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물 위에 떠있는 황혼의 종이배 말없이 거니는 해변의 여인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빛에 물들은 여인의 눈동자 조용히 들려오는 조개들의 옛이야기 말없이 바라보는 해변의 여인아
2.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빛에 물들은 여인의 눈동자 조용히 들려오는 조개들의 옛이야기 말없이 바라보는 해변의 여인아
언론 보도에 나타난 나훈아의 위대성(언론 보도 등 종합)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부산 초량동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권도, 권투, 야구 등 여러 가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가진 나훈아는 어릴때부터 여러 친구들의 대장노릇을 하기 일쑤였고 싸움도 잦았다. 나훈아는 겉보기에 건강하고 쾌활한 평범한 소년으로 보였지만 친한 친구들도 모르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노래가 부르고 싶었고 막연히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충만해 있었다.
66년 여름 나훈아는 성공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서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로서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배짱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서울에 도착한 첫날 그의 주머니 속엔 백 오십 환뿐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진 나훈아는 그 백오십 환으로 설렁탕 한 그릇을 먹었다. 그의 입맛에는 싱겁게만 느껴지는 설렁탕을 먹고 나자 그야말로 동전 한 푼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낯선 골목을 헤매었다.당시는 12시에 통행금지가 있었고 통금 사이렌이 울리자 잠잘 곳이 없었던 나훈아는 순찰차를 피해 다니면서 고민에 싸였다.서울에는 자신을 재워줄 만한 친척이나 친구가 하나도 없어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동대문 시장에 가서 한 쌀가게 앞에 쌓여있는 빈 가마니를 깔고 잠을 청했다.
한데에 잠을 자려 거칠은 가마니 위에 누웠을 때 눈물이 핑 돌만큼 서러웠다고 한다.그 뒤로 거의 석달동안 묵을 곳도 없이 서울을 떠돌아 다니던 그는 굶어서 얼굴이 퉁퉁 붓고 눈이 쏙 들어갈 지경이었다.온갖 고생을 하며 서울을 떠돌다가 우연히 오아시스레코드사라는 간판을 발견한 나훈아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으로 사장인 손진석에게 일자리를 청했다고 한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속마음을 감춘 그에게 손사장은 사환자리를 주었고 나훈아는회사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그의 사환생활이 2년째로 접어들던 68년 가을 즈음 나훈아는 드디어 가수의 꿈을 펼칠 기회를 잡게 된다. 장충동 레코드 녹음실에서 앨범 취입 때문에 오아시스레코드의 직원들과 전속 작곡가들이 모여 있었는데 정작 취입하기로 한 가수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회사 사람들이 녹음실에 따라갔던 나훈아에게 한번 해보라고 농담 섞인 권유를 해왔다. 나훈아는 못이기는 척 녹음실의 마이크 앞에 섰지만 그의 마음속은 너무도 기쁘고 흐뭇했다. 나훈아의 노래가 시작되자 녹음실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깜짝 놀란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은 즉석에서 오 케이 싸인을 보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그야말로 진흙속에서 다이야몬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만큼 나훈아의 노래실력은 뛰어났던 것이다. 결국 훗날 나훈아는 오아시스 레코드사라는 거대 기업을 먹여살리는 최고의 가수가 되었던 것이고 그의 이름은 항상 오아시스 레코드 회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간판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데뷔는 이처럼 우연하게 이루어졌던 것이고 이것이 훗날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당시 본명 최홍기란 이름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최훈'이라 예명을 지었다가 너무 흔한 이름 같아 ‘ 훈아(羅勳)’로 개명했다. 헌데 사람들이 “나훈아 나훈아“하고 부르면서 ‘ 나훈아(羅勳兒)’로 최종 결정을 했다.
위에서 대신 취입한 곡이 그러니까 정확하게 1968년 7월 사실상 데뷔곡 역할을 하고 있는 곡이 바로 “천리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계속적으로 인기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히트를 치는 순간 배호의 황금의 눈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실력있는 가수 나훈아는 여기에서 주저 앉지 않았던 것이다. 곧이어 나훈아의두 번째 노래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많은 신화를 남기게 되었고, 다음 「님그리워」는 녹음하기 사흘 전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연습한 나머지 막상 취입할 때는 목이 쉬어 고생스럽게 녹음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곡들이 연속 히트하면서 나훈아는 돈과 인기를 모으게 된다.
돌부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길 반겨주실 님을 찾아 강을 건너 천리길 캄캄한 밤하늘은 아픈 사연 울리는데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물어 물어 찾아 왔소 그님이 계시는 곳 차가운 밤바람만 몰아치는데 그님은 간 곳이 없네
이 노래들은 짧은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이지만 나훈아의 매력적인 음색과 신기에 가까운 구성진 창법으로 그야말로 순전히 노래 실력으로 히트한 노래였던 것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히트하자 나훈아는 그 동안 편지 한 통 쓰지 못했던 가족들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5년의 시간이 흘렀고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열 일곱의 소년 최홍기가 20대의 인기가수 나훈아로 변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은 처음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바로 밑의 누이동생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훈아는 누이동생에게 그 노래의 가수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누이동생은 나훈아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인기가수 나훈아가 자기의 오빠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자식인 줄로만 알던 나훈아를 보고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훈아는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는 나훈아를 일으켜 세우고 영양실조로 비틀거리는 그에게 당장 병원에 가자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라이벌 이야기를 하자 당시, 최대 라이벌이 될 남진은 이때 군 입대를 했다. 그 몇 개월 후 나훈아는 ‘님 그리워'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발표, 음반이 10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 단숨에 인기 가수로 떠올랐다. 당시 나훈아는 하루에 100여 통의 팬 레터를 받았다. 별난 우편물도 많았다. 대구의 한 여성 팬은 '장차 나훈아와의 사이에 날 아기의 기저귀에 옷'이라며 소포를 보내 왔다. 또 부산의 여성팬은 '만나주지 않으면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 버리겠다'며 협박 편지도 보냈다. 지방의 극장 공연에서는 늘 극성 여성 팬들에게 와이셔츠를 찢기고 손등을 할퀴더니, 심지어는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 봉변까지 겪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구극장과 시민회관 '워커힐 하니비쇼' 등 8개 극장 쇼에 줄 펑크를 내자 관계자들 사이에서 '안하무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다 '바보 같은 사나이'가 표절이란 이유로 잠시 방송 금지가 되면서 인기 행진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인기가수 조미미와 히트송 바꿔 부르기로 인기를 회복, 70년 11월 '두 줄기 눈물'로 다시 차트 정상에 올랐다. 또한 70년 12월 김화근 감독의 코미디 영화 '웃겨주시네'에 이어 71년 2월 영화 '폭풍을 몰고 온 사나이'에 출연해 연기 재능도 뽐냈다.
라이벌 남진이 군 제대로 복귀하자 정상의 가수였던 나훈아는 세기의 라이벌 시대를 맞았다. 최초의 '남진.나훈아 대결'은 71년 7월, 청계천의 국내 최대 살롱무대에서 시작되었다. 살롱측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대결 무대를 기획했다. 두 가수의 대결을 보기 위해 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남진의 불참으로 불발탄이 되었다. 세간에 화제가 되자 MBC TV 가요프로 '오색의 화원'에서 두 가수를 초대해 노래 바꿔 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이 프로그램을 기화로 두 청춘 가수의 세기의 라이벌 전은 본격화되었다. '나훈아가 판정승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남진은 시민회관 리사이틀무대로 승부를 걸었다. 9월 16일부터 나흘간 펼쳐졌던 '남진 귀국 리사이틀' 공연은 완전 매진이 되더니, 71년 최대 관객 기록을 세웠다. 이에 발끈한 나훈아는 곧 바로 응수했다. 10월 2일부터 3일간 '나훈아 리사이틀'을 열었다. 나훈아는 의상만 10여벌을 준비하고 '칼춤'에서 고고 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이면서 라이벌로서 유감없는 실력을 발휘해 주었던 것이다.
72년으로 들어서며 서로의 연예활동 하나 하나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훈아는 나이까지 남진과 비슷하게 올렸다. 이번에는 나훈아가 선전포고를 했다. 72년 2월 '나훈아의 꿈' 시민회관 공연. 트로트에 팝송, 통기타를 들고 나와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에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를 순서에 넣는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로 승부를 걸었다. 이에 11개의 영화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던 남진은 모든 영화 스케줄을 중단하고 김빼기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아이러니한 것은 연말 가요상때이다.
60년대 후반부에서 70년대 초반에 걸쳐 나훈아는 수많은 히트곡을 내면서 실질적인 음반판매량과 히트곡에 있어서 항상 남진을 앞질러 갔지만 연말 가요상 시상때만 되면 불운하게도 상복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것은 훗날 남진과 이미자에게 무려 세 번씩이나 가수왕의 영예를 안겨 주었던 모 방송국이 3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한 분야에서 최고의 가수에게 수여하는 명예의 전당 가수에 당당하게 나훈아를 선정한 것만 보아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며 더 이상의 언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훈아는 건강한 체력과 성악가로서 기초가 다져진 음악인으로서 뱃속에서부터 끄집어 내는 토속적 음색은 가히 천하일품이며 그 목소리의 폭과 깊이는 아직까지 견줄만한 가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절정 부분에서 묘하게 목소리를 뒤집고 꺽는 창법은 우리 전통가요의 참맛을 유감없이 전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가요의 맛과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으로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지난 추억이 되었지만 라이벌 나훈아와 남진의 관계는 80년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끝을 맺는다. 남진이 무대를 떠나 있는 반면, 나훈아는 지금까지도 히트곡을 내며 전통가요의 굵은 맥을 잇고 있다. 60년대말 70년대 초, 통기타와 청바지로 표상되는 청년문화의 거센 도전을 맞받아치면서 우리 전통가요의 우월성을 지켜냈던 마지막 최고의 거봉이었던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를 더해가면서 아직까지 현재진행형 가수로 활동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그에게 필적할만한 가수를 찾을 수 없다. 나훈아는 자작곡이 800여곡. 사랑, 잡초, 무시로, 갈무리, 내삶을눈물로 채워도 등도 그가 지어서 히트한 곡들이다. 트로트계에서는 보기 드문 싱어송 라이터다.
일본에서 <울긴 왜 울어>가 히트해서 수 십 만장의 앨범이 팔렸다고 한다. 나훈아의 음악적 성공은 대한민국 가요사 그 자체의 부흥이며 그의 음악적 그늘 밑에서 덕을 보는 사람만 해도 국내외에 수없이 많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