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혁 청년회 전국연합회 교육훈련위원장
지금 시대의 우리(청년)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고등교육을 마친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우릴 받아줄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합니다. 이것은 지금뿐만 아니라 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를 친구로 대하지 못하고 경쟁자로 생각해왔습니다. 그 친구 아니 경쟁자를 밟고 일어서야 우리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고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우린 언제나 낮은 점수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리곤 그 점수에 맞춰 그 다음 상황을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한 곳.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의 교회는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 안에서는 경쟁보다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경쟁을 쉬고 편안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사회)와 교회는 그렇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가 경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청년,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교인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경쟁적 자본주의가 교회까지 침투한 것입니다. 교인의 수가 수만 명을 넘어가는 교회가 생겼고 반대로 변두리에 있는 교회는 무너져 갔습니다. 사람이 모이다보니 사람들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어야할 교회가 목회자 중심으로 혹은 교인 중심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200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인의 수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몇은 한국 개신교의 위기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공격적인 전도방법, 폐쇄적인 구조, 타협을 거부하는 모습 등 여러 가지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이유가 다 맞다’고 할 순 없지만 일반 사회와 다르지 않은 모습 속에서 우리가 자유롭긴 힘들어 보입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의 목회자나 어르신들은 입버릇처럼 ‘청년들이 교회의 미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칭찬을 들은 것처럼 가슴을 쫙 펴고 사명감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랬나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들었을 때가 바로 청년들이 교회 행사를 위해서 수고하고 난 뒤였든지 아니면 청년들이 큰 행사를 마치고 났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우리는 교회의 봉사 자원이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단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교회에서 청년들의 역할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봉사하는 분야는 성가대, 교회학교 교사, 찬양단, 청년회 임원 등 많습니다. 그럼 모든 신도들도 봉사한다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맡겨지는 부분을 생각해 볼 때 청년들에게 부과된 봉사는 상당한 수준에 이릅니다. 그 상당한 봉사가 청년들의 자체모임을 힘들게 합니다. 대부분은 그 문제를 신앙으로 돌립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든지, 봉사를 일로 생각한다든지’라는 말로. 교회 구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 사명감을 강요하는 말이나 맛있는 거나 사먹으라면서 돈을 주십니다. 그럼 청년들을 뒤돌아섭니다.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갑니다. 시쳇말로 청년은 애가 아닙니다. 알 것은 알 나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언제나 청년은 약자입니다. 목회자의 말을 들어야하고 어르신들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점점 대화는 단절됩니다. 하나 둘 청년은 지쳐가고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사역지를 통해 교회를 옮길 수 있습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우리입니다. 목회자가 올 때마다 목회의 방향은 거의 바뀌며 우리는 이에 아무 반대 없이 따릅니다. 우리는 거기서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설령 목소리를 낼 수 있다하더라도 교회의 구조는 우리가 참으로 참여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만을 위한 그들의 교회입니다. 또, 조금 있으면 목회자가 바뀝니다. 그럼 또 다시 문제는 시작됩니다. 문제는 ‘왜 우리는 참아야하는가’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신도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모든 교회의 음식은 여신도가 담당합니다. 여신도가 아닌 다른 신도가 하는 일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왜 청년은 참고 기다려야하는가’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글 첫머리에서도 얘기했지만 널리 퍼진 지교회 중심주의는 심각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을 마다할 신도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 교회 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연합 활동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연합 활동은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한 다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교회가 부흥되고 성장하면 연합 활동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교회가 기획합니다. 그리고선 우리들을 부릅니다. 연합은 없고 독자적인 행동만 있습니다. 연합의 의미를 아무리 강조하고 좋은 점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연합 활동은 교회에 해가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목회자들도 계십니다. 그 분들도 노회 활동을 하시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엔 좋은 게 있으면 나눠 먹어야한다’는 뜻의 좋은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게 있으면 혼자 먹는 지교회가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사회의 모범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내 비리가 끊이지 않으며 목회자나 신도들의 추문들도 들립니다. 개신교인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회의 개혁을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티와 들보의 얘기가 바로 여기에 적절할 듯싶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개혁을 외치기 전에 우리 안의 들보를 생각해야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TV가 나온 뒤에 사람들은 생각하기가 싫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TV가 주기 때문입니다. 영화 ‘올드 보이’에서 오대수가 15년이나 사설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TV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예배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모든 기준이 교인들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이 원하는 설교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자신의 목회방향에 맞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목회자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말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는 순한 어린 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청년회의 화두는 해외단기선교입니다. 그것도 제3세계로 갑니다. 대부분의 선교는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올 때의 모습과 많이 흡사합니다. 우리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문화와의 대화는 없습니다. 설령 다른 문화를 이해하더라도 이는 이해할 게 아니라 바꿔 주어야할 대상입니다. 이런 추세를 볼 때 외국의 한 정치지도자가 생각납니다. 그는 자국의 혼란기를 잠재우고 그들 내부의 시선을 나라 밖으로 옮기기 위해 전쟁을 꿈꾸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우리만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가는 해외선교는 우리가 당했던 그 뼈아픈 과거(우리 문화 파괴, 이분법적 선악 구분)를 그들에게 심어주게 될 것입니다.
이에 청년회는 교육이라는 좋은 매개를 가지고 청년들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두 가지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전국 사도학교입니다. 사도학교는 청년회에서 매년 기획하는 프로그램으로 지역 연합회의 일꾼과 전국 연합회의 일꾼이 모여 이 땅의 진정한 사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참여자들이 스스로 커리큘럼을 결정하고 모든 실무는 전국 연합회에서 담당합니다. 요즘 같이 복잡하고 혼란한 시대에 청년들은 더욱 쉽게 사회에 물들어 갑니다. 사회와 구분됨이 없는 기독청년들. 어느새 우리는 사회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우리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를 바로세우고 청년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공유하려 합니다. 전국 사도학교는 물론 지역 연합회 일꾼들과 전국 연합회 일꾼을 중심으로 운영되지만 지역 연합회의 회원들도 얼마든지 참여가 가능하기에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 내용(안) - 2007년 9월에 시작하려고 합니다.
1강 : 기장, 기청의 역사.
2강 : 성서로 본 기청의 정체성.
3강 : 성서로 본 기청의 비전.
4강 : 현재에 대한 반성과 미래의 지향점.
5강 : 효과적인 대화기법.
6강 : 조직 진단과 그 해법.
7강 : 이 시대의 평화 이해하기.
8강 : 이 시대의 생명 이해하기.
9강 : 사도학교 마무리 겸 모꼬지.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지역 성서학당입니다. 지교회에서도 성서공부를 하지만 지교회에서 하지 못하는 차별화된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지교회에서 열심히 성서 공부한 청년들도 함께 하고 지교회에서 함께하지 못하지만 연합회와 함께 할 수 있는 청년들을 모읍니다. 되도록 노회에 소속된 목회자를 중심으로 성서학당을 꾸릴 예정입니다. 끊임없이 노회와 연합회가 소통되게 하고 연합의 이름을 부여할 계획입니다. 지교회에서 속 시원히 풀지 못하는 궁금증도 성서학당에 오면 자유롭게 나눌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지역 성서학당은 지역 연합회의 회원을 중심으로 그들이 신앙위에 바로 서게 도와줄 것이며 미래의 지역 연합회의 일꾼으로 세우는데 그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노회와 연합회가 소통하는 것처럼 지역 성서학당과 지교회도 계속 소통할 것입니다. 지역 성서학당은 지교회와 유리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 내용(안) - 2007년 6월에 시작하려고 합니다.
- 노회와 협의하여 학당지기를 잘 세울 수 있도록 한다.
- 전국연합회 신학위원회와 연계해서 올해 청년회에서 발행하는 교재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 교육훈련위원회는 각 지역 연합회와 연계하여 성서학당을 알리고 사람을 모으는 데 주력한다.
- 예상대로 여러 지역에서 성서학당이 꾸려진다면 하루 정도 날을 잡아서 전체적인 성서학당의 워크숍을 하는 것을 제안한다.
- 교육훈련위원회는 학당지기와 성서학당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 성서학당의 큰 틀의 성서학당 커리큘럼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결정은 학당지기와 성서학당에 참여하는 청년이 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복음 10:34)
청년회의 역할은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끊임없이 바뀌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깨어있는 청년들이 교회를 바꾸고 깨어있는 사람들이 사회와 나라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있기 위해선 끊임없이 깨지고 세워져야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굳은 신앙과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 땅위에 오셨을 때 우리는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