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역사
◉술이란?
1%이상의 알코올을 함유하고 있는 음료
◉술의 기원
술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인간보다 동물들이 먼저 먹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술을 발견하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유력한 설은 우연히 나뭇가지가 갈라진 곳이나 바위가 움푹 팬 곳에 저장해 둔 과실이 우발적으로 발효한 것을 동물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 먹다가 의식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술은 과실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술과 신화, 전설, 민담.
술은 정확한 기원이 없는 만큼 신화나 전설에 얽힌 설화가 많다. 서양에서는 술의 어원이 대부분 생명의 물이라고 시작되는 것으로 봤을 때 신성성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
그리스 로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커스)가 산에서 놀다 포도주를 빚게 되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디오니소스는 후에도 서양사에서 술의 신으로 그 위엄이 남아있다.
성서
대홍수를 피해 방주를 탄 노아가 방주에서 물이 부족해 마실 것을 찾다가 우연히 포도가 발효된 것을 마시고 생명의 물이라 했다한다.
-동양
주몽신화
해모수가 하백의 딸인 유화와 하룻밤을 보내기위해 술을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웅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을 보아 신성성을 내보인다.
도토리 술 항아리
조상들은 산을 오를 때 움푹 파여 물이 고여 있는 돌웅덩이를 보면 다람쥐가 도토리로 술을 담가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건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술의 제조
효모가 작용하여 알코올로 발효되어 만들어 지는 것이다.
①단발효식_참고자료 영화 ‘붉은 수수밭’
당분을 포함한 과즙을 발효시켜 만드는 것이 술을 제조하는 데 최초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포도를 으깨어 만드는 포도주가 이 경우에 포함된다.
②누룩(복발효식)_참고자료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누룩 만드는 법
누룩은 밀을 굵게 갈아 반죽하여 띄운 것으로 술을 만들 때 발효제로 사용된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에 처음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술의 제조에 사용되기 때문에 누룩은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다.
③증류
1차 발효된 양조주를 다시 증류시켜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방법이다. 저장을 통해 숙성하여 그 풍미를 높일 수 있는 브랜디부터 저장하지 않지만 유통기한이 없는 진까지 어떤 양조주를 증류하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많다.
④혼성
증류주나 양조주에 인공 향료나 약초 또는 초근목피 등의 휘발성 향유를 첨가하고 설탕이나 꿀 등으로 감미롭게 만든다. 우리나라 매실주, 인삼주가 이것에 포함된다.
◉술의 분류
주류
=양조주
-단발효식-와인, cider 샴페인
-복발효식-맥주, 청주, 약주, 탁주 등.
=증류주
-곡물원료 -소주, 고량주, 위스키, 보드카 등.
-당밀원료 -럼, 데킬라 등.
-과실원료 -브랜디, 칼바도스 등.
-향유첨가 -진 등.
=혼성주
-liqueur
-bitters
-vermouth
-합성청주
◉우리나라 술
우리나라 술의 시작은 정확하게 추정하기가 어렵다. 최초로 우리나라 역사에 술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건국사가 실린 [고 삼국사기]이다. 하지만 술의 종류나 이미 정착되어 있는 술 문화와 관련한 기록을 보았을 때 술이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①역사 속의 술
삼국시대
우리나라 구체적인 술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이다. 삼국 형성기 때 이미 술 문화가 형성되어 제천, 영고 동맹들의 국가적 행사에서 즐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시대에 고구려는 누룩을 이용해 술을 빚는 방법이 널리 퍼졌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 때는 보다 발전한 형태인 약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조선시대
술을 사랑했던 우리민족은 오랜 세월 조상 대대로 가문과 집안마다의 고유한 비법으로 대물림 해 온 가양주(家釀酒: 집에서 빚은 술)를 빚었다. 이런 가양주의 종류는 조선시대 말기에는 이미 700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가양주가 유명세를 타면서 마을과 향리의 술로 이름을 얻게 되었고, 지역적 특성과 산물을 반영한 토속주로 정착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1907년 조선총독부는 주세법 공포하여 술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자가 주조를 전면적으로 금지했고 이로 인해 밀주가 성행하자 주류단속 강화하고 모든 주류를 탁주, 약주, 소주로 통일 획일화 시켰다, 이때부터 다채롭고 화려했던 우리 술 문화는 제조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 재래식 누룩 사용법에서 일본식 제조법을 사용하게 하면서 한국 전통주는 대부분 맥이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탁주의 원형은 비교적 그대로 유지되었다.
현대
일제강점기 단절되었던 전통주는 88올림픽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외국에 전통문화를 알리는데 전통주를 내세운 것이다 .이에 일제강점기 때 금지된 전통주에 대한 허가가 나고 사라졌던 전통주들을 복원, 재현되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전통주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며, 많은 기업들이 와인이나 브랜디처럼 전통주의 가치를 브랜드 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②술의 발전
소주
소주는 기원전 3천년 경 서아시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는 몽골인이 페르시아의 이슬람교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증류방식에 의한 술을 함께 들어온 것이라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유입되었다. 당시 소주는 순수한 곡식으로 만들어 맛이 특이하고 독한데다 뒤끝이 깨끗해 인기가 높았으나 값이 비싸 귀족들의 술이었다. 그러다 조선 말 일제강점기에 많은 전통주가 소멸되고 소주가 다량으로 생산되면서 막걸리를 대신해 서민에게 보편화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시절 소주 값을 경직시키면서 서민들이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현재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담은 대표적인 술이 되었다.
맥주
맥주는 인류최초의 술로 최조로 제조된 것은 함무라비 왕조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5000년으로 추정된다. 이런 맥주는 구한말 1876년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초기에는 일본맥주만이 유입되어 일본인이나 상류층이 주로 마시며 소비량이 증가했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1930년 한국이 중국 침범을 위한 일본의 병참 기지가 되면서 맥주공장도 설립되며 맥주가 대중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 전까지는 탁주에 비해 맥주의 자리는 매주 협소했다. 1980년 이후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고 맥주는 점차 사람들안에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막걸리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로, 빛깔이 쌀뜨물처럼 희고 탁하며, 도수는 6∼7도 정도로 알코올 성분이 적은 술이다. 막 걸러 먹었다 하여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려시대부터 즐겨 먹었고 수많은 전통주를 낳았다. 일제강점기 조세법으로 그 위상이 많이 떨어졌으나 언제나 우리의 삶과 함께 그 명맥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해외에 한국 전통주로서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있다. 맛이나 선호에 비해 유통기한이 짧다는 단점이 있어 보안점이 강구되고 있다.
청주
쌀, 누룩, 물을 원료로 하여 빚어낸 술이다. 삼국시대에 보리형제 스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청주는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 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막걸리와 달리 맑은 술로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귀하고 비싼 술로 여겨져 제사상에 많이 올라갔던 술이다.
대부분 청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일본주는 고급화 이미지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비싼 일본 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청주의 그 뿌리는 우리나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③주막
술과 밥을 팔며 나그네를 머물게 했던 집이다. 주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신라시대 경주에 있는 천관의 술집에 대한 기록이 주막의 시초로 여겨진다. 주막은 문짝에 ‘주(酒)’자를 써 붙이거나 창호지를 바른 등, 지붕위에 올려놓은 용수를 단 장대 혹은 삶은 소머리나 돼지머리를 좌판에 늘어놓아 주막임을 나타냈다. 주막은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술집과 식당,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주막은 단순한 식당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어서 정보의 구심지가 되기도 했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면서 문화가 전달되는 곳이기도 했다. 3.1운동 때 그 정보의 전달 역할을 했던 것도 주막이었다. 요즘은 규모가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평면구성의 특징이 각광받으면서 건축학적인 의미로 주목 받고 있다.
*예천 삼강주막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134호)
-예전 모습과 복원된 모습 사진
④금주령
큰 가뭄이 들거나 흉작, 기근 등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국가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500년 동안 금주령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유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민족의 주식인 쌀로 술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법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허용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는데 국가의 제사의 사신접대, 상왕에 대한 공상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 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였다. 또한 술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빈민들의 양조 행위는 묵인해주기도 하였다.
이규보의 시, ‘청주와 이 밥을 못먹게 한다는 말을 듣고’ 동국이상국집 1권에 수록
장안에 호화롭게 잘 사는 집엔
보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도다
구슬같이 흰 입쌀밥을
말이나 개가 먹기도 하고
기름같이 맛있는 청주를
아이종들도 마음대로 마시누나
이것이야 모두 다 농사꾼이 이룩한 것
그들이야 본디 무엇이 있었으
농민의 피땀을 빨아 모아선
제 팔자 부자가 되었다 하네
힘들여 농사지어 군자를 봉양하니
그들을 일컬어 농부라 하네
노동할 때 아니라면
어느 누가 이들에게 좋은 음식 먹여줄까
목적은 힘을 취하기 위해서지
이들의 입을 아껴서가 아니라오
구슬같이 희디흰 이밥과
맑디맑은 청주는 바로 농사꾼이 만든 것이라
그들이 먹는 것을 하늘인들 허물하랴
⑤술과 흥취
음주가무
飮 마실 음 酒 술 주 歌 노래 가 舞 춤출 무,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행위.
한국인은 예로부터 음주가무가 능한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춤과 술이 함께한 것은 부족사회에 제천 행사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품앗이, 두레와 같은 공동 노동을 할 때도 음주가무를 통해 힘을 내고 공동체의 결합을 도모했다.
포석정- 유상곡수의 아름다움
신라 시대 임금의 별궁에 만들어진 수로였다 .돌로 구불구불한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고 그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게 만든 것으로서, 신라귀족들은 이 물줄기의 둘레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또한 술잔의 크기 술의 양에 따라 물을 타고 내려오는 모양이나 시간이 달랐는데 이는 술과 풍유 흥취를 같이 느꼈던 신라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풍유와 사치를 즐기던 곳이었으니 신라 55대 경애왕이 견훤의 칩략을 받아 자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치욕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