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24일 화요일]
『대동야승』 제9권 [해동야언 Ⅲ] <기묘사화 명현 열전>
○ 응교 기준(奇遵)이 하루는 금직(禁直)하는 데, 꿈에 관외(關外)에 여행하며 고생스러운 길을 걸었다. 객 중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읊기를,
이역의 강산은 고국과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가에 눈물지며 외로운 배에 의지하네 / 天涯垂淚倚孤篷
구름은 막막한데 하관이 닫혀 있고 / 頑雲漠漠河關閉
고목은 쓸쓸한데 성곽은 비어있네 / 古木蕭蕭城郭空
들길은 가을 풀속에 가늘게 나뉘었고 / 野路細分秋草裏
인가는 저녁볕에 많이도 모여 있네 / 人家多在夕陽中
가는 돛 만리 길에 돌아오는 배가 없으니 / 征帆萬里無回棹
푸른 바다 아득하여 소식을 못 통하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였는데, 홀연히 깨어서 꿈의 글을 벽에 써서 부쳤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년 당화(黨禍)에 연좌되어 호서(湖西)로 귀양갔다가 다시 북방 병방 지역 온성(穩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도중(道中)에서 보는 풍경이 모두 시(詩)에 있는 것과 같아 말을 잡고 읊으면서 슬프게 울먹이니, 종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온성에 이르자 곧 사약(死藥)이 내렸으니, 사람의 일이 미리 정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사림(士林)들이 전송(傳誦)하며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덕양유고(德陽遺稿)》를 상고해 보면, 이 시는 꿈을 깬 뒤에 꿈속에서 본 바를 기록한 것이오, 꿈속에서 지은 것이 아니다. 사재는 응교와 동시대인데도 기록한 내용에 잘못이 있으니,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랴.
○ 승지 한충(韓忠)은 기개가 호방(豪放)하여 일찍이 문학에 이름이 있었고, 음률과 거문고 타기에 능하였다. 계유년에 과거에 장원하였고, 홍문관 제학으로 주청검찰관(奏請檢察官)에 보충되어 북경에 갔는데, 점을 잘 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고, 통역관을 시켜 평생의 길흉을 물었더니 점쟁이가 점을 쳐보고 다만 장두체(藏頭體 시의 한 격식) 율시(律詩) 하나를 써주었다. 그 시에,
소년 때의 재예는 천마에 의지하여 / 少年才藝倚天摩
손으로 용천검을 잡고 몇해나 갈았던고 / 手把龍泉幾歲磨
돌 위에 오동나무 거문고로 소리내니 / 石上梧桐將發響
음속의 율려에 때로 화답하도다 / 音中律呂有時和
입으로는 삼대의 시서 교화를 전하고 / 口傳三代詩書敎
문학은 천추의 도덕 물결을 일으켰도다 / 文起千秋道德波
가죽 폐백으로 현사의 값을 이룩했는데 / 皮幣已成賢士價
가생(한 나라 가의)만은 어찌하여 장사로 귀양갔던고 / 賈生何獨謫長沙
하였는데, 돌아오는 즉시 당화에 연좌되어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또 옥중에서 매맞아 죽었으므로 평생의 전후가 이처럼 시(詩)와 같았으니, 또한 매우 이상하도다.
○ 김태암(金泰巖)은 보은(報恩)의 품관(品官)이다. 학문은 하지 않았지만 기상이 커서 김원충(金元沖 김정) 제공들과 함께 벗하고 좋아하였다. 조정에 천거하여 찰방(察訪)이 되었다가 뒤에 물러나 시골에 살았다. 좌랑 구수복(具壽福)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곳이 없어 보은 산간에 거닐며 놀았는데, 태암이 집 한 채와 전토 수십 경(頃)을 주어 살게 하여 좌랑의 부인과 그 세 아들이 지금까지 편히 살았으므로 한 지방에서 의사(義士)라고 일컫는다.
○ 김윤종(金允宗)은 정승 김상식(金相湜)의 훌륭한 제자이다. 이 까닭으로 역시 기묘사화에 참여하게 되어 북쪽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죽었다. 처음 공이 화가 일어남을 듣고 북장사(北丈寺)에 와 있었는데, 하루는 밤중에 피하여 속리산으로 들어갔더니, 많은 군사들이 뒤를 따라와 마침내 체포되었다. 종이 울면서 음식을 올리니 말하기를, “나는 장차 죽을 사람이지만 울지 않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우느냐.” 하고 드디어 조용히 밥을 먹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다.
○ 태의(太醫) 박세거(朴世擧)는 기묘사화의 사류(士類)들과 종유하며 매우 지조가 있었고, 효직(孝直 조광조) 공을 정성껏 섬겼다. 기묘년 후에도 명절에는 반드시 문안하고, 외객(外客)이나 형제들이 병이 나면 극력 구호하여 밤중이라도 찾아가 보았다.
그 집 행랑이 짚으로 덮였으나 해마다 고쳐 덮지 못하여 곧 썩어 무너지려고 하자, 역시 자기의 비용으로 와서 제조(瓦署提調)에게 얻어다가 기와로 덮었으니, 세상에 드문 선비인데 애석하다. 천도가 무심하여 가업(家業)을 전할 아들이 없고, 또 남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패망하게 되었으니 통탄을 견딜 수 있으랴.
○ 기묘년 변란에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실상 그 일을 주장하였다. 승지와 사관(史官)을 피하여 후원(後園) 북쪽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 비밀리 아뢰어 옥사를 일으켰다. 그 뒤에 나이가 어린 무리들이 불평자들을 모아 임금의 측근자를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계속 일어나 목을 나란히 하여 죽임에 나아갔으나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니, 지정이 속으로 위태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매일 어두운 밤에 미복(微服)으로 몰래 다니면서 다른 집으로 번갈아 옮겨 자고, 새벽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일년여 동안 하다가 일이 없어지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