다.
명륜당에서 무엇보다 나를 신기하게 만들었던 것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아궁이다. 이러다 화재가 나면 어떻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여태 별탈 없이 버틴 것을 보니 앞으로도 문제 없겠지. 누각에 온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앞쪽의 기둥은 길고 뒤쪽의 기둥는 낮다. 아래에서 열기가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구조다. 지금이야 고층건물에도 따뜻하지만 옛날에는 혁신적 발상들이 아닐까? 지방인재 양성을 위한 옥천사람들의 노력들이 가상하다.
육영수여사 생가 옥천향교 근처에 육영수여사 생가가 있다. 아마 박정희 대통령을 미워하는 사람은 가끔 보았어도 육영수 여사 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의 훌륭한 내조자이며 자애로운 어머니상으로 이미지가 박혀 있어 국민들은 육여사처럼 맑고 청순한 영부인상이 늘 그리웠던 것이다. 육여사는 1925년 이 집에서 태어나 1950년 박정희대통령과 결혼하지 전까지 살았던 집이란다. 1600년부터 김, 민, 송 삼정승이 살았을 정도로 옥천에서는 교동집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육영수 아버지가 매입하여 육씨집안의 소유가 되었고 영부인까지 배출하게 된다. 그러나 육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죽자 이 집도 역시 방치하게 된다. 집과 사람의 운명은 같은가보다. 금년 초부터 집을 헐고 2007년에 다시 개방할 예정이다.
옥천성당 옥천의 작은 동산에 하늘색 성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지금이야 높은 건물이 많아서 잘 눈에 들어 오지 않지만 한 때는 명동성당처럼 옥천의 명물이었을 것이다. 현재 충북지역에 남아 있는 1940년대 성당건출물(1945년건립)로는 유일하며 해방이 후의 성당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이어서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현재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고즈넉한 건물 분위기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받는다. 이곳을 찾게 되면 스르르 무릎이 꿀려지고 두 손을 모으게 만든다. 잔디밭에는 나무 밑둥을 잘라 만든 의자도 보기 좋고 화강암으로 만든 성모상도 돌의 질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수녀님의 정성이 담긴 화단도 잘 꾸며져 있다. 배롱나무, 단풍나무, 참나무등 힘차게 자라고 있다.
성당안에서 수녀님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고 있다. 너무나 거룩하게 보여 몰래 카메라에 담았다. 묵주를 굴리는 소리보다 작게... 여행은 곧 순례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치면 이렇게 성당 한 구석을 차지하고 기도도 하고 졸기도하다. 만나를 먹은 백성마냥 다시 힘을 얻고 순례의 길에 나선다. 등산화 끈을 잔뜩 조여본다. 언제 이 순례가 끝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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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 아.. 참 좋네요.. 참 좋네요....정지된 시간을 담은듯한 그림 같은 사진.. 가슴 한 복판에 일순간 내를 만들고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물같은 음악.... 손바닥위에 빛으로 새겨지는 시.... 나도 읽어보고 싶네요.. 그러면.. 막힌 가슴이 툭 터져 눈물 한방울 나올것도 같네요..^^
경부선 대전 지나 바로 옥천,정지용 생가 학생들 단체견학 많이 오더군요. 부근 육영수 여사 생가 다음 기회 가봐야 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