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한 합천 해인사. 방년 17세의 개구쟁이는 오직 하루 일과를 마치면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유일한 낙으로 고된 행자생활을 버텼다. 그렇게 1년. 이제 좀 살 만 한데, 어느날 양산 통도사에 계신 경봉스님 시자로 들어가라는 명을 받았다. 어른의 말씀을 어길 수 없어 시큰둥하게 시외버스를 탔다. 당시만 해도 합천에서 양산으로 가려면 대구를 거쳐야 했다. 양산시 물금읍에서부턴 걸어서 갔다. 일주일 고생 끝에 당도한 통도사 극락암이 ‘악마의 성’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테안경 너머로 비치는 노스님의 자상한 눈빛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노스님은 소년의 신상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손을 어루만졌다. 그날이 1960년 음력 정월 보름. 소년은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장 명정(明正)스님. 20여년전 선원의 주인은 은사 경봉스님(1892~1982)이었다. “노장님 떠나보낸 지가 엊그제 같은데 …. 이제 내가 처음 뵈었을 때 노장님 나이만큼 됐으니, 기분이 묘하네.” 스님은 한참을 진하게 탄 말차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생에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 명정스님에게 그것은 출가 그리고 경봉스님과의 만남이다. 꿈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천둥벌거숭이를 제 마음자리에 데려와 앉혔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일? 노장님은 화 한번 내지 않으셨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저 괜찮다 괜찮다 하셨지. 한번은 선원에 수좌가 100명쯤 모여 정진하는데 다들 공부는 안 하고 농땡이만 피우는 거야. 입승을 보던 스님이 불같이 화를 내며 죽비를 휘두르다, 분이 안 풀렸는지 문짝을 떼 집어던져버렸어. 평소 차분한 입승 스님이 그 정도로 대노했으면 수좌들이 정말 잘못하긴 한 거거든. 그런데 우리 스님은 ‘뭐 그깟 일로 화를 내고 그러나’ 웃으면서 말릴 뿐이었지.”
언젠가는 스승의 방을 찾은 어떤 여신도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며, 심지어 스님의 설법 흉내를 내며 조롱했다. 화가 난 시자들이 내쫓으려 하자 때마침 쪽문을 드르륵 연 스님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인들을 반갑게 맞았다. “다 알면서도 넘어간 거지. 사람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스님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모두 허용했어. 내가 독을 삼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마실 테니까.” 물론 자기 제자가 조금이라도 샛길로 빠질 때는 그렇게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 없었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찌검을 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진짜 화가 난 사람같진 않았다. 명정스님은 스승의 이런 행동을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한 ‘연기’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은 화를 내기 시작하면 그 화에 놀아나면서 어쩔 줄을 모르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노장님은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줄 아는 분이었어.”
경봉스님은 대자유인이었다. 통념에 얽매이지 않았고, 혹자가 목숨을 걸기도 하는 이념을 한칼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강력한 소탈함을 지녔다. 명정스님은 호국선원이란 이름이 마뜩찮았다. 호국(護國)이란 낱말에서 ‘국가주의’, ‘국가와 종교의 야합’이란 부정적 이미지가 풍겼기 때문이다. 스승에게 따져 물었지만 이내 머쓱해지고 말았다. “‘나’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이면 국가가 된다. 그렇게 가다보면 우주에 이르지 않겠느냐. 경계 짓기 나름일 뿐”이라는 스승의 대답.
한때 호국선원에는 매년 안거 때마다 꾸준히 100명 이상 모여 정진했으나 지금은 예전만치 북적대진 않는다. 승단의 성장으로 전국 곳곳에 선원이 세워져 납자들이 분산된 까닭이다. 물론 명정스님이 스스로 안거대중을 15명으로 제한한 것도 그 이유. 스님의 지도방법은 정공법이다. 납자들이 공부를 어려워한다고 등을 다독여주는 법이 없다. “벼랑으로 몰아세워 뛰어내리는 녀석만 받아들인다.” 은사 스님이 그랬다. 가부좌가 잘 안 틀어진다고 칭얼대면 해맑게 웃던 낯이 갑자기 정색을 한다. “그래, 병신은 안 되지.” 그럼 결국 가부좌를 틀고 만다. 전장의 지휘관처럼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이 아니라 내가 널 죽인다’는 각오다. “고양이가 쥐 잡듯이 수행하라고 했어. 일단 고양이가 쥐가 다니는 길목에 앉아 쥐를 노리고 있으면 일체 다른 잡념을 하지 않아. 쥐와 하나가 되지. 혼신을 다하지 않으면 열매가 떫다고 투덜대면 안돼. 매사가 마찬가지야.”
스님의 언변은 직설적이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핵심만 정확히 찌른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분해주는 건 정신의 위대함 때문이야. 선(禪)은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지. 정신을 한군데로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어.” 목이 마르다고 보채는 아이에게 물병과 샘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만 툭 던지는 식이다. 샘을 찾아가 물을 담는 것은 아이의 몫이다. 그리고 제 스스로 물을 얻었다는 뿌듯한 기쁨도 순전히 아이의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을 집중하면 무엇이 이루어지나. 무엇이 좋은가.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은 금물이다. 적어도 스님에겐 수행의 결과에 대한 궁금증은 깨달음으로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치졸한 욕심일 뿐이다. “집중한 다음에 있긴 뭐가 있나. 그저 정신만 모으면 돼.” 화두도 하나만 깨면 끝이다. “한 과녁만 뚫으면 나머지 과녁도 일시에 명중된다.” 한 티끌 속에 무진(無盡)의 세계가 있다는 뜻. 고양이는 쥐 잡는 법 하나만 알면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사람의 삶에도 특별히 많은 재산이나 지식이 요구되지 않아. 다만 마음을 모아 자기자신만 보면 되지.” 그러나 타인을 통해서 나를 평가하려는 어리석은 습성 탓에, 어울리지도 않은 치장을 몸 곳곳에 덕지덕지 붙인 괴물이 된다. “고생스레 여기저기 씨를 뿌려놓고 정작 수확할 때는 자리에 없어. 어디서 또 횡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지. 한심한 소식.”
올곧은 수행을 강조하는 스님이지만 예전만 못한 승가의 수행풍토에 대해선 의외로 귀가 순해진다. 잠을 쫓기 위해 목 밑에 칼을 들이밀거나 심지어 얼음을 물고 있다가 이빨이 빠져버렸다는 고행의 일화가 수도 없을 만큼, 과거의 수행은 치열했다. 스님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 때는 수좌들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게 안 하곤 못 배겼다”며 허허롭게 웃을 뿐이다. “세상은 항상 그대로인데, 수좌들만 변했는가. 30년전에 비해 중고생들도 건방져졌는데 … 다 똑같은 거야. 세상이 변했다고 멸망할 만큼 변한 건 아니잖아. 그저 변화를 받아들일 뿐.” 수천년전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해 보니 이런 뜻이었다. ‘요즘 애들, 버릇없다’ “물길을 막는다고 막아지던가. 제행무상은 고통이지만 그걸 알면 자유야.”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출가했고 은사의 덕택으로 빈손이 될 수 있었다. ‘출가이유’와 ‘화두’. 스님은 이 두 가지에 대해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고향인 김포에서 해인사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출가했다”는 게 고백의 전부다. 어떤 화두를 들었는지에 관해서도 묵묵부답. “노장님이 내려주셨어. 비밀이야.” 앞서 말했듯 일생에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 출가, 은사와의 인연, 그리고 마지막 한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스님은 다시 선원으로 들어가 화두를 잡는다. 변해도 되는 것과 변하면 안 되는 것 사이에 스님이 있다. 은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철저히 지키다 보니, 스님은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 ‘80년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80년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서산대사의 열반송이 극락암 뒤편 대숲에 무르익었다.
경봉스님이 있어 명정스님이 있다. 불문(佛門)에 든 스님을 올바른 수행의 길로 인도하고, 행동거지 속에서 진실한 수행자의 면모를 가르쳐주었다. 경봉정석 스님(鏡峰靖錫. 1892~1982)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07년 어머니를 여읜 뒤 통도사에서 출가했다. 1912년 해담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 경전연구에 몰두했다.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는 〈화엄경〉 구절에 큰 충격을 받고, 참선정진에 몰입한 스님은 1927년 11월20일, 방안의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가 바로 대오한 뒤 읊은 게송. 깨달음 이후 스님은 수행과 포교에 더없이 매진했다. 극락암 호국선원, 동화사, 내원사 등 여러 사찰의 선원에서 조실을 겸임하며 후학을 지도하기도 했다.
스님은 특히 옛 스님들이 해놓은 법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선사 자신의 안목으로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갈파했고, 시와 시조, 선묵(禪墨)에도 뛰어났다. 일상생활 주변을 소재로 한 친근한 법문에 많은 불자들이 감화되기도 했다. 통도사 주지, 조선선리참구원(현 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던 스님은 1982년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1943년 12월 김포에서 태어난 명정스님은 1959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이듬해인 1960년 통도사 극락암으로 찾아가 경봉스님을 곁에서 모셨으며 1961년 경봉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40년 넘게 극락암 호국선원 등에서 정진했으며 저서로 〈차 이야기 선 이야기〉, 경봉스님을 비롯한 선지식들 사이에 오고간 서한을 엮은 〈삼소굴 소식〉 등이 있다. 장영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