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의 역사 지리 9. 탕춘대성[홍지문]의 축성
출처 : 서울 六百年史
탕춘대성의 축성
이상과 같이 숙종 41년까지 축성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숙종 44년(1718) 12월 영중추부사 이유가 숙종에게 보고하기를
「탕춘대 성역은 지금부터 20일 후면 완료할 것 같습니다. 처음의 계획은 토성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축성하는 곳에 잡석이 많이 있어 토성보다 석성을 쌓는 것이 오히려 쉬우므로 석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러나 탕춘대성 동쪽은 도성의 주맥(主脈)이므로 지사에게 문의하여 도성의 주맥을 파고 하지 않도록 토성을 쌓겠습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숙종 44년(1718)에는 탕춘대성 축성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었고 인왕산 북쪽 창의문 서쪽의 탕춘대성이 시작되는 곳에는 토성으로 축성하고 그 외는 석성으로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성이 숙종 37년(1711)에 완성된 후 숙종은 그의 41년에 다시 북한산성과 평창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 아래에 성을 쌓았다. 즉 비봉 아래부터 산줄기를 타고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조지동(造紙洞)의 계곡인 사천을 가로질러 다시 산을 타고 인왕산 성벽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는 성벽을 쌓았다. 이를 가리켜 서성 혹은 탕춘대성이라고 부른다.」
「조선 태조 5년에 축성된 서울 성곽과 숙종 37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의 방위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41년에 한북문(漢北門) 수문과 함께 일부 익성을 축성하였고 숙종 44년에는 탕춘대성의 축성과 더불어 성내에 연무장으로 연융대(鍊戎臺, 현 세검정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선혜청 창고, 상 · 하 평창 등 중요한 군사시설과 군량창고를 설치하였다.」
라고 하여 익성의 일부를 숙종 41년에 축조하고 탕춘대성은 숙종 44년 축조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익성에 대해서는 숙종 39년 지돈녕 김진규가 탕춘대에 창고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또 익성을 축조할 것을 논의하여 축성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를 결정하자고 건의하자, 숙종은 현임대신과 원임대신들이 나가서 축성의 가당여부를 살펴보라고 하였고, 그 후 경연석상에서 이이명(李蓬命)이 익성을 쌓을 수는 있으나 지키기가 어려우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하자, 숙종은 창고만 짓고 축성은 그만두라고 하명하였다.
숙종 44년 11월 8일 경리청(經理廳)에서 보고하기를
「탕춘대 서변의 축성역을 중지한 데 대해서 이미 전일에 보고드린 바 있습니다만 축성을 시작한 것은 윤8월 26일이며 축성공사를 정지한 것은 10월 6일이므로 축성기간은 40여 일이며 성 전체의 길이는 총 2,200여 보(步)인데 완성된 성이 반 정도이며 완성되지 못한 곳이 반 정도인데 명년 봄에 완성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숙종 45년(1719) 2월 판중추부사 김우항은
「탕춘대성을 이미 서변에서부터 쌓기 시작하였으나 중지하고 도성을 견고히 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지키는 것이 옳겠습니다.」
라고 하여 탕춘대 축성을 반대하였으나 세자는 이미 대묘(大廟)에 축성을 고하였으므로 중지할 수 없다고 하였고 동지사(同知事) 윤취상(尹就商)도 북한산성도 지키기 어려운데 탕춘대성을 또 쌓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세자는 역시 같은 대답을 하여 탕춘대성을 계속 축조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 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이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이에 앞서 숙종 30년에 도성을 수축할 때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의 오군영에서 담당하였으며, 숙종 37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문에서 담당하였던 것을 보면, 탕춘대성 축성도 군문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탕춘대성을 축조하는 데는 많은 찬 · 반론이 있었고 공사가 거의 완성될 때까지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국가 유사시에는 도성이나 북한산성도 지키기 어려운데 탕춘대성까지 축성하여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반대를 물리치고 약 4km에 달하는 탕춘대성을 축성한 것은, 국가 유사시에 북한산성을 수비하려면 탕춘대 일대애 창고를 짓고 군량을 저장해야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탕춘대성을 축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체성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홍지문(弘智門)
홍지문은 숙종 45년(1719)에 탕춘대성을 축조하면서 건축한 탕춘대성문이다. 현재 홍지동 산4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았으므로 공식적인 명칭을 홍지문이라고 하였다.
홍지문은 숙종 45년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 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 년 간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가 1977년 서울 특별시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웅장하게 복원하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홍지문 북쪽으로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칸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