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習慣)
습관을 우리말로는 <버릇>입니다. <버릇>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쓰여지는 말은 아닙니다. <버릇이 나쁘다> <버릇이 고약하다> <버릇 고쳐야 겠다>는 등등으로 쓰여지지 <버릇이 좋다> <버릇이 괜찮네>라는 말로 쓰여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습관은 반듯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습관도 많습니다. 나쁜 습관은 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습관대로 살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습관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익히고 되풀이되고 반복되다가 보니 어느날에는 그것이 그 사람의 슴관이 되어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러므로 나쁜 습관을 고치는 것도 단번에 혹은 하루 이틀 만에 고칠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노력하고 각성해야 고쳐질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습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뉴턴의 3가지 운동법칙 중에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고, 멈추어 있는 물체는 계속해서 멈추어 있으려는 힘을 관성의 법칙이라 합니다.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 의자에 가만 앉아 있거나 가만히 서있던 승객들은 앞으로 가지 않으려는 관성의 법칙에 의하여 몸이 앞으로 가지 않으려고 뒤로 쏠립니다. 반대의 현상도 있습니다. 달리던 버스가 급정거 할 때 승객들은 계속 앞으로 나가려는 관성의 법칙에 의하여 몸이 앞으로 쏠리게됩니다.
이는 내 몸이 지금까지 해오던 그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관성의 법칙은 우리의 인생에서도 발견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평상시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해오던 행동이나 삶의 패턴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을 더 자연스럽고 편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한번 익숙해진 것을 좀처럼 바꾸거나 변화를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면서, 어려서부터 바른 습관과 태도를 익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활 태도와 습관을 잘 들여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유익하고 나쁜 습관은 해롭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인줄 알고 고치려는 자각심과 결심 없이는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날도 다음달도 내년에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쁜 습관이 반복되면 반복되는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고, 그 성격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들어서 결국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이 몸에 배이도록 결심하고 자각하여 연습하고 훈련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습관,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 항상 주님께 묻고 그 뜻을 구하는 기도의 습관은 참 아름다운 영적 습관입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은 일일이 고민해보고 연구해보고 물어보고 따져보고 생각하며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고민해보고 연구해보고 물어보고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사는 것 같은데 대개는 습관의 힘에 따라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 이유도 사람은 습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습관이 들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몸이 얼마나 자동적으로 반응하느냐’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독서가 습관화가 되어 있다고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독서가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닌 습관으로 인해 지금과 이후의 삶이 달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습관이 형성되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활동을 절약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습관은 좀 더 쉽게 하고 좀 더 편하게 하려고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습관은 잊혀질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고, 대체될 수도 있지만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스란히 뇌와 몸에 저장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편한대로 쉬운대로 하면 안 됩니다. 타락하여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우리의 본능을 따르면 그 끝은 타락의 낭떨어지에 떨어지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습관을 쫓아 사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에게는 성경을 읽으시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으셨습니다.
눅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기도 역시 예수님은 습관이 되어 있으셨습니다.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도 습관처럼 되어 있으셨습니다.
막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공동번역:늘 하시던 대로) 가르치시더니
나쁜 습관을 고치기는 참 어렵습니다. 문자 그대로 뼈를 깍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습관을 갖는 것도 어렵습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습관을 버리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체의 본능을 따라 하루 하루 살게되면 좋은 습관은 불과 얼마가지 않아 나쁜 습관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사자성어로 말하라고 했을 때 한 여자 개그맨이 "양악수술!" 하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은 웃었지만 "양악수술"(2-jaw surgery:위턱과 아래 턱을 모두 교정하는 수술)은 정말 살을 째고 뼈를 깎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5-6개월에 걸친 회복을 거치면 과거와는 현저하게 달라진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뼈를 깎는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면 죽을 만큼 힘든 고난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말 할 수 없는 인내가 필요한 힘든 훈련의 상황 속에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뼈를 깎는 것”은 말 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아픔을 겪고 나면 어딘가 변화가 일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외적인 변화로도 일어납니다. 겪은 고통이 클 수록 변화도 큽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변화에 이를 만큼 충분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훈련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군인, 운동 선수, 특별한 기술을 능숙히 구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고통스러울 만큼 훈련시킵니다. 그래서 훈련소는 가장 힘든 장소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으면 훈련소가 아닙니다.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애굽 종살이,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 다윗의 도망 생활은 그들에게 훈련소 기간이었습니다. 훈련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숙과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님의 전적인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나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말씀만을 강론하는 사람으로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사는 삶이 습관처럼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