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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숙,『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2005
소개: 박은숙의 <갑신정변 연구>는 갑신정변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꼭 봐야할 만큼 중요한 연구이다. 이전에도 다양한 갑신정변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갑신정변의 구체적 상황과 갑신정변 참여층의 사상에 대해 제대로 접근한 연구는 박은숙의 이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박은숙은 갑신정변의 전체적 모습을 조망하려고 했는데, 특히 그중에서 참여층의 사상에 접근하려고 했다. 참여층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주류들 뿐 아니라, 갑신정변에 참여한 그들의 하인, 무관들, 궁녀 및 내시, 보부상들 등도 있었다. 이와같은 이들이 무슨 동기로 갑신정변에 참여했는지를 밝히려고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요약문을 참고하기 바라며, 더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은 해당 책에서 확인하시기를 기대한다.
요약: 박은숙,『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2005
머리말
머리말에서 저자는 지금까지 갑신정변에 대한연구와 평가는 많았으나, 대부분 한정된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정령 14개조에 대한 분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즉, 실증적 연구 없이 연구자의 성향에 따른 극단적인 평가가 난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위해 갑신정변 참여층의 개화사상에 대한 이해와 수용 그리고 요구 등을 검토하고, 정령 14개조에 대한 분석하며, 국가적 독립과 반봉건 근대화를 어떻게 달성하려했는지도 검토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일어난 변혁운동인 갑신정변의 내용과 성격,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어서 저자는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갑신정변의 사상적 배경, 정령에 나타난 개혁방안의 내용 그리고 정변의 실패요인과 성격 규명에 집중되었음을 짚으면서, 이를 주제별로 검토하고 있다.
첫째, 갑신정변의 요인인 개화사상에 대한 기존연구를 검토하고 있다. 먼저 개화사상 자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들이 개화사상을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으로 보는 반면에 일부에서는 개화사상을 과연 사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개화사상의 형성에 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의 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내인론(內因論)의 입장과 명치유신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며, 조선 내부의 사상적 흐름에서는 돌출된 것이라는 외인론(外因論)의 입장이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정변주도 세력은 서구화, 근대화의 논리가 있으나 맹목적이지는 않았고, 명치유신을 교조적으로 적용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이 논쟁은 개화사상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연구와 정령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정변에 동원된 무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개화당의 무력이 보잘것없어서 승산이 없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1천명이 넘는 무력이 동원되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기존 연구 대부분이 정변이전에 확보한 무력만 다루었는데, 이는 정변 이후에 왕명으로 동원한 무력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무력의 문제는 숫자보다 각 군영의 장악여부, 정변지지 여부, 무기의 질적수준, 병사들의 정서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저자는 정령 14개조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 대해 연구들이 서로 심한 편차가 나타나면서도 구체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치체제에 대한 13,14조는 입헌제, 대의제와 연결하여 보는 연구와 신권중심의 정치운영이라는 배타적 논의구조로 보는 연구가 있다. 저자는 이런 논란을 권력의 실세인 ‘의정소’와 정변때 단행한 인사 그리고 정령의 다른 조항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경제관련 조항에 대해서는 근대적 조세제도, 상업 개혁안이라는 시각, 수구파의 경제적 특권 박탈이라는 시각, 전세징수방법 변화에 불과하다는 시각 등이 있다. 저자는 각 조항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갑신정변의 부르주아적 성격여부와 자본주의 지향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사회개혁구상에 대해서는 양반신분제 폐지와 만민평등권의 실현이라는 시각과 이런 평가에 보다 신중하자는 시각, 그리고 개화파는 우민(愚民)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민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을 것이라는 견해 등이 존재한다. 저자는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 주장의 이면에 개입된 현실적인 의도, 문벌의 정치적 성격 등에 주안점을 두면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넷째, 갑신정변의 성격과 평가에 매우 상반된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자주독립의 시도이며, 국민주권주의 지향의 정치개혁운동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한 정권 쟁탈전이나 소수 개화파 관료의 궁정 구데타 혹은 조선 근대화에 지장을 초래한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전자의 시각은 갑신정변을 혁명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전제되며, 후자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론적 인식이 개입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위와 같은 연구사 정리를 바탕으로 참여층, 민중의 인식과 대응, 각 사회세력의 정변에 대한 태도와 입장, 세대간 갈등과 시각차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갑신정변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하여 그 내용과 지향, 역사적 위치를 밝히고자 한다.
저자는 자료에 대해 기존의 연구에서 기초자료로 인용되어온 회고록들이 정변 당시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근거로는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이는 보조자료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저자는『윤치호일기』, 『추안국급안』 등의 자료와 『승정원일기』,『일성록』,『고종실록』등의 자료 그리고 외교자료, 회고록, 정변 관련자들의 상소문 등을 참고하였다.
제1부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성장과 정치·외교적 입장
1장 정변주도세력의 사상적 변화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변화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응론의 하나가 개화사상이었다. 1880년 『조선책략』, 『이언』 등의 책들을 가지고 돌아온 김홍집의 귀국이후 서구 기술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증가되었는데, 이는 주로 동도서기론적 입장이었다. 이런 흐름은 1881년 신사척사운동이라는 반작용에 부딪쳤다. 그러나 임오군란이후 위정척사운동이 약화되면서 이후 개화사상은 더욱 확산, 발전되어 갔다.
그런데 동도서기론이 주류를 이루던 개화사상의 흐름이 임오군란이후 변법개화론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1882년 후반기에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점진적 개혁을 취하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이었으며, ‘중흥의 기회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3년 후반 이후부터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개화’를 목표로 설정하였고, 개화의 노선도 동도서기론이 아닌 ‘實開化’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 ‘실개화’가 당시의 정치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이에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구상을 실천하려 하였다.
2장 개화정책의 추진과 정변 주도세력의 형성
개화 정치세력은 1880년 이후 실시된 개화정책의 추진으로 이들 세력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갖춰지면서 형성되어 갔다. 특히 통리기무아문은 개화세력이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의 역할을 했으며, 이 기구를 통해 정치적 위상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임오군란 이전에는 정국이 개화세력과 수구세력의 대립이 주된 대립구도였기 때문에 개화세력내의 분화와 대립은 표출되지 않았고, 민겸호가 별기군의 훈련방식으로 일본식을 채택한 것처럼 청·일에 대한 관계가 고착화된 것도 아니었다. 이후 임오군란을 통해 정국이 변화하여, 수구세력이 약해지고 개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개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민씨 척족이 주관하는 청국식 개화정책에 대해 서구식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화당세력이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는 곧 개화정치세력이 민씨 척족과 개화당으로 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당오전 발행, 차관문제, 군사제도 개편 등 여러 지점에서 충돌했다. 고종은 민씨 척족에 저항하는 개화당세력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을 등에 업은 민씨척족과 고종이 지원하는 개화당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성장과 결집이 일어나게 되었다.
3장 정변 주도세력의 대청 인식과 정치적 결집
조청관계는 원래 의례적인 속방체제 속에서 청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는 형식이었으며, 청은 조선이 개항한 이후에도 서구세력으로 일본을 제압한다는 소극적 개입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이후 청은 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 외교적 간섭과 경제적 침탈을 심화시켜나갔다. 일본은 개항초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다가, 임오군란을 통해 민중이 격렬한 반일감정을 표출하자,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소극적 정책을 썼다. 그 후 청불전쟁이 격화되자 1884년 9월경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적극적 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미국 공사와 영국 영사에게도 정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관심했고, 영국은 청의 종주권 주장을 지원하는 입장이었기에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개화당세력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압력이 심해지자, 이런 조청관계가 “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것이라고 보았고, 성공적인 근대화를 위해서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즉, 독립을 통해 완전한 자주국을 이루어 서양 제국과 동렬에 서는 것을 원했다. 이는 동도서기론자들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한편, 개화당세력은 일본과 서구의 침략적의도에 대해서는 이를 인지하면서도 일단 그들의 문물, 제도를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곧, 협조와 이용의 대상으로 여겼기에 일본과 서구의 침략적 속성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개화당의 개화정책은 친청파에 의해 방해받고 있었으며, ‘이범진 사건’, 묄렌도르프 해임 건 등에서 친청파와 대립했다. 특히, 청의 간섭과 침탈은 개화당 뿐만 아니라 고종의 반감을 불러와서 고종이 개화당을 지원하는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외교정책을 통해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국체를 의도한 반면, 개화당은 정변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독립과 자주를 이룩하려고 했다. 또한, 반청 독립이라는 구호는 개화당이 정변의 대의명분이면서, 동시에 자파 세력의 결집과 행동대원의 동원에 활용되었다.
4장 정변주도세력의 활동과 정치적 위기론
저자는 갑신정변 직전에 개화당이 위기에 처해있었다는 일반적인식과 다르게 갑신정변 이전에 고위직을 차지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정변 주도세력은 정변때까지 고위직으로서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는 임오군란 이전에 비해서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또한, 이들이 정변 직전에 딱히 위기 상황에 처해있지도 않았으며, 고종의 지지와 배려를 받으면서 민씨 척족의 공격 속에서도 성장해가고 있었다. 물론, 민씨 척족의 공격은 개화당이 고종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수록 더욱 집요해져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위기감은 개화당과 민씨 척족모두 느끼는 것이었으므로, 개화당의 일방적인 수세가 아니라 팽팽한 긴장관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당시 고종은 청과의 관계유지를 위해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한 친청파를 중용하면서도 개화당을 정치 세력으로 키우면서 이들의 긴장관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에 개화당은 고종을 의심 많고, 유약한 군주로 여기면서 ‘독립’과 ‘개화’를 위해서는 고종만을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2부 갑신정변의 결정과 추진
1장 정변의 결정과 거사일 확정
개화파가 쿠데타적 방법으로 정변을 계획한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외유기간을 표로 정리하여, 이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던 때가 1884년 4월 이후임을 보였다. 또한, 1884년 5월초까지는 개화당 세력이 민영익과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았으며, 1884년 4월에 청군이 일부 철수하고, 6월경에 청불전쟁에서의 전황이 전달되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정황들을 미루어 볼때 쿠데타적 정변을 개화당이 구상한 때는 6월경이며, 이는 당시의 대내외적인 정세속에서 개화당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개화당이 정변을 계획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력을 확보하고, 무기와 자본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개화당은 친군 전영의 군사조직을 확보해나가면서 동시에 일본인을 고용하려 했는데, 일본이 1884년 9월에 적극적인 대 조선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일본군을 동원하고자 했다. 일본군의 동원은 청군의 정변개입을 견제하는 측면이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 거사 후 개혁에 필요한 자금도 일본 공사는 ‘수삼백만 원’규모의 차관을 마련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대내적문제는 개화당의 자율에 맡겨졌다. 오히려 개화당은 일본 정부의 우편선이 도착하기 전에 정변을 시도함으로써 일본 측의 태도변화에 끌려다니지 않고, 일본의 적극적 조선정책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변 이후 개혁자금은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이 가능했으나, 정변을 위한 소요자금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 자금은 주로 정변 주도세력의 사비로 충당된 것으로 보인다.
2장 정변 주도세력의 참여층 포섭
개화당의 포섭대상은 가장 먼저 정변을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개화당은 고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환관과 관료들을 포섭했으며, 개화당에 대한 반대파인 민씨척족의 동태를 파악해 줄 수 있는 양홍재 같은 이들을 포섭했다. 또한, 정변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인 청군에 대한 정보제공자들도 포섭했다. 이외에도 사관생도들을 통해 지방의 움직임을 탐문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개화당은 무력을 동원할 수 있거나, 무력으로 이용될 수 있는 사람들을 포섭했다. 이들은 곧 사관생도, 친군 전영(前營) 소속의 군인들 그리고 장사(壯士)들이 있었다. 또한, 정변 주도세력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하인, 형제, 친척들이 포섭되었다. 그런데 포섭대상은 대부분 서울 사람이 중심이었고, 이는 정변의 비밀을 유지하게 해주었으나, 정변의 지지기반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여층의 포섭방법은 조직을 이용하거나,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통해서 였는데 조직의 경우 새로 만들기보다 기존의 조직을 이용했다. 저자가 무인들의 단체로 추정하는 충의계와 친군 전영, 부상(負商)조직 등이 포섭에 활용된 조직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교육을 통해 사상적 동조를 이끌어 내거나, 의형제를 맺는 경우, ‘관직’을 매개로 한 현실적 보상책을 제시했다. 이때 정변 주도세력은 민족적 자존심을 가극하거나, 반청정서를 이용하기도 했다.
정변 주도세력은 목숨을 건 정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보상을 제시했지만, 동시에 합당한 명분과 당위성을 제시해야 했다. 이때 쓰인 대의명분으로 태평, 爲國(나라를 위해), 衛國(나라를 지키기 위해) 등의 구호를 제시했는데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을 명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충군의식이 아닌 애국의 관점이 주로 강조되고 있었다. 또한, ‘완고당’을 제거함으로써 개화’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곧, 개화와 독립은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이자, 행동대원들을 끌어들이는 설득력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개화는 민중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독립도 청에 대한 독립을 주장하는 개화당과 달리 민중에게는 일본의 침략적 행위가 더 큰 분노의 대상이었다. 곧 ’벌왜(伐倭)‘야 말로 민중을 끌어모으는 확실한 구호였는데, 이는 정변 주도세력의 구호와는 달랐다.
3장 무력 동원의 규모와 장악력
정변의 주도세력은 앞서 이야기한 포섭방법을 이용하여 대체로 다섯 개의 경로를 통해 정변이전에 무력을 포섭하여 정변에 동원했다. 이들은 곧 사관생도(14명), 전영 소속 군인들(70여명), 부상들(100여명), 장사들(30여명), 일본군(120-150명) 등이었으며, 이들의 총합은 대략 300-400명 정도였다. 한편, 정변 이튿날에 정변 주도세력은 박영효를 前後營使에, 서광범을 左右營使에 임명하여 4영의 군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4영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4영의 병력은 3천여명에 달했기에 청군1500여명보다 많았으나, 문제의 관건은 4영의 장악여부, 정변 지지 여부, 무기의 질적 수준, 병사들의 자세 등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전후영에 대해서는 영사 이외의 후속인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변에 적대적일 가능성이 클 좌우영에 대해서는 영사 이외의 후속인사를 하지 않았다. 한편, 전후영은 무기도 우수하지 못하여, 무기를 분해, 소제 하던중에 공격을 받아 빈손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정변 주도세력은 좌우영군에 대한 회유와 포섭을 등한히 하여 이들이 청군과 결탁하게 했고, 정변을 지지하는 전후영군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자체의 무력보다 일본군의 무력에 지나치게 의존했기에 무력의 측면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4장 갑신정변의 진행과 개혁인사의 단행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 17일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0월 19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기에 진행된 시간은 46시간 정도로서 만 이틀이 채 안되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에 개화파는 권력장악, 인사단행, 정령반포까지 하였다. 이를 재구성해보면, 먼저 10월 17일 저녁 9시경 우정국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별궁 옆 초가에 방화하여 혼란한 틈을 타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원래 계획되었던 4영사의 처단은 실패했다. 이어 김옥균등이 고종을 깨워 창덕궁 서쪽의 경우궁으로 이어하게 했으며,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동원하게 하였다. 곧, 정변 주도세력이 동원한 무력이 고종을 호위하게 되었다. 자정이 지나자 경우궁으로 3영사와 민씨 척족들이 왔으나, 처단되어, 개화파가 제거하고자 했던 권력의 핵심 실세들이 제거되었다. 이어서 개화파는 4영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경우궁 주변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미국 공사, 영국 영사 등을 호위해와 김옥균과 면담하게 하였다. 이어 인사를 단행하여 새벽에 발행하는 조보에 실어 10월 18일 아침에 인사 내용을 알려지게 하였다. 외국공사들은 정변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날 오후에는 민중들이 거리의 여론을 형성해가면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일본공사는 김옥균등과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창덕궁으로의 이어를 결정여 폭력적 권한을 행사했다. 다음날인 10월 19일 아침경 정령이 반포되었고, 청군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각 영의 무기를 정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군의 위협이 증대되자 일본 공사는 철군의사를 내비쳤으며, 무기가 정비중인 도중에 청군이 공격해와 전후영군은 맨손으로 도망치고, 좌우영군은 청군에 합류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에 개화파는 고종을 인천으로 이어하려 했으나, 고종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결국 개화파와 일본 공사는 모두 철수하였다. 홍영식, 박영교, 사관생도들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과 좌우영군인들에게 살해당했으며, 개화파는 오후7시 30분 즈음에 일본 공사관으로 철수 했다. 이어 23일에 개화파는 일본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개화파는 정변 이튿날인 10월 18일에 정권을 구성하기 위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는데, 이 인사는 개화파 정권의 인물 구성과 권력 운영 구상, 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척도다. 그런데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보면 인사내용에 종실과 왕실 외척으로서의 관계를 명기하고 있다. 이는 곧 왕실과의 관련성이 인사의 중요한 척도였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의 말미에 ‘민씨 일파에게 쭈그리고 지내던 자’를 임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민세력의 규합에 초점을 맞춘 인사였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갑신정변의 인사를 부분별, 정치세력별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53명의 인사중에 개화파 소속이 29명이어서 전체의 54.7%이지만, 사관생도, 행동대원 등 정치적 역할을 하기 어려운 인사를 제외하면 9명에 불과하여 정치세력으로 볼 때 개화파가 소수였음을 지적한다. 개화파는 주로 군권과 치안권 그리고 재정과 외교 분야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고, 형조판서로서 개화파인 윤웅렬을 임명했다. 이는 당시 개화파가 군권과 치안권 장악, 재정확보, 외교문제 그리고 반대파의 처리 등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다음으로 왕실의 종친과 외척이 12명으로 22.6%의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는 대원군 계열의 정치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이들의 비중은 클 뿐만 아니라, 비중있는 자리에 임명된 것이기도 했다. 의정부계열의 인물은 9명으로 17%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민씨 척족이나 민씨 척족이 주도하는 내아문, 외아문에 깊이 연결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 외에 동도서기론 계열의 개화세력은 김윤식, 김홍집, 신기선 등이 핵심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자리는 아닌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승지 등에 임명되었다. 이 인사를 통해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왕실과 관련된 세력, 의정부 세력 등과 연대하여 연합정권을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인사를 통해 갑신정변 내각의 연령이 주로 20-30대이며, 이는 20-30대의 개혁적 세대가 갑신정변의 주도층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기득권층의 반격에 대비가 소홀했고, 좌우영군의 이탈을 방조하는 등의 결정적인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인사의 내용으로 볼 때 안동김씨 등의 기존의 세도가문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점은 문벌을 폐지하겠다는 정변의 정령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실, 외척의 인사가 많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벌가문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갑신정변 내각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3부 갑신정변 참여층의 근대화 이해와 신분·직업
1장 참여층의 개화사상 이해와 갑신정변 인식
대부분 민중계급에 속했던 갑신정변의 참여층은 참여층은 성리학적 사상체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기득권이 없어서 더 혁명적일 수 있었다. 또한 기득권이 없어 더 혁명적일 수 있었고, 신분질서 해소와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개화는 참여층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컸다. 이런점들을 들어 저자는 참여층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주장한다. 곧, 참여층이 개화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민중과 같은 계급적 기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변에 반대한 다수 민중과 다르게 정변에 참여해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참여층이 개화사상을 수용한 계기는 먼저 개화사상이 보급, 확대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들 수 있다. 또 다른 계기는 정변 주도층의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어 사관생도들은 일본 체류시에 7일에 한번씩 김옥균이 찾아가서 교육하였다. 다른 계기로는 외국문물을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유학생, 혹은 주인을 따라 갔던 하인층의 상당수가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그중 일부가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참여층이 이해하고 수용한 개화사상의 내용은 초기에는 군사기술, 양잠, 영어, 우두, 화약 등 실사구시적 시무론의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 참여층은 원래 시무를 익혀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무론적 입장에 섰던 참여층들은 인본에서의 근대교육과 김옥균 등으로부터 독립과 개화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변화를 일으켰다. 참여층은 이에 따라 국가적 과제로서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완고당과는 다른 실개화를 국가적 과제로서 이해했고, 정변을 통해 이런 과제를 해결할 정치적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인식은 주도세력의 인식과 거의 같은 것인데, 이에 대해 저자는 저자가 참고한 『추안급국안』과 같은 공초중심의 자료가 갖는 한계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참여층의 갑신정변에 대한 인식과 입장은 그들의 행동양상과 그들이 정변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참여층은 갑신정변이 기존의 지배질서를 뒤집어 바꾸는 혁명적인 변혁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개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한 것, 혹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것, 또는 ‘좋은 관직’을 얻게될 수 있는 것 등으로 바라 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좋은 관직을 얻기위해서라면 고변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안전한 길이었으므로 단순히 좋은 관직을 얻기위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참여층은 자신들이 참여하는 갑신정변이 ‘흉역’으로 몰릴 수 있으며, 참여한 자신이 ‘역적’이 되어 죽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층 중 한 사람도 고변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원하여 정변에 동참하였다.
2장 참여층의 신분과 정변 참여 동기
조선시대 신분은 양반-중인-양인-천인의 4개층으로 분류되었는데, 조선 후기의 어느시점부터 양반-중인-상한(常漢)의 3개 신분 구분법이 적용되기 시작하여, 고종때에도 이것이 적용되었다. 중인은 기술직 중인과 행정직 중인을 포괄하며, 상한은 대체로 양반과 중인을 제외한 피지배계층으로 전통적인 농·공·상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저자는 이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혈통과 가계, 그리고 직업과 같은 현실적 여건을 토대로 참여층의 신분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저자는 이런 분류를 통해 총 77명의 참여층 중에 양반은 10명으로 13%, 중인은 5명으로 6%, 상한은 39명으로 51%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머지 23명(30%)은 불명이나, 저자는 대부분 상한일 것으로 추정하여 참여층에서 상한이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60-70%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결과는 초기 근대화 단계의 주역과 갑신정변 참여층을 모두 중인으로 바라봤던 기존의 통설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중인이 봉건권력과의 공생관계를 형성하였기에 사회개혁세력으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며, 오히려 부를 소유한 상한의 상층이 근대화에 더 의욕적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신분별 구성과 정변 참여 동기를 검토하고 있다. 먼저 양반은 명문가 위주의 주도층과는 다르게 대부분 하층양반이 참여층에 포진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행동대원의 동원과 지휘, 고종과 민씨 척족의 동태 보고, 정전 시위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양반 참여층의 참여 동기는 조선사회 내에서 최고의 가치인 관직을 얻기위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양반층에 포함되면서도 관직의 상층으로 승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관직뿐만 아니라, 주도층과 같은 사상적 경향을 가졌던 것도 동기의 하나일 것이다. 중인 참여층은 소수에 불과한데, 이는 실제 조선사회내에서 중인층이 소수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중인 참여층은 변수와 유대치를 제외하고는 그리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참여 동기 역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변에 참여한 변수와 유대치를 제외하고는 불명확했다. 실제로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라고 주장한 중인 참여자도 있었다. 한편, 상한 참여층은 사관생도, 군인, 부상, 환관 등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상당수는 일본에 갔다온 경험이 있었다. 이들은 행동대원의 포섭·동원, 각종 정보의 제공과 연락, 행동대원의 지휘 혹은 행동대원으로서의 참여 등 크고 작은 일들을 맡아 처리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상한 참여층은 상당히 높은 관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참여동기는 좋은 관직을 얻어 출세하거나, 개화의 세상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거나, 간신을 제거하여 나라의 태평을 이루기 위한 것 이외에도 상관의 명령, 공갈과 협박 등에 의해 참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합해 볼 때, 상한 참여층의 상당수는 개화의 세상을 희망했으며, 개화정권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기를 원했다.
3장 참여층의 직업별 구성
개항 이후 서울의 직업구조는 상업·유통인구의 확대, 개화정책의 추진 등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틀 내에 있었다. 참여층의 직업별 비중은 상인, 문반관료, 환관과 궁녀 등이 참여하고 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군인, 무관, 하인층이 2/3 이상이었다. 이는 당시 서울의 다양한 직업군에 비해서 매우 제한적인 직업구성이었고, 이는 일반 민중의 직업구성과도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런 차이는 참여층들이 개화와 외세, 정변에 대한 입장에서 민중과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 요인이었다. 또, 참여층의 직업은 봉건권력과 연관되어 있어, 갑신정변이 새로운 신흥계급과 연결되었다기보다 봉건권력내의 불만세력과 연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참여층의 직업적 현실은 정령에 반영되었다. 특히 주로 참여했던 전영의 군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정령에 나온 군제개편에서 전영 중심의 군제개편을 암시함으로써 정령에 삽입되었다. 또한, 참여한 문무관료들은 출세하기 어려운 입장이었기에 출세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정변의 인사에서 고위 무관층으로의 임명과 정령에 인재등용 주장에 삽입되었다. 하인층은 대부분 노비가 아닌 고용인들이었는데 열악한 급여나 대우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하인 참여자들은 정변 주도층과의 관계가 깊었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어 정변을 적극 지지했다. 이들의 지지에 대해 정변 주도층은 관직을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실제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인민평등을 전제로 한 인재등용의 구체적인 실천의지이자, 하인 참여자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부상 참여층에 대한 반대급부로 부상 이창규에게 관직을 주기도 했으며, 정령에 혜상공국 혁파를 넣어 정부주도의 특권상업체제가 아닌 근대적 상업체제를 지향했다. 한편으로 혜상공국의 혁파는 민씨척족의 수족이 된 혜상공국을 폐지하고자하는 의도도 있었다. 환관과 궁녀의 참여는 정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내시부의 폐지와 동시에 ‘우수한 재능’을 지닌 내시를 등용하겠다는 주장을 정령에 삽입하였다. 곧, 갑신정변 참여층이 직업인으로서 갖는 현실적 입장은 개혁방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정령에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4장 참여층의 나이와 거주지
참여층의 나이는 대다수가 20-30대에 속하고 있었으며, 이는 갑신정변 참여층에서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 갑신정변은 20-30대의 양반 관료층이 주도하고 20-30대의 참여층이 공조하여 일으킨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젊은세대가 갖는 개혁석 성향이 개화사상을 이해, 수용하고 변혁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한 요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참여층의 거주지는 인구가 많은 서부에는 한 명도 없고, 오히려 인구 비중이 약했던 동부와 북부에 많았다. 이는 당시 서울에 동부에 군인이 많이 살고, 북부에 양반집이 많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참여층의 직업 대부분 군인 혹은 하인이었던 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거주 분포는 서울 거주 일반민중과는 차이가 있었다. 곧, 참여층의 거주지는 대부분 개항 이후 변화의 흐름에서 소외된 지역민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부 정령의 개혁 구상과 특성
1장 정령의 검토
정령 14개조는 『갑신일록』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신용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다른 연구들을 통해 『갑신일록』에 나오는 정령들이 믿을 만하며, 다른 자료에 나오는 정령의 내용들은 이 14개조 정령의 내용을 보완하는 것으로 정리된 바 있다. 정령은 10월 19일 아침 10시경 반포된 것으로 보이나, 관료들과 민중들에게 알려졌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정령의 수는 서재필의 회고에 의하면 80여 조목에 이르는 데, 『갑신일록』에 실린 14개 정령은 김옥균이 약록(略錄)한 것이다. 정령의 배치순서는 명분과 상징성이 강한 조항을 앞에 두어 정변의 정당성을 강조하려 했다. 이어서 구체적인 개혁인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동시에 정변 주도세력이 가장 중요시 했을 군사, 재정, 정치 분야의 핵심적 개혁과제는 뒷부분에 배치하여 그들의 의도가 완연히 드러나는 것을 경계했다.
2장 대원군 배환과 조공 폐지 주장의 정치, 외교적 의도
정령 제 1조는 대원군의 배환과 조공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청과의 외교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면서 동시에 대원군의 정치적 상징성과 역량을 인정한 것이었다. 당시 개화파는 대원군을 보수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으나, 그 보수성이 개화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상당히 평가하고 있었으며, 대원군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화에 대한 입장은 서로 상반되지만, 당시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개화파는 대원군의 배환을 주장했는데, 이는 국내적으로 대원군 세력을 포함하여 반청, 반민(反閔)세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대원군을 지지하는 민중으로부터 정변에 대한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외적으로는 독립국가로서의 대의명분을 세우는 상징성을 얻고자 했다. 조공폐지 주장은 조공제도를 축으로 삼아 식민지적 속방으로 전환시키려는 청의 야욕에 맞서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청은 임오군란이후 군대를 주둔시킨 상태에서 조선의 내치와 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개화파는 이런 상태를 패국(敗國)의 길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개화파에게 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자주국을 수립하는 것이 조선의 급무(急務)로 여겨졌다. 따라서 정령 1조는 대원군 세력의 규합과 민중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서구제국들과 동렬에 서는’ 근대적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3장 의정부 중심의 정치체제와 권력 운영 구상
정변을 통해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려고 했던 개화파는 국가권력의 장악과 유지, 그리고 그 국가권력을 담아낼 정치체제와 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갑신정변 당시의 정치체제는 전통적인 의정부·육조체제와 내·외아문체제로 이원화 되어 있었다. 이런 이원화는 각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관계를 불러왔으며, 정부 조직의 운영과 정책추진의 효율성에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반해, 서구의 입헌정체에 대해서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언젠가는 입헌정체를 시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개화파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이런 입헌정체가 인민들이 ‘국가의 치란과 득실의 연유를 안 다음에’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고,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당장 시행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일본 역시 갑자기 입헌정체를 실시하지 않고 먼저 인민을 교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개화파는 조선의 이원화된 봉건적 정치체제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고, 서구의 입헌정체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고 있었으나, 당시에 곧바로 시행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이에 개화파는 정령14조를 통해 이원적인 정부를 의정부·육조 중심으로 단일화 하려 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되어 왔던 의정부세력과의 연대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개화파의 이와 같은 정체 구상은 조선 고유의 법제를 바탕으로 근대적 운영방식을 접목시키는 방식으로서 당시 개파화의 근대화 방안을 엿볼 수 있다.
정령 13조에 나온 ‘의정소’는 지금껏 없던 조직인데, 그 위치가 ‘합문 안’이어서 의정부와는 다른 것이었다. 의정소의 위치와 역할을 고려하여, 저자는 의정소가 당시의 비상시국에서 비상대권을 부여받은 권력실세들의 회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수파였던 개화파가 비상대권을 가지고 국가권력을 주도할 수 있는 의결기구이었다는 것이다.
개화파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서구의 입헌정체를 이상적 정치체제로 보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태정관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군주독치에 익숙해 있기에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저자는 개화파의 권력 운영 방안이 태정관제도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령13조의 의정소에서 활동하는 대신, 참찬들은 국가권력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셈이었다. 이러한 의정소에서 정국을 운영할 대신, 참찬의 구성은 개화파가 중심이 되고, 대원군과 관련된 종친들이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인선은 고종을 배제한 체 개화파가 결정한 것이었으며, 이는 고종이 정변 주도세력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대신, 참찬 중심의 권력 운영 구상은 개화파의 개혁 구상인 왕실의 정치 개입 차단, 근대적 조세·재정책 실현, 인민평등권 적용 등으로 세도정치나, 전제정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개화파의 개혁구상과 함께 이들이 서구 입헌체제를 이상적으로 생각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와 같은 권력운영구상은 근대적 입헌 정체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