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여기가 아닌 저기, 그 어느 곳인가를 향하는 동경이 아니던가. 기대 뒤에 숨겨진 우려와 더불어 낯선 이미지들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 불투명과 두려움 때문에 길을 나서길 주저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이 한가지의 개연성만으로도 충분히 설레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된다. 겨울이 가기 전, 나의 동경이 머문 곳은 묵호 등대였다. 미리 예약해 둔 날이 다가왔다. 백년 만에 내린 1미터가 넘는 폭설로 강릉과 동해는 눈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며, 연일 큰 사건인양 해드라인 뉴스로 보도되고 있었다. 그 사투의 현장 속으로 여행을 간다니까 옆 지기는 정신 나갔냐고 눈을 둥그렇게 뜬다. 더구나 오늘 30센티의 눈이 더 내린다며 잔뜩 겁을 주고 극구 말릴 태세다. 나는 그래서 더욱 가야하는 거라며 맞수를 두고 유유히 집을 나선다. 강릉행, 오전 9시 청량리발 중앙선 열차에 빠듯하게 올라탄다. 맙소사 객실 안이 빼곡하다. 폭설로 여행객이 줄었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눈을 보러 가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달리는 열차의 차창에 이마를 댄 채, 눈앞에 펼쳐지는 설국의 장관에 연거푸 탄성을 지른다. 추전, 태백, 도계, 강원도 산간을 스쳐 지나는 동안 환상의 설경은 영화 닥터 지바고의 광활한 설원을 오버랩 시킨다. 영화 속 주제곡 라라의 테마가 끊임없이 귓전에 맴돈다. 썸웨어 마이 러브......무채색의 하얀 배경은 시름조차 잊은 듯 고요하다. 포근히 덮인 눈 이불은 너저분한 생활의 허물을 살며시 가리고 온 세상을 공평하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만들었다. 신기, 미로 이름마저 예쁜 간이역을 지나 동해로 열차는 접어들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눈송이에 조금씩 걱정이 들 무렵 아니나 다를까 폭설에 발목이 잡혔다. 힘겹게 동해역으로 들어서자 안내 방송이 나온다. "계속 내리는 폭설로 인해 열차 운행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이용에 불편을 끼쳐 대단히 죄송합니다. 대책을 협의 중이니 안전한 객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첫 방송이 나온 이후 수시로 몇 차례의 멘트가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렀다. 동해역을 알리는 이정표는 눈 더미에 기둥이 모두 묻혀 글씨까지 서서히 가려지고 있었다. 역 구내엔 많은 인원들이 제설작업을 하느라 여전히 수선스럽다. 분주히 움직이는 관계자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처음 보는 굉장한 눈 구경에 승객들은 지칠 줄 모르고 역사를 오르내리고 사진을 찍으며 기다린다. 달리 도리가 없어 아쉬운 대로 참는 중 어느 덧 세 시간째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급기야는 더 이상 운행을 못하게 되었으니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열차도 못 움직이는 판에 다른 교통을 우리 더러 알아서 이용하라니. 이런 무성의를 봤나. 좁디좁은 생면부지의 동해역 근처에서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진다. 좀 전까지의 호기롭던 기다림은 온대간대 없이 사라지고 여행의 설렘으로 부푼 환상이 막막한 현실로 툭 떨어져 내린다. 역무원 말로는 3일 전의 폭설로 길이 끊긴데다 오늘 내린 눈으로 도로 상황은 더 힘들어졌다니 갈수록 태산이다. 예전에 북평 읍이던 이 곳 동해역은 같은 동해시로 흡수된 묵호 읍 보다 도시 기능이 훨씬 열악하다. 변변한 숙박시설은 물론 서울에서 그 흔한 찜질방은 꿈도 못 꾸는 곳이다. 그렇다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사정도 아니고,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차하면 기차에서 자겠다고 다들 흥분이 가시지 않을 즈음 마지막 방송이 나온다. 남은 구간의 비용을 환불하고 역에서 준비한 관광버스 다섯 대를 이용해 강릉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다. 우리는 묵호가 목적지인데 강릉으로 가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고속도로를 경유하느라 중간에는 정차하지 않는단다. 이건 또 무슨 경운가.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린 죽어도 묵호로 가야겠으니 알아서 하라니까 역무원 중 한사람이 묵호 가실 다섯 분 나오세요, 한다. 여기요, 하고 쪼르르 달려갔다. 타고 갈 차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이 사람들 정말 대책 없는 소릴 하는 게 아닌가. 시내버스 타면 된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시내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작에 알릴 일이지, 그런 걸 모르고 기차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 거리를 세 시간씩 허비하며 갇혀 있었으니 참 어이가 없다.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인해 벌어진 불가피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주변 정황을 제대로 파악한 연후에 신속히 알려주거나 적절히 대응하도록 조치했어야 옳지 않은가. 그렇지 못한 미흡함에 화가 났다. 안타까운 심정으로야 한바탕 항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동해역을 일단 벗어날 수 있다는 흥분감에 폴짝거리며 시내버스로 달려갔다. 숨을 헉헉대며 기사님께 묵호역 가냐고 물었다. 아, 간단다. 버스에 타고 계신 분들 왈, 묵호까진 금방인데 왜 세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한다. 글쎄, 누가 아니래요. 예상치 못한 기상천외한 일들, 어쩌면 이런 순간들을 만나는 게 길 떠나는 묘미가 아닐까. 뜻밖의 일로 놀라고 긴장하고 또 안도하는 것, 그 모든 과정들이 때로는 신선한 경험으로 남겨지는 것이 낯선 여행지의 매력일지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폭설을 헤치고, 드디어 묵호로 향할 수 있었다. 가라앉았던 기대감은 다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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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봄비의 산책길 원문보기 글쓴이: 봄비
첫댓글 아니 이양반은 눈속에서 수박바가 될라고 거기를 갔나??
근데 같이간 양반들은 정선생빼고 다들 호박바 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