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을 보고 싶었습니다. 3월 중순에 접어드는데 분명 물가 근처로 가 찾아보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라는 추측 하나만을 지닌 채 물이 흐르는 징검다리로 가 보았습니다. 어제 밤 사이 갑자기 낮아지는 온도에 영향을 입어 한기를 느껴 낮에 활짝 열어 두었던 창문을 불이 나게 닫고 난방 스위치를 켰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아침에 느꼈던 봄기운은 사라지고 냉기가 흘렀습니다. 오싹하는 분위기에 햇살이 퍼지기를 기다리다 약간 보온성이 짙은 웃옷을 챙기고 평소 눈여겨보았던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징검다리 건너 양지바른 곳을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살피며 탐색해 나가다 드디어 봄 꽃을 발견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며 내심 안으로 비명을 질렀습니다. 역시~~ 그렇고 말고 사계절 우리들이 키우는 화초에서는 늘 꽃을 볼 수 있지만 하늘에서 키워 주시는 들꽃은 절기에 맞춰 봄,여름,가을,겨울로 이어져 나갑니다. 봄에는 세련되고 여름은 풍성하고 가을은 애상심을 불러 주고 겨울은 강인함을 복돋아 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당신의 몫이십니다. 감사하나이다. 하고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네 송이는 개화되었고 세 송이는 막 터지려는 찰나의 시간을 안고 있었습니다. 꽃망울이 가로 세로로 터지면서 안에서 흰색 꽃잎이 순간적으로 툭 터질 기세였습니다. 정말 세상이 고요하다면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는 톡 터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갈망이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옛적 어머님께서 생존하셨을 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사소한 것에도 정분을 나눈다 하시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비워지는 허전함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어머니가 그리워졌습니다. 잠시 허리를 펴 북쪽 하늘 가를 살피며 목례로 인사를 드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꽃을 찾아 보았지만 향긋한 쑥만 보일 뿐, 더 이상이 핀 들꽃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징검다리로 가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호젓한 잣나무 숲을 찾았습니다. 숲 안부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잣송이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겨울 내내 가지에 달려 있던 잣송이들도 봄이 찾아오면 저절로 떨어져 땅 위에 뒹굽니다. 새 잣송이를 매달기 위한 수순입니다. 봄에 떨어진 잣송이에 남아 있는 잣은 청설모 등의 먹이가 되거나 비에 섞여 흘러가다 발아에 알맞는 환경을 만나면 여지 없이 새싹이 나고 빛과 물과 바람, 시간에 도움으로 새로운 나무가 되어 숲의 구성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自然)의 근거입니다. 스스로 위뤄 나간다는 생태적 철학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잣나무는 남쪽에서는 해발고도 1000m 이상, 중부지방에서는 해발 300m 에서도 잘 자랍니다. 혹독한 추운 겨울에도 건재한 나무가 바로 잣나무입니다. 보통 나무 높이는 30m 넘게 자라고 흉고직경(胸高直徑)은 1m가 넘습니다. 그래서 한옥 짓는 자재로 상당히 좋아 산사(山寺) 주변에 전나무와 함께 많이 식재를 해 놓고 있습니다 보수재목이 필요하면 벌목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소나무 이파리가 2-3개가 뭉쳐 있지만 잣나무는 5개로 되어 있어 오엽송(五葉松)이라 부르고 추운 겨울이 되면 흰빛이 돌아 백동나무라고도 부릅니다. 특히 한국천주교 밑거름이 되어 주신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의 선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라 하였고 인격적으로는 사대부라 불렀던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천주교를 태동시킨 이벽의 손에 예수회소속 사제 마태오 릿지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잡하면서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박해라는 수난을 겪게 되면서도 성직자들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틀을 잡아 나갑니다.
이 소식이 프랑스까지 전해져 젊은 사제들이 조선을 전교지로 정하고 파견되어 은밀하게 들어와 험난한 각고끝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의 신자들을 신앙의 반석 위에 올려 놓습니다. 세 번의 큰 박해를 겪으며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들도 새남터를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서 체포되어 순교하면서 세 소년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를 마카오로 파견, 최방제 소년은 풍토병으로 사망하여 그곳에서 묻히고 두 소년은 이후 만주 소 팔 가자로 이동하여 부제품을 받고 중국남당으로 가 사제품을 받은 후 어렵게 국내로 귀국하여 사목을 하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순교를 하시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전국을 사목지로 삼고 순회하시다 문경새재 아래 마을 길에서 병으로 쓰러져 선종하시여 배론성지에 안장되셨습니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조선은 패망하고 식민지시절 제8대 조선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롤 뮈텔주교는 한국스스로 사제를 배출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바티칸에 이 사실을 알리고 경제적인 도움을 역설하였지만 지체되다가 1909년 독일 베네딕도 수도회에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당시 아프리카지역 사목에 집중하느냐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재차 방문하여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베네딕도회가 조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제물포를 이용하여 귀국한 베네딕도회 수사신부님과 평수사님들은 서울 백동(栢洞. 혜화동) 일대 3만 평의 땅을 사들여 수도원을 건설하게 됩니다.그리고 자립할 수 있도록 목공기술과 마차를 만드는 기술학교르 세워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르지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만든 성물이 현재에도 종현(명동성당) 제대와 안성성당 제대 뒤 배경으로 성모님 목각상이 구성당 제대 벽면에 현재에도 남아 있습니다.
1866년경부터 이 일대에 잣나무 골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베네딕도회가 자리를 잡은 후 기술학교내에 백동성당을 신축한 후 1918년 동소문 밖 삼선교에 공소를 세웁니다. 백동성당(혜화동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약현성당, 종현성당(명동성당), 뒤를 이어서 세 번째로 새워진 성당입니다. 1921년 원산교구가 경성대목구에서 분리되자 베네딕도 수도회는 1927년 혜화동에서 원산시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겨 만주일대까지 포함하여 교구를 설정한 바티칸의 결정대로 전교를 담당합니다. 제8대 경성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대주교는 1927년 10월 7일 종현본당(명동성당)으로부터 혜화동 일대를 분리하여 새 본당을 설립 파리외방전교회 지사원(pierre chizallet,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여 1893년 약현본당 설립, 1898년 명동성당 설립에 이어 1927년 백동성당이 설립되게 된 것입니다
제2대 주임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는 1929년 용산에서 백동으로 이전한 소신학교에 옛 수도원 성당을 양보하고 대신 수도원 부속건물이던 목공소를 성당으로 개조하였습니다. 당시 아드리앙 조셉 리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성베네딕도로 정한 것이 바로 백동(혜화동) 성당인 것입니다. 제3대 주임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1937년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쳐 민족의 얼을 심겠다는 취지에서 혜화 유치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제4대 주임 성재덕 베드로 신부님은 1943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첫 교구 수도회이며 방인 수녀회 성가소비녀회(聖家小婢女會)를 설립합니다. 수도회에서는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를 파견합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서울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붉은 겨울 해가 수도원 동쪽 정원과 손 내밀면 닿을 듯한 성벽 위로 서서히 떠오르며 내가 묵은 집 위로 인사를 하더니,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을 건너 옮겨간다. 산들은 당당하게 반원을 그리며 발아래 수도를 감싸 안았다. 나는 한국에서의 첫 밤을 이 집에서 달게 보냈다. 멀리 서쪽으로 북한산이 구름 속에 솟아 있다. 성벽은 북한산을 감돌아 북으로 뻗었다가 다시 남으로 이어진 봉우리들을 따라간다. 돌밭은 산기슭에서 위쪽으로 힘겹게 펼쳐지고 작은 소나무 숲들은 민둥산을 내려온다. 잔가지 덤불들이 아침 햇살로 붉게 타오르며 이 사이를 가른다. 언 나뭇잎들이 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떨었다. 사이사이로 검은 초가집들이 겨울잠에 빠져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발췌)
1794년 정조 21년 4월 「일성록」에는 타락산(낙산)에 심은 잣나무가 하백동(혜화문 남쪽) 뒷산에는 잘 뿌리가 내렸으나 상백동(혜화문 북쪽) 뒷산에는 역군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소나무를 심지 않고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다 던져둬 땅이 많이 비어 있다는 내용이 전해 옵니다. 겸재가 그린 그림에서도 북쪽 지역의 민등산과 잣나무가 많아 잣나무골이라 불렸던 수도원 지역의 그림을 남겨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잣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사람들은 잣나무 골이라 불러 한문으로 백동마을이라 불러던 것입니다. 이런한 연유에서 백동성당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백동나무 즉 잣나무는 피톤치드가 많이 뿜어져 잣나무 숲을 즐겨 찾아 산림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항상 많습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잣나무 숲에서 겨울 내내 닫혔던 가슴을 펼쳤습니다. 아래 하백동 숲에서 쉬다 위 백동 숲을 휘돌아 낙엽송 숲과 잣나무 숲 사이 흐르는 물소리가 청정한 계곡을 따라 걸으며 고향의 봄을 부르다 돌아 왔습니다. 완전한 봄을 기다리며 고향의 봄의 노래를 함께 공유하고 싶어 동영상을 올려봅니다. 봄과 더불어 건강하시기를 소원하면서~~~.
잣나무 숲에 앉아 봄을 기다리는 상춘객입니다. 아마 저 멀리 숲 터진 곳 즈음까지 봄이 온 듯 합니다.
ps /1888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천주교를 박해하던 정부의 방침은 철회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이에 힘 입어 배론에 있던 신학교는 여주 부엉골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원효로 지금의 성심여고 자리로 신학교를 이전하여 뮈텔 주교께서 원하신 대로 한국의 힘으로 한국인 사제를 뽑기 위하여 신학생을 선발하여 용산신학교에서 교육 후 1896년 4월26일. 약현성당에서 정규하 아우쿠스티노(1943.10.23 선종), 강도영 마르코(1929 3.12 선종) 강성삼 라우렌시오(1903. 9.19 선종)사제서품을 받고 김대건, 최양업신부의 뒤를 이어서 신부를 배출하게 됩니다. 정규하 신부는 횡성 풍수원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풍수원성당을 신축 준공하고 강성상 신부는 경남 명례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목에 임하였으나 짧은 생을 사시고 선종하셨습니다. 조선교구장 뮈텔주교는 서품식 당일 갓등이 본당 관할이던 미리내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킨 후 강도영 신부를 초대 주임신부로 발령하여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신부를 역임하셨숩니다. 기적과 같은 한국 천주교입니다. 기억하시며 시순시기를 보내시기를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 너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이 뜻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