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이권 싸움에 휘말린 조선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이즈음 세력 만회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공사관과 일본 거류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 해 5월 7일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민씨정권의 원병요청으로 5월 5일 이미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던 청나라와 일제의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렇게 되자 한반도가 청일 양국 군대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정부측은 5월 8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체결함으로써 군대 파병의 빌미를 제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며 내정개선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이를 명분으로 6월 21일 경복궁 쿠데타(갑오왜란)를 자행하여 친정 민씨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 갑오내각을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23일 아산만 풍도해안에 정박 중인 청나라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후 일제는 성환전투와 평양전투 등에서 청군을 연파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3월 23일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서 일제는 청나라에게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시킴으로써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을 일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제는 개항 이후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청나라와 벌여오던 각축전에서 일단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뿐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제가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 열도를 할양 받게 되면, 그 영향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앞지르게 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알려진 이들의 압력으로 일제는 결국 요동반도에 대한 할양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전개되어 가자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실각한 민씨정권의 핵심인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함으로써 재집권의 기회를 노렸다. 즉 이이제이 전략을 구상한 것이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매개로 진행된 이 계획이 크게 당황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였다.
명성황후 시해로 민족 분노 폭발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요동반도의 할양권 포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과 성토가 비등하였는데, 한국에서조차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날이면 정부의 붕괴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획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1895년 8월 20일 일제는 일본인 무뢰배들을 동원하여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뒤, 그 시신마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만행은 우리 민족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럼에도 일제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8도를 23부로 바꾼 뒤 친일파들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고, 양력 사용과 단발령을 강요하면서 우리나라를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 <출처: 국가보훈처>
경북 영해 의진 중군장으로 활동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1896년 19세의 나이로 그 동안 사귀어온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선생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이 경주를 거쳐 이 해 7월 초 영덕방면으로 이동해오자 이들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즉 7월 5일 선생의 영해 의진은 김하락 의진과 연합하고, 7월 9일 유시연의 안동 의진과도 합세하여 대규모의 연합 의진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 연합 의진은 김하락 의병장의 주도 아래 영덕관아를 공격해 계획을 수립하고, 7월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하였으므로, 선생과 김하락 의병장 등은 연합 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김하락 의병장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역량을 키워갔다. 이후 선생은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로 지사, 의사 등을 찾아 다니며 구국 방안을 논의하고 재기 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이 가운데는 허위의 제자로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박상진,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군대해산 직후 원주 진위대 장병들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하였던 민긍호 등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