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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네 가지 업
Kamma-catukka
'업(業)'³⁹⁷⁾이라는 용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깜마(kamma, Sk. karma)는 √kṛ(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영어에서 do 동사의 의미가 아주 광범위하게 행위 일반을 나타내듯이 산스끄리뜨 등 인도어 일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깜마(까르마)는 따라서 광범위한 행위 일반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슨 행위든 그것을 모두 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 한다. 초기경에서 업은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한다. 의도로써 몸과 말과 마노로 업을 짓는다."(A6:63 §11)라고 설명되는데... 이 말씀은 업을 정의하는 인용문으로 많이 알려진 구문이다.
³⁹⁷⁾ '업'에 대해서는 먼저 본서 제2장 §2의 해설 4(의도)의 ②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담마상가니』 제1권 해제 '4-(3) 업(kamma)은 89가지 마음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도 참조할 것.
유익한 마음 or 해로운 마음에 있는 의도, 그것이 업이 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 229)
② 한편 니까야에서 업은 "비구들이여, 의도(cetanā)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하고(cetayitvā) 몸과 말과 마노로 업을 짓는다."라고 설명되는데... 이 말씀은 업을 정의하는 인용문으로 많이 알려진 구문이다. 이처럼 업은 의도로 정의된다. 그래서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그러면 무엇이 업(kamma)인가?" 라고 질문을 한 뒤 "㉠ 의도(cetanā)와 ㉡ 의도와 결합된 어떤 법들"(DhsA.88)이라고 업을 정의한다.
...그리고 ㉡의 보기로는... "간탐, 악의, 그릇된 견해, 간탐 없음, 악의 없음, 바른 견해라는 이 여섯과 더불어서 의도와 결합된 법들을 알아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DhsA.89)
그러므로 업(kamma)을 종합적으로 정의해보면 업은 유익한 의도(kusala-cetanā)나 해로운 의도(akusala-cetanā), 그리고 이러한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cetanāsampayutta-dhammā)이고 이러한 업은 12연기의 두 번째인 [업]형성[행, saṅkhāra], 즉 업형성의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 Vis.XVII.46)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대상을 얻는 행위의 성취를 위해서 작용하고', '관련된 마음부수들을 대상에 대해서 활동하도록 묶는' 의도(cetanā)는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보로 나타난 마음과 작용만 하는 마음에도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경우에 일어나는 의도는 업이라고 부를 수 없다. 과보로 나타난 마음은 업의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고 작용만 하는 마음은 말 그대로 업과 과보와 관계가 없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서들은 의도도 유익한 의도, 해로운 의도, 과보로 나타난 의도, 작용만 하는 의도의 넷으로 구분을 하고(ā.ii.274) 이 가운데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만을 업이라고 설명한다. 인식과정에서 보면 이 두 가지 의도는 속행(速行, javana)에서만 일어난다...
[청정도론 XIV]: "135. 의도한다(cetayati)고 해서 의도(cetanā)라고 한다. 묶는다(abhisandahati)는 뜻이다. 이것은 의도하는 성질을 특징으로 한다. 격려하는 역할을 한다.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상수제자와 대목수처럼 자기의 일과 남의 일을 성취한다. 급한 일을 기억하는 것 등에 대해 관련된 법들을 실행하게 하는 성질에 의해서 이것은 분명하다."
아비상카라와 관련해서는 이 글을 참고할 수 있겠다.
아비상카라에서 '아비(abhi)'는 ‘더 높은’ 또는 ‘더 강한’의 뜻이라고 한다.
뛰어난, 수승한 법을 의미하는 아비담마(Abhidhamma)의 단어 구성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위 글에 따르면 상카라와 아비상카라는 구분되는데, 아윗짜(avijjā, 무명)가 함께 하는 상카라(sankhāra)인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만이 재생연결의 과정을 이끈다고 한다.
삶의 과정에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카라(sankhāra)를 축적하는 것이다.
그 행위가 탐함, 성냄, 어리석음으로 행해질 때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한 상카라)가 된다.
탐, 진, 치로 오염된 행위를 아비상카라라고 할 수 있겠다.
형색, 소리, 맛 등의 감각 대상을 경험하는 마음을 더 많이 일으켜 즐기기 시작할 때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한 상카라)가 된다.
이로써 윤회의 수레바퀴가 구르게 된다.
아라한 성자도 살아가기 위해 상카라(sankhāra)를 축적한다. 숨쉬는 것도 까야 상카라(kāya sankhāra, 신행)이다.
그러나 아라한 성자는 보거나 들은 것 등에 집착하여 형성된 ‘구르는 과정’을 멈추었다.
그 상카라(sankhāra)가 강하게 될 때, 그것들은 재생연결(윤회)으로 이끌 수 있는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한 상카라)로 불린다.
(Vis.XVII.44-47)
44. 그것을 의지하여(paṭicca) 결과가 오기(eti) 때문에 조건(paccaya)이라 한다. '의지하여'라는 것은 그것이 없이는 안된다, 무시하지 않고라는 뜻이다. 온다(eti)는 것은 일어난다, 생긴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도와준다는 것(upakāraka)이 조건의 뜻이다.
아윗자(무명)가 바로 빳짜야(조건)이기 때문에 아윗자빳짜야(무명을 조건으로)라 한다. 그러므로 '무명(avijjā)을 조건으로(paccayā)'라고 했다. 형성된 것을 계속 형성한다(abhisaṅkharonti)고 해서 상카라들이라 한다. 이것은 두 가지이다. 즉 ㉮ 무명을 조건으로 한 상카라들과 ㉯ 상카라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온 상카라들이다.
이 가운데서 ㉮ 무명을 조건으로 한 상카라들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 흔들림 없는 행위(āneñja-abhisaṅkhāra)의 세 가지와 몸의 상카라, 말의 상카라, 마음의 상카라의 세 가지 - 이 여섯 가지이다. 이들은 모두 세간적인 유익함과 해로움(선, 불선)의 의도(cetanā)일 뿐이다.
뿐나는 도덕적인, 아뿐나는 부도덕한, 아넨자는 높은 선정(= 무색계 선정)에 드는 것을 각각 의미한다.
아비상카라는 재생연결을 일으키는 강한 상카라이므로, 이 3가지 아비상카라는 삼계 31개 세상에 각각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
아뿐나비상카라는 4악도에,
뿐나비상카라는 인간과 욕계 천상, 색계 천상의 23가지 세상에,
아넨자비상카라는 무색계 천상 4가지 세상에 각각 재생연결을 이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넨자(āneñja)는 원래 ‘더 이상 재탄생하지 않고’ 그래서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 무색계 영역에서는 무한한 수명을 가지며 그곳에 태어나는 것을 ‘궁극적 해탈’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수많은 대겁 동안 지속하는 지극히 오랜 기간을 지낼 수 있지만, 그곳에서도 한정된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셨다.
모든 아비상카라는 31가지 모든 세상의 실제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모르는 무지로 행한 것이므로 재생연결을 이끈다.
그러나 열반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전략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멈추고 뿐나비상카라, 즉 선업 공덕을 지어야 한다.
다만 선업을 짓는 것, 도덕적인 행위, 공덕행을 할 때는 되도록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 좋다.
공덕행에 대한 보답을 바라는 마음은 ‘탐함’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좋은 행위는 그에 따른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만, 물질적인 것이나 선정의 즐거움을 바라게 되면 공덕이 적은 ‘지혜 없는 도덕적 마음'으로 바뀌거나 부도덕한 아뿐나비상카라(apunna-ābhisankhāra)까지 바뀔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지혜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한 글에서는 '현상의 참 성품을 이해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필자는 이를 칠청정의 3번째 청정인 '견해의 청정'에서 시작되는 '여실지견', '정신과 물질을 한정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yathābhūta-ñāṇadassana)으로 이해한다.
청정도론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상카라와 아비상카라의 관계와 비슷한 업과 업의 길의 관계에 대한 담마상가니의 주해도 살펴보자.
(담마상가니 제2권 P.286)
...그러면 업의 길(업도, kamma-patha)은 무엇인가? 주석서들은 업의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처나 악처로 인도하는 길이 되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DA.iii.1048)
"유익하거나 해로운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것을 업의 길이라 부른다."(PsA.i.301)
"여기서 업의 길이란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업들이 발생하는 입구기 되는 길을 말한다."(PdṬ.226)
이를 종합하면 업의 길(kamma-patha)의 가장 큰 특징은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것(paṭisandhi-janaka)'이다.
업의 과보를 낳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재생연결(paṭisandhi)을 결정하는 것이고 하나는 삶의 과정(pavatti)에서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들 가운데 재생연결을 결정하게 되는 업들을 특별히 업의 길이라고 부른다. 업의 길이 되지 않는 업들은 삶의 과정에서 과보를 가져오지만 재생연결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재생연결의 과정을 이끄는 상카라가 아비상카라, 삶의 과정에서 행위를 통해 축적되는 것이 상카라라고 했다.
비슷하게 재생연결을 결정하게 되는 업들을 '업의 길'이라 부르고 그 외의 업들은 삶의 과정에서만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 된다.
앞서 그 행위가 탐진치로 인해 행해질 때 아비상카라, 즉 강한 상카라가 된다고 했던 것처럼,
강한 탐욕, 악의와 함께하거나 살생 등의 강한 업 지음이 업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십선업도, 십불선업도가 재생연결을 결정하는 업을 짓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업도는 재생연결을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과보를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청정도론으로 돌아가자.
(Vis.XVII.44-47) - 계속
45. ㉯ 상카라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온 상카라들은 ① 형성된 상카라(saṅkhata-saṅkhāra) ② 계속 형성된 상카라(abhisaṅkhata-saṅkhāra) ③ 계속 형성하는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 ④ 몰두하는 상카라(payoga-abhisaṅkhāra) - 이 네 가지이다.
46. 이 가운데서 ① "참으로 무상하구나, 상카라들은(D.ii.157)" 등에서 설한 조건을 가진 모든 법들을 '형성된 상카라'라 한다.
② 업에서 생긴 삼계의 물질과 정신의 법들이 '계속 형성된 상카라'라고 주석서에서 말했다. 이들은 '참으로 무상하구나, 상카라들은'에 포함된다.
③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를 '계속 형성하는 상카라'라 부른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휩싸인 사람이 만일 공덕이 되는 행위를 계속. 형성한다면(S.ii.82)"이라는 등에서 그것이 언급된 경우를 발견한다.
④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몰두하는 상카라'라 부른다. "그 바퀴는 [힘으로] 몰두한 만큼 굴러가서 차축에 고정된 것처럼 반듯이 섰다(A.i.112)"라는 등에서 언급되었다.
47. 이들 뿐만이 아니다. 다른 상카라들도 예를 들면,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첫 번째로 말의 상카라가 가라앉습니다. 그 다음에는 몸의 상카라가, 그 다음에는 마음의 상카라가(M.i.302)"라는 방법으로 상카라라는 단어로 언급되었다. 상카라는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① 형성된 상카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업과 의도로 돌아오면,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만이 업이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도는 속행(javana) 과정에서만 일어난다.
속행은 '업을 짓는 마음' 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337)
(12) 속행(javana): '속행'으로 옮긴 javana는 √ju√jū(to be swift)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 문자적인 뜻 그대로 '재빠름, 신속함'의 뜻을 가졌다. 그래서 속행이라 직역했다... 일단 대상이 무엇이라고 결정되고 나면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을 자와나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과정에서 자와나는 모두 일곱 번 같은 대상을 가지고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결정된 대상에 대해서 마치 벼락 치듯 재빠르게 그것을 이해하는 작용을 한다. (→ 필자 주: 이래서 '속행'이다.)
이 자와나의 단계야말로 의도적인 행위가 개입되는 곳으로서 유익하거나 해로운(선, 불선) 마음이 일어나는 찰나들이다. 물론 아라한의 경우 이 자와나는 선이나 불선이 아니고 작용만 하는 무기의 마음이다. 그리고 성자들이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과의 증득에 머무는 순간들은 과의 자와나(phala-javana)이기 때문에 선(필자 주: 유익한 마음)이 아니고 과보에 속하는 무기의 마음이다.
...속행은 업을 초래하는 마음이요 업을 짓는 마음이다. 인식과정과 인식과정을 벗어난 것에서 일어나는 마음들 가운데서 이 자와나들 이외에는 유익함(선)과 해로움(불선)의 개념이 개입되는 마음은 없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온다.
부처님들과 아라한들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의 의도 혹은 의도적 행위는 업이 된다. 부처님들과 아라한들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해버렸기 때문에 업을 쌓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처님들과 아라한들도 정신·물질적인 몸(nāma-rūpa-kāya)을 가지고 있는 한 그분들의 지난 생들에서 지은 업의 과보는 받아야 한다.
과보의 마음,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하는 '의도'는 업이되지 않는다.
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역시 유익함(선)과 해로움(불선)이다.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유익한 것이 아니면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불선의 판단 기준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해탈과 열반에 유익한가 해로운가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라 하겠다.
그리고 마치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의도적인 행위는 그 의도한 선·불선의 성질에 따라 각각 고유한 과보로 나타난다. 이것이 업의 법칙(kamma-niyāma)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업의 결과를 업의 과보(kamma-vipāka)라 하고 업보로 우리에게 알려진 말이다. 업의 과보는 업이 열매를 맺기에 적당한 조건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특정한 알음알이의 상태나 정신적인 요인을 뜻한다.
여기서 '특정한 알음알이의 상태'는 과보의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요인'이란 과보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들을 뜻한다.
물론 업은 중생들의 살아있는 육신에 특별한 형태의 물질을 산출하기도 한다. 이것을 '업에서 생긴 물질(kamma-samuṭṭhāna-rūpa)'이라 한다.
업에서 생긴 물질의 예시로는 DNA를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이하 §33까지 저자는 4x4=16가지 측면에서 업을 분류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설명하는 업의 여러 측면을 개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12가지로 업을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데(Vis.XIX.14~16) 본서의 16가지 업의 분류는 『청정도론』의 이런 분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면 본문을 따라 하나하나 관찰해 보자.
출처: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초기불전연구원(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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