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프랑스
위그노 전쟁이 전개되고 있던 1572년 대학살이 일어난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지칭한다.
16세기의 프랑스는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 본토와 개신교를 믿는 변방의 나바르라는 나라로 분열되어, 36년간 ‘위그노 전쟁’(1562-1598년)으로 피를 흘렸다. 당시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들은 프랑스에서 ‘위그노’라 불렸다.
샤를르 9세가 통치하는 프랑스의 실권자는 샤를르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s)였다. 나바르는 젊은 왕 앙리 드 부르봉이 통치하고 있었다.
카트린은 자신이 편애하는 아들 앙주에게 평화로운 나라를 물려주고자, 딸 마고와 나바르의 왕 앙리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1572년, 카트린에게 독살된 것으로 짐작되는 어머니 잔느를 추모하는 검은 상복을 입은 채, 마고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앙리와 개신교도들.
그러나 카트린은 생각을 바꾸어 기즈가(家)가 공모하여 위그노파에 대한 학살을 단행한다. 8월 24일 새벽, 화려한 결혼식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유혈의 결혼식’이 되었고, 파리에 이어 지방에서도 위그노파에 대한 무서운 학살이 진행되었다. 새를 9세 왕이 학살 금지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까지 유혈사태는 지속되었다.
영화 "여왕 마고"로도 유명한 이 대학살 사건은, 영화에서는 6000여 명, 어떤 역사책에는 1만여 명으로까지 기록되고 있다.
카트린이 갑자기 자기 친딸의 결혼장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이유는 그리 석연치 않다.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한 열렬한 카톨릭 광신자 카트린이 교황의 사주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고, 대표적인 위그노인 콜리니라는 인물을 암살하기 위해, 즉 그 사람만 찍어 죽이면 암살 음모가 탄로날까봐 위그노들이 잔뜩 모인 결혼식 날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해서 떼로 죽였다는 것이다.
즉 이 설에 의하면, 카트린은 콜리니 한명을 성공적으로 죽이기 위해 자신의 딸과 신교 위그노들의 왕 앙리의 결혼식을 개최하고 그날 콜리니를 비롯한 위그노들이 잔뜩 모였을 때, 전부 한꺼번에 몰살시켰다는 거다. 사람 하나 죽이려고 만명을 살육했다는 아주 어처구니 없는 스토리.
대학살의 미끼가 된 앙리는 자신의 동료들이 전부 죽임을 당한 후 3년 반 동안 프랑스에 볼모로 잡힌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앙리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고, 1598년 프랑스 국왕 앙리4세가 된다. 그는 위그노였지만 즉위하자마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4월 13일에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한다.
운디드 니(Wounded Knee Massacre) 대학살
20세기 직전인 1890년 12월, 미국인들에 의해 자행된 아메리카 원주민 대량 학살 사건.
당시 미국 백인들은 500만명에 달하는 미국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해 약 25명 만을 남겨두고 이들을 "보호구역"에 몰아 넣어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곳 보호구역 내에 "상처입은 무릎(wounded knee)"라는 인디언들의 성지에서는 "영혼의 춤"이라는 새로운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영혼의 춤은 긍정적인 내세 사상을 담은 종교적 의식으로, 자신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덧없는 이승에서의 삶은 곧 천국의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지배하고 있던 백인들은 이 의식이 자신들에 대한 불복종의 표현으로 해석해 금지시켰고, 원주민들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500명의 군대를 몰고 "상처입은 무릎"을 침공한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무기를 빼앗으려다가 화를 자초, 1시간 동안 총을 난사해 그곳에 있던 원주민들 350명 중 150명을 살육한다. 평소와 같이, 백인들은 여자와 아이들에게도 총을 난사해 죽였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백인 군대 사령관은 고소당하지만 무죄로 풀려 난다.
살육당한 채 얼어붙은 원주민 시체들.
이들을 땅에 파묻는 백인 살인마들.
서양인들은 주로 자신들이 대량학살된 사건만 역사적으로 부각시켰고, 자신들이 저지른 타민족의 대량학살 기록에 대해선 거의 반성하지 않았다.
1519년 유럽인들이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2500만명의 원주민이 있었으나 100년 안에 150만명만이 남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의 테즈메이니아 섬에 최초의 식민주의자들 36명이 1803년 도착한 이후 벌어진 대학살로 1876년 테즈메이니아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져 유골이 박물관에 전시됐다.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는 원주민들이 선량한 백인들 머리 가죽을 벗겨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백인들이 먼저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습격해 여자와 노인,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삼았다.)
크메르 루즈(Khmer Rouge) 대학살
1975년부터 4년간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2차 대전 이후 아시아 최대의 학살극.
1975년 미국의 원조로 연명하던 극도로 부패한 론놀 정권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 군대에 의해 캄보디아에서 쫓겨난다. 무력으로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은 폴 포트는 비이성적인 극단주의자였다. 자신이 이상향으로 생각한 농업 기반의 공산주의 사회를 최단시간 내에 건설하기 위해, 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후 4년간, 약 170만명의 무고한 인명이 학살된다. (이는 캄보디아 국민 3명 중 하나에 해당되는 숫자.)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는 폐지되었고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중앙은행은 폭파되고 집단 농장이 곳곳에 세워졌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 대상이었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들을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넣기도 했다. 심지어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해 죽임을 당했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이렇게 크메르 루주에 의해 캄보디아의 중산층, 상류층 지식인 층은 대부분 살해됐고, 수많은 양민들이 농업과 건설 현장에서 죽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특히 캄보디아 내 800명의 의사 중 760명과 545명의 판사 중 541명이 살해될 정도로 크메르 루즈의 지식인 혐오증은 극한을 치달았다. 이때의 대학살로 캄보디아 국가는 기반부터 궤멸돼 버렸고, 이때의 궤멸된 상태에서 회복되기 위해 캄보디아는 여러 세대를 인내해야 했다.
1979년 미쳐 날뛰던 크메르 루즈 정권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군대의 침공으로 무너졌고, 이후 게릴라 전으로 정권 회복을 노리다가 정부군에 의해 억류, 가택연금 상태에서 1998년 사망한다. (결국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은 단 한명도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죽기 직전의 폴 포트.
캄보디아의 비극은 사실 닉슨 정권이 이끈 월남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 1970년대 초 캄보디아에 떨어진 대규모 폭격도 닉슨 대통령이 명령했으며, "아이러니칼하게도" 크메르 루즈 군에 금전적 군사적 지원을 해 준 것도 닉슨 대통령이었다. 이유인 즉, 북 베트남의 월맹군에게 위협이 될만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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