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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belisk (from Greek ὀβελίσκος - obeliskos, diminutive of ὀβελός - obelos, "spit, nail, pointed pillar") is a tall, four-sided, narrow tapering monument which ends in a pyramid-like shape at the top, and is said to resemble a petrified ray of the sun-disk. A pair of obelisks usually stood in front of a pylon. Ancient obelisks were often monolithic, whereas most modern obelisks are made of several stones and can have interior spaces.
The term stele (plural: stelae) is generally used for other monumental standing inscribed sculpted st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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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어 ‘테켄(tekhen)’이라 불린다. 이는 ‘보호’ 또는 ‘방어’란 뜻이다. 오벨리스크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 기둥이다. 맨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이다. 이는 피라미드를 높은 곳에 올려놓은 형상이다.
피라미드 자체가 태양신 라(Ra)의 상징이기 때문에 오벨리스크도 고대 이집트의 태양 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초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아부시르(Abusir)에 위치한 제5왕조(B.C. 2494~2345)의 태양신전 마당에 세워진 것으로 소규모의 사각뿔 탑이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라는 창조의 신으로서 카이로 북서쪽에 위치한 헬리오폴리스의 주신이기도 하다. 비록 오늘날 단 한 개의 오벨리스크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곳에 가장 많은 숫자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던 것으로 전한다.
정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는 해마다 7~9월 사이 나일강 홍수가 끝나고 난 후 약간 높은 지역에 처음으로 새싹이 돋아나는 원시언덕 벤벤(Benben)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피라미드 형상을 새김으로 창조의 원시언덕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 오벨리스크
제5왕조의 태양신전 마당에 사각뿔 형태로 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하나의 돌로 다듬은 최초의 오벨리스크는 제6왕조 테티(B.C. 2345~2323)의 것으로 고왕국 시대 수도인 멤피스의 왕실묘지 사카라에 세워졌다.
B.C. 2000년경 중왕국 시대에 들어와서 오벨리스크는 비로소 신전의 입구인 탑문(pylon) 좌우 양쪽에 한 쌍으로 대칭되게 세워졌다. 이때부터 신전 입구 탑문에 설치되었던 30여m 높이의 깃대와 함께 오벨리스크는 신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랜드 마크가 되었다.
현재 현장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는 헬리오폴리스에 세워진 센우스렛트 1세(B.C. 1965~1920)의 것이다. 높이가 20m에 달하며 무게는 120t으로 추정된다. 새겨진 비문을 통해 이 오벨리스크는 파라오의 즉위 30주년을 축하하는 세티 축제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신왕국 시대(B.C. 1550~1069)에 들어와서 전통적인 태양 숭배 도시인 헬리오폴리스 외에도 왕국의 수도였던 테베(룩소르)에 세워진 신전들 입구에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신왕국 시대의 첫 번째 오벨리스크는 툿트모세 1세(서기전 1504-1492)의 것으로 카르낙의 아문 신전의 제3, 제4탑문(pylon) 사이에 한 쌍이 세워졌다. 이 중 하나만 현장에 20m 높이로 남아있다.
비문을 통해 원래는 꼭대기의 피라미드 부분이 금과 은의 자연 상태의 합금인 일렉트룸으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아침에 해가 뜰 때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멀리서도 태양의 존재를 가장 이른 시각에 알려주는 자명종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툿트모세 1세의 딸이었던 하쳅숫트 여왕은 아버지가 세운 것 옆에 자신의 것을 세웠는데 29.5m 높이로써 그 무게는 323t 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왕 자신이 거룩한 다주실(多柱室) 앞에 아버지 아문-라를 위하여 일렉트룸으로 장식한 2개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그들은 하늘의 칼날처럼 세워졌고 태양처럼 두 땅을 밝혔다. 태초로부터 이와 같은 일은 없었다.”
툿트모세 3세 이후에 오벨리스크는 더 이상 카르낙의 아문 신전이 아닌 룩소르의 아문 신전과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또한 세티 1세가 건설한 하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인 피-람세스에도 신전 건설과 함께 많은 오벨리스크들이 세워졌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오벨리스크를 세운 파라오는 람세스 2세(B.C. 1279~1213)다. 정확한 전체 수량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토대로 본다면 적어도 10개 이상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 교황청 앞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와 같은 가늘고 긴 석재 기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돌이 필수다. 따라서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경우 예외 없이 매우 단단한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이집트의 화강암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강암인 쑥돌과 달리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또한 이집트의 전통적인 남쪽 경계인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주로 만든다.
이집트 대부분은 비교적 연한 석회암 지역인데 비해 아스완은 화강암 지역이다. 오랜 세월 나일강이 흐르면서 수많은 바위섬을 만들었다. 또한 급류를 형성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지나갈 수 없는 지역이다. 지금도 아스완의 고대 채석장은 돌을 잘라내기 위해 원하는 선을 따라 여러 개의 홈을 파고 나무 쐐기를 박아 넣은 흔적이 있다.
여기에 물을 부어 쐐기가 부풀리게 함으로써 원하는 돌을 잘라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현장에는 소위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남아 있는데 길이 41.7m이며 무게는 약 80t 정도다. 룩소르의 나일강 서안 데이르 엘-바흐 리에 있는 하쳅숫트 여왕의 장례 신전의 한 부조에는 약 400t 무게의 오벨리스크 2개를 싣고 나일 강을 항해하는 대형 선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오벨리스크는 현장에서 최종적으로 그 모양이 다듬어지고 비문이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세계 패권국 중심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지금까지 과연 이집트에는 모두 몇 개의 오벨리스크가 건설되었을까? 적어도 중국 시대 이후에 세워진 모든 신전의 입구에 2개씩 세워졌다고 가정해도 전체 신전의 숫자를 파악해 보면 오벨리스크의 숫자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카르낙 아문 대신전 같이 탑문이 10개나 되는 신전에는 훨씬 많은 오벨리스크가 세워졌기 때문에 숫자를 세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고대 이집트 신전들이 파괴된 이후 후시대 같은 장소에 새로운 신전이 재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현존하는 오벨리스크의 숫자는 특정한 장소에 제대로 세워진 것을 기준으로 한다. 이집트에 6개, 로마에 13개를 포함하여 이탈리아에 16개, 영국에 3개, 프랑스에 2개, 그리고 터키, 미국, 이스라엘에 각 1개씩 모두 30개에 달한다.
이집트의 타니스와 같이 쓰러져 토막 난 채 방치된 오벨리스크까지 모두 합하면 적어도 50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또한 로마의 경우 현존하는 13개 중 19세기 이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것도 포함되어 있어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오벨리스크가 로마의 땅 속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의 오벨리스크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로마 교황청의 라테란 광장에 세워진 것이다. 그 높이가 32.2m이며 이집트 카르낙의 아문 대신전의 하쳅숫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30m 높이보다 더 높다. 그중 높이가 10m 이하가 되는 작은 오벨리스크들은 대부분 서기전 1,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해외로 반출된 오벨리스크의 경우 처음부터 작게 만든 것도 있지만 원래 깨진 것의 윗부분만 다시 세운 경우도 있다.
이집트의 경우 원래 자리에 세워진 채로 오늘날까지 보존된 오벨리스크는 4개에 불과하다.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 입구에 세워졌던 센우스렛트 1세(B.C. 1965~1920)의 것, 룩소르의 아문 신전 입구 왼쪽의 람세스 2세(B.C. 1279~1213)의 것, 카르낙의 아문 대신전의 세번째, 네번째 탑문 사이에 세워진 툿트모세 1세(B.C. 1504~1492)의 것, 그리고 같은 신전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탑문 사이에 세워진 하쳅숫 여왕(B.C. 1479~1464)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원래 자리에서 옮겨 카이로 시내에 기념비적으로 세운 것이 2개가 있다. 모두 이집트 북부의 타니스에서 발굴된 것이다. 나일강 한 가운데 제지라 섬의 알-안달루스 정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1958년에 가져왔고, 카이로의 공항 입구에 세워진 것은 1984년에 가져왔다.
B.C. 1060년경 제 21왕조의 스멘데스는 타니스를 새로운 수도로 재건하면서 피-람세스에게 람세스 2세 시대의 오벨리스크들을 가져와 아문 신전에 배치하였다. 타니스에는 적어도 10개 이상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높이는 13~16m로 비교적 소규모이다.
식스투스 5세 때부터 바티칸 상징물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조직적으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이탈리아로 가져왔다. 이 중 13개가 로마에 자리 잡고 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다. 황제가 되기 이전 이미 서기전 31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그는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에 있던 2개의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가져와 해시계의 중심 기둥으로 사용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경우 직접 이집트의 아스완 채석장에 주문하여 자신의 오벨리스크를 제작하기도 했다. 황제들이 세운 로마의 오벨리스크는 대부분 전차 경주장이나 신전 앞 광장에 세워졌다. 서기 4세기 이후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지진 등으로 황폐해져서 일부는 넘어져 깨지거나 땅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로마 교황들은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의 상징이자 로마제국의 황제 권위를 자랑하던 오벨리스크를 재활용하여 기념교회들 앞 광장에 새롭게 세웠다.
나아가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꼭대기에는 청동제 십자가 조각을 덧붙였다. 바티칸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표면에 상형문자의 기록이 없어서 어느 파라오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집트 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칼리굴라 시대에 전차 경기장에 세워졌다가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에 의해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는 로마 외에도 피렌체, 우르비노, 사칠리아의 카타니아 등에 3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B.C. 390년경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카르낙의 아문 대신전에 세워져있던 툿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플의 전차 경기장(히포드롬)에 세웠다. 원래 30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두 동강이 나서 오늘날 윗부분 약 20m만 이스탄불의 옛 히포드롬 자리에 세워져 있다.
- 이집트 고대도시 테베의 눅소 신전 앞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해외 오벨리스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소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진 2개의 오벨리스크다. 각각 런던과 뉴욕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 오벨리스크는 B.C. 1세기 로마의 최고 실권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각각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실상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B.C. 51~30)와 전혀 상관이 없다.
원래 서기전 1450년경 툿트모세 3세가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 입구에 세운 것이다. 서기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2개의 오벨리스크는 알렉산드리아의 케사리움 신전 입구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819년 이집트의 통치자 메흐멧트 알리는 넬슨 제독의 알렉산드리아 승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중 하나를 영국에 선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수송비 부담에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즉각 실행에 옮겨지지 않다가 1877년 윌리엄 윌슨 경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수송 작업이 이루어졌다.
200t 가까이 되는 오벨리스크를 선박에 옮겨 싣는 것이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육지에서 길이 27.5m, 직경 4.5m 크기의 철제 실린더를 제작하여 오벨리스크에 씌운 다음 바다에 띄워 증기선으로 끌고 갔다. 1878년 8월에 현재의 위치인 런던의 템즈 강변에 세워졌다.
런던의 것과 짝을 이루었던 다른 하나의 오벨리스크는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서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가 미국에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당시 미국의 철도 갑부인 윌리엄 밴더빌트의 후원 하에 1880년 7월 뉴욕 항구에 도착하여 1881년 2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과 별도로 프랑스는 1829년 이집트의 통치자에게 룩소르 신전 입구에 서 있던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를 기증받아 1833년 루이-필립 왕에 의해 파리로 운반되어 콩코드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날 룩소르 신전 입구에는 왼쪽의 오벨리스크만이 외롭게 현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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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Washington Monument
The Washington Monument is an obelisk near the west end of the National Mall in Washington, D.C., built to commemorate the first U.S. president, General George Washington. The monument, made of marble, granite, and bluestone gneiss,[1] is both the world's tallest stone structure and the world's tallest obelisk, standing 555 feet 5+1⁄8 inches (169.294 m).[n 1] Taller monumental columns exist, but they are neither all stone nor true obelisks.[n 2]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began in 1848, but was halted from 1854 to 1877, and finally completed in 1884. The hiatus in construction happened because of co-option by the Know Nothing party, a lack of funds, and the intervention of the American Civil War. A difference in shading of the marble, visible approximately 150 feet (46 m) or 27% up, shows where construction was halted. Its original design was by Robert Mills, an architect of the 1840s, but his design was modified significantly when construction resumed. The cornerstone was laid on July 4, 1848; the capstone was set on December 6, 1884, and the completed monument was dedicated on February 21, 1885.[7] It officially opened October 9, 1888. Upon completion, it became the world's tallest structure, a title previously held by the Cologne Cathedral. The monument held this designation until 1889, when the Eiffel Tower was completed in Paris, France. The monument stands due east of the Reflecting Pool and the Lincoln Memorial.
The monument was damaged during the Virginia earthquake of August 23, 2011; it remains closed to the public indefinitely while the structure is assessed and repa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