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부산
언제7월15일에서7월16일까지
세부일정2박3일
총경비1500
부산_창원 -경남-울산-전남
6. 사이트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 세련되고 이미지 사진도 자세하고 크게 잘 나와있어서 보기 편하고 좋다.
7. 메인페이지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 나라 종류별로 잘 되어있어서 찾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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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용성, 로딩속도 : 사용하기 편리하고 이미지 사진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빠르다.
13. 구매절차, 결제절차 : 예약을 할때 경비를 지불하는게 잘 나와있지 않아서 불편하다.
14. 기타 의견 : 전체적으로 찾기쉽고 편리하게 갔다올수있어서 좋은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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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2009-04-24
범어사 봄 향기에 취하여 방향을 잃다. 금정산 계곡이 봄소식에 소란스럽다. 백년을 족히 살며 소나무 허리춤을 붙잡고 팽나무 가지를 휘감은 청룡동 등나무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된 등나무 군락지는 등나무가 많아 등운곡(藤雲谷)으로 통하는 자연림 상태의 산림주변을 500여 그루가 얼기설기 엮어 뒤덮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규모 자생 등나무 군락지 답게 4월말에서 5월이면 보라색 꽃이 피어나고 일대는 삼나무 숲과 함께 꽃향기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범어사의 창건설화를 찾아 시선을 모우면 영남의 3대 사찰중 하나인 범어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18년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설과 홍덕왕 당시 세웠다는 설이 있지만 시대별로 연결해 보면 문무왕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홍덕왕 때 중창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범어사는 대 사찰로 창건당시 요사 360방, 토지 360결, 노비 100여명 기록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규모를 엿 볼 수 있다. 범어사는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광해군 5년(1613) 묘전현감스님, 해민스님 등 중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무왕은 바다로부터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의상대사에게 명하니 문무왕 18년에 그 뜻을 받들어 678년 창건 해동 화엄종 십찰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범어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금정범어(金井梵魚)라는 말을 한 두 번은 들었음직 할 정도로 이곳은 범어와 관련 그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부산으로 상륙하여 해적질을 일삼는 왜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문무왕이 고심하는 와중에 현몽을 꾸게 된다. 금빛고기가 노니는 곳에 사찰을 세우라는 꿈을 꾼 문무왕은 당시 고승인 의상에게 명하여 부산일대를 둘러보니 금정산 정상에 범어가 노닐어 현몽에서 일러주신 그곳이라 범어사를 만들었다 한다. 범어의 유례 범어란 금정산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고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고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가 7촌쯤으로 물이 항상 고여 황금색을 이루며,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그 속에서 노니 금샘이라 산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의 고기라 하여 "범어"라 한 후 범어사를 만들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고 3.1운동 당시 안용운 선생이 범어사에서 범어사 학림의거 독립만세운동을 할 당시 전국에서 사용할 태극기를 만든 곳이다. 범어사로 향하다 조계문(일주문)을 통과하면 천황문과 불이문 그리고 계단 위 보제루까지 단숨에 올라 심검당을 지나 대웅전에 이른다. 대웅전 왼편에는 산령각, 팔상독성나한전, 지장전이 일직선상에 들어오며, 서지전과 휴휴정사가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오른편은 삼층석탑을 위시하여 관음전, 비로전 금어선원, 미륵전과 첨계로 그리고 앞으로 종루, 종무소, 설법전, 성보박물관이 범어사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678년) 의상 대사에 의하여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고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해동 화엄십찰중 한 곳으로 창건된 고찰로 사찰의 첫 관문인 조계문(일주문:보물 제1461호)을 들어서면서 범어사에 다가선다. 조계문은 기둥이 일자로 배치한 후 석주를 가공하여 세운 기둥 위 다포식 지붕을 올린 독특한 방식으로 세속에서 때 묻은 마음을 벗어 내려놓기 좋은 중량감이 있는 형태로 현판에는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란 뜻의 선찰대본산을 새겨 놓았다. 선찰대본산은 구한말 오성월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있을 당시 명명하였다 전하며, 조계문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일주문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숲길을 잠시 걷는 착각에 빠져든다. 천왕문과 불이문을 거쳐 보제루로 오르는 길은 짧지만 자연의 품속을 단시간 내 느낄 만큼 오랜 수령의 고목이 자리한 곳으로 사천왕이 모셔진 천왕문 네 기둥에는 “화엄성중혜감영/사주인사일념지/애민중생여적자/시고아금공경례“ 즉 화엄성종의 지혜로운 영감이여/ 세상 모든 일 한생각에 헤아려 아시고/ 중생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하시니/ 이제 제가 공경의 예를 올립니다 란 뜻을 적어 놓고 차별없이 들어서는 범어사의 세 번째 불이문(해탈문)은 숙종 25년 자수스님이 천왕문과 함께 창건하고 동산스님이 쓴 주련이 걸려 있다.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부처님의 맑은 진리의 가르침에 널리 중생을 교화 한다는 보제루가 대웅전 경내를 가리고 그 옆으로 살짝 길을 터 놓았다. 보제루는 음력 3월 불자들이 금강계단을 만들어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하는데 외벽에는 소를 중생이 가진 본성에 비유하여 어리석음을 깨치게하는 열폭의 십우도가 그려져 있다. 대웅전 앞 뜰에서 아침이슬 내려앉은 화광대에 마음 씻고 계단을 오르면 중심법당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보물 제434호)은 조선중기 이전에 만든 다포식 가구의 양식 특징을 잘 나타 낸 것으로 400년 이상 정교함을 유지하고 있다. 범어사로 진입하면 3구20계단을 올라서야만 대웅전을 가까스로 볼 수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 묘전화상이 1614년 세운 건물로 화려한 색체는 세월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한 채 빛바래고 퇴색되어 보이지만 고풍스런 멋과 세월의 흔적을 엿 볼 수 있어 좋다. 대웅전을 오르는 돌계단(석계)는 원래 1구였으나 지금은 3구로 20계단을 설치하고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와 함께 삼불상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 내에는 1661년 희장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26호) 및 고종 19년(1882)에 제작된 석가영산회상도(부산 유형문화재 제87호) 그리고 눈여겨 볼만한 원패가 모셔져 있다. 원패 또는 전패로 불리는데 주상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주상전하수만세, 왕비전하수천추, 세자저하수제년을 적었는데 지금은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부처님 가르침이 세상에 두루하기를 기원하는 글을 적어 놓았다. 청룡암에서 자비를 구하다 대웅전 왼편 긴 건물에는 관음전이 자리잡고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관음전은 원통전, 보타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현재 유형문화재 제53호이며,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부산 유형문화재 제70호로 1721년 진열스님에 의해 조성되었다. 후불 벽화로 1882년 제작된 백의관음도는 부산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성보박물관에 모셔놓았다. 관음전 옆칸은 지장전이다. 지옥중생을 구제하지 않고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력보살로 초록의 두상을 써고 있다. 관음전 옆으로 큰 바위가 놓여져 있다. 신령각 아래에 자리한 바위를 두고 청룡암이라 한다. 흡사 큰 거북을 연상하게 하는 바위로 조선중기 시인이던 동악 이안눌(1571-1637)의 시가 새겨져 있다. “덕수이거사/래산정산인/연하일고사/구학양한산/소석태점극/관송로숙건/창애백천겁/신십시전신”으로 “덕수사람 이거사 동래땅의 정상인이 저녘노을 물들은 옛 고찰에 자연과 더불어 한가한 두 사람. 바위에 낙옆을 헤치니 이끼가 파랗고 소나무 보느라 두간에 이슬 젖는다. 수안 검을 내려온 푸른 바위에 이제 새로이 문장을 새기네.”라 노래했다. 한 채의 법당에 세 건물을 만나다. 팔상. 독성. 나한전이 연이어 자리한 독특한 건물로 부산 유형문화재 제63호이며, 범어사의 옛 건축미를 엿볼 수 있는 색체가 퇴색되어가는 곳이다. 꽃살문양이 아름다우며, 기둥에는 물고기 형상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8등분한 팔상탱화를 모시고, 독성전은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는 나반존자를 모신 곳이다. 나한전은 깨달음을 얻은 성자인 아라한인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당간지주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좌, 우 모두 가로10cm, 새로 87cm에 높이가 4.5m의 석재로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지만 군살이 더러 보인다. 지주는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 장식이나 돌을 애써 다듬어 보려는 노력이 엿보이지 않는다. 어느 사찰을 찾아가도 당간지주를 먼저 본다. 그만큼 당간지주는 사찰을 대표하는 기둥 역할도 한다. 부산의 만덕사는 사라졌지만 만덕사지를 지키는 것이 당간지주가 아닌가. 주요문화재를 살펴보면 보물 제250호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은 사찰이 번창하던 시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상하기단 모두 眠象이 조각된 점이 특이하다. 석탑의 비례상태는 하중을 단단하게 받치고 상륜부로 갈수록 급격하게 협소하여 웅장함 보다 안정감에 치중을 주고 있다. 범어사 석탑을 감싸고 있는 난간은 일제당시 수리하는 과정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난간이 석탑을 보호 한 다기 보다 가두어 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탑돌이 하는 행자들은 난간을 따라 이동하면서 탑돌이를 한다. 당간지주가 사찰의 대웅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일주문 바깥으로 내몰려져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의 중요행사 또는 알릴 내용이 있을 때 당번을 달아 두는 깃대 역할을 하는데 보통 대웅전이나 사찰의 마당에 있는 것이 보편화 되어져 있지만 범어사 당간지주는 사찰경내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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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 봄바람 불던날 (하동-구례 구간)2009-04-10
하동포구 재첩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길을 잡다. 발길 닿는 곳을 따라 질주하는 세상 굴레를 잠시 벗어놓고 탈선해 보면 아스라한 봄빛이 굽이굽이 강물을 어루만져 유혹을 한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어루만져 12개 군을 동면에서 깨우니 첫 소식이 매화꽃이다. 특히 하류에 위치한 백운산 자락은 3대를 잇는 장인을 배출하면서 매화꽃은 섬진강의 봄을 재촉하여 서둘러 2,000여개의 장독 속에서 숙성되길 염원한다. 매실꽃잎이 낙화를 시작하면 섬진강은 지각생 매화와 산수유 그리고 성급한 벚꽃이 강줄기를 따라 북상을 하면서 청보리의 파릇함과 벚꽃의 화려한 꽃비가 끝없이 흘러내린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에 위치한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보성강과 합류 그리고 광양만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은 고려 말, 왜구들이 섬진나루터에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밤새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몰려나와 울부짖어 왜구들은 침입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전하며, 훗날 왜구에게 포로가 된 병사들을 위해 수천마리의 두꺼비가 강물에 다리를 놓아 구출하고 뒤쫓는 왜구가 강물 중간에 도달하자 두꺼비가 물속으로 사라져 빠져죽게 되었는데 훗날 두꺼비 섬(蟾)과 나루 진(津)을 합쳐 섬진강이라 불렀다 한다. 섬진강의 봄은 비단 물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섬진강 꽃길 그리고 야생 차밭의 다향을 머금고 유명한 천년고찰을 품고 있다. 하동포구 팔십 리 “모래에 이름 석 자 남겨보며” 하동포구 팔십리길 하류 은빛모래 뿌리내린 송림은 매서운 모래바람 용케 버텨 울창한 숲 만들어 놓고 260여년 세월 굽이도는 물길을 향해 안부를 묻는다. 영조 21년(1745) 도호부사 전천상이 방풍림 목적으로 심은 하동송림은 현재 2km 구간 750여 그루 노송으로 자리를 지키며 국내 제일 노송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동포구 팔십리길의 첫 여정은 백사청송(白沙靑松)으로 손색없는 하동포구를 시작으로 길을 잇고 있다. 팔십리 물길은 속과 겉이 다르다. 빠른 속 물길과 달리 수면 위에는 고요하기 짝이 없다. 급선회하는 용트림도 잠시 모래를 적셔 그림을 그리고는 여유만만이다. 곧 닥쳐올 광양만에서 분해되어 사라지는 강물이지만 아직은 더 흘러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에 여유로운 것이 아니다. 힘들고 지친 여정을 달려 온 만큼 화를 낸다면 섬진강 팔십리 살아남을 생명은 없을 것이다. 섬진강을 회유하는 은어와 참게 그리고 재첩에게 무한의 생명력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광양청매실농원 “매실이 익어가는 이야기를 엿듣다” 하동읍에서 섬진교를 두고 고민한다. 봄이면 틀림없이 광양 청매실농원으로 군 소리 없이 한걸음에 달렸을 그 길은 매화꽃이 바람에 흔들리면 꽃향기는 장독 속에서 익어가기 때문이다. 섬진교를 건너 곧장 오른편을 도로를 따라 달리면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청매실농원 이정표가 산길로 안내한다. 홍쌍리매실농원으로 국내 최고의 매실농원이 섬진강 강바람에 꽃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곳이다. 삼월이면 흐드러지게 핀 하얀 매화꽃에 정신을 잃을 정도이며, 매화가 익어가며 들려주는 2,000여개의 장독 모습도 독특하게 다가온다. 매화농원에서 가장 절정인 순간은 하얀매화밭 아래 청보리가 연초록 세상을 만드는 순간이다. 매화농원을 내려선 후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섬진교를 건너 구례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최참판댁에서 “서희를 떠올리며” 소설 토지속으로 빠져든다. 조준구의 모략으로 서희는 집을 떠나며 한 말이 “주인은 최서희! 똑똑히 알고 있으세요” 거장의 대하소설은 시대적 배경을 담아내고 그 속에 작품이 지닌 서사의 힘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으로 대하드라마가 연속극으로 등장해도 질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 대하소설의 양대산맥 조정래와 박경리가 있다. 그 중에서도 박경리의 토지는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를 그려내면서 다양한 계층간의 시대적 격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그 세트장이 하동에 있다. 세트장으로 가는 길목은 뒷산에서 갓 캐온 다양한 봄나물과 악양 들판에서 주름진 손으로 칼질을 한 쑥이 햇볕에 숨이 죽어 난전을 펼친 할머니의 주름살을 닮아가고 있다. 평사리 일원에 자리한 최참판댁 세트장은 악양 들판과 옆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비록 한 뼘의 땅이 없더라도 최참판댁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만석지기가 된 착각을 가져 올 만큼 세트장을 신경 쓴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세트장을 둘러보는데 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TV를 통해 알만큼 다 아는 익숙한 배경들이 펼쳐지고 건물에는 도우미가 직접 옛 모습을 연출해 더욱 실감을 더해주는 곳으로 영화와 TV드라마 촬영지로 부상하고 있다. 최참판댁을 물러나 악양 들판 연초록에 보리싹 하나 뽑아들고 보리피리를 만들어 본다. 세상살이 고단할 것인데 악양 들판은 예전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물오른 수양버들이 앞 다투어 자리 차지하는 길목을 돌아 나와 화개장터로 향한다. 화개장터에서 “역마살을 떠올리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번 와 보셔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전라도쪽 사람들은 나룻배타고/경상도쪽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오손도손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구경 한번 와 보셔요/오시면 모두모두 이웃사촌/고운정 미운정 주고받는 / 경상도 전라도의 화개장터/ 조영남의 화개장터와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 화개장터는 여행지로 급부상하였지만 정작 화개장터에 가면 이 모든 것이 옛말이 되어 버렸다. 화개장날은 오일장으로 1일과 6일인데 장터라고 해봐야 이제는 관광 상품 파는 장소로 전락하고 겨우 화개장터였다는 비석만 있을 뿐이다. 역마살이 낀 장돌뼁이 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각설이 타령이 시장을 누비면서 서로의 풋풋하고 따스한 온정이 지역감정들을 밀치고 자리 잡았던 화개장은 남해안 해산물을 농산물과 교환되는 단연 최고의 큰 장터로 한때는 굴림 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서 떠돌이 남사당을 만나 옥화를 잉태한 주막도 없는 현대화 물 결속에 떠밀려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주차장과 다리가 연결되면서 줄배 구경도 힘들다. 살아 꿈틀 꺼렸던 화개장터는 이제 쌍계사 십리벚꽃길, 쌍계사, 구례로 향하는 길목역활을 수행하며, 장터마을과 다리건너 원탑마을로 지금은 몇 채의 가옥이 인근 야산에 차를 생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화개장터 앞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고량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다. 2003년 7월28일 구례 간전면 운천리와 하동 화개면 탑리를 잇는 남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이제는 섬진강을 오가던 줄배 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상징하는 빨강색과 파랑색의 태극문양이 섬진강 물결에 씻겨 줄배의 아쉬움을 대신 할 뿐이다. 우리나라 5대 장터로 사투리가 공간을 메우면서 형성되었던 화개장터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행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장소로 전략해 버렸지만 어쩔 수없는 현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대형마트가 도심 곳곳에 자리 잡고 잘 뻗은 도로를 이용하여 수송되는 작금에 시장의 기능은 이제 추억으로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이다. 화개장터에서 나와 마을로 접어들면 봄철 그 유명한 쌍계사 십리벚꽃길로 향하게 된다. 십리벚꽃길에서 “다정스레 손잡고 걷는 연인들” 봄의 기운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남녘의 땅 하동에는 매화꽃향기가 시샘하는 봄바람과 하얀 여린 꽃망울 터뜨리고 연이어 벚꽃과 산수유 꽃이 지천에 피고 지는 아름답고 황홀한 전원풍경을 선보여 화개장터 입구에서 쌍계사까지 지방도로 1023호선으로 약 4km 거리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우수상 수상의 영광과 연인에게 혼례길 로 이미 널리 알려진 길이다. 십리벚꽃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벚꽃의 수령은 거의 50-60년을 족히 살아온 고목이다. 십리벚꽃길은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1년 지역민이 벚꽃 1,200주, 홍도화 200주를 심은 것으로 화개 면장이던 김진호씨가 쌍계사로 가는 길목이 좁다며 도로확장을 위해 길을 재정비하면서 일본에서 묘목을 공수해 온 것으로 한때는 친일청산 이유로 외면당하기도 했지만 봄이면 만개하는 벚꽃터널의 유혹 역시 만만치 않았다. 벚꽃 사이 가끔 홍도화가 붉게 피어 흡사 홍매화를 연상하게 하는 십리벚꽃길은 화개장터에서 시작되어 쌍계사에서 끝이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 10리길은 족히 넘는 길로 어린 묘목이 자라고 있는 하동 송림공원에서부터 지리산 칠불암까지 이어지는 벚꽃 길은 꽃비 내리는 봄을 충분하게 만끽 할 수 있다. 벚꽃 길은 쌍계사 입구로 안내한다. 쌍계사 “범패에 취하고픈 날” 꽃비 내리던 날 촉촉하게 젖은 옷깃 여미며, 일주문 앞에 도착하니 무거운 벚꽃 잎 가볍게 바람에 떨어지며 삼신산 쌍계사 현판이 눈에 각인된다. 쌍계사의 역사는 성덕왕 21년(722)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스님의 정상(머리)을 모시고 오면서 옥천사로 출발하여 문성왕 2년 (840)년 진감선사에 의하여 대가람을 이루고 인근 경남 고성에 옥천사가 있어 두 개의 이름이라 쌍계사라 불렀다는 설과 두 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쌍계사라 불렀다는 설, 정강왕이 진감선사를 앙모하여 쌍계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는 진감국사의 범패로 알려져 있다. 진감국사(眞鑒國師:774∼850)는 범패(불교음악), 차(茶)종자를 한반도에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시대 인물로 선종발전에 대들보로 알려져 있다. 진감국사는 혜소선사로 시호(諡號)가 진감(眞鑑)이며, 성씨는 최 씨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쌍계사 진감선사부도비에 따르면 본관이 황룡사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 31세에 출가 후 당나라에서 창주(滄州)에 있던 신감대사 제자가 된 후 810년 당나라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종남산에서 참선과 수행 830년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주석하면서 쌍계사와 인연을 맺고 화엄종 포교방식을 탈피하고 범패를 통해 선사상을 확대하면서 쌍계사는 대가람으로 알려진다. 비문에 의하면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르는 곡조와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모든 천상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며 범패를 배우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사찰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파격적인 포교방식이 성공한 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쌍계사에는 또 하나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850년 선사나이 76세인 불교로 출가한지 41년 만에 입적하며 887년 만에 입적하며 887년(진성여왕 1)진감선사대공탑비가 당대 최고 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에 의하여 탑비를 진감국사 일대기로 메워지면서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전설이 생겨난다. 고운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로 당대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부산 해운대 동백섬 바다기슭에 최치원 선생이 새긴 "해운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바로 해운(海雲)이 고운 최치원 선생의 또 하나 자이다. 최치원은 점점 쇠퇴하는 신라왕실에 실망하면서 벼슬을 내 놓고 전국을 유람하며 은거생활을 하면서 말년을 해인사에서 보낸 후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기록이 없고 떠돌다가 객사하였다는 설과 자살하였다는 설이 난무할 뿐이다. 쌍계사와 인연을 맺은 진감국사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엮어낸 쌍계사 철감선사비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서려져 있다. 평소 부도탑과 부도비를 만들지 말 것을 권장하던 진감국사는 정작 자신은 죽어 부도비를 남긴 것이다. 이율배반적 행위라 볼 수 있지만 평소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칭송하면서 기리기 위하여 진감국사의 뜻을 어긴 것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볼 수 있지만 생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살아생전 업적을 추하게 볼 수 있지만 정작 최치원의 뜻은 달랐다. 진감선사비문은 2500여자로 최치원은 그의 생전 뜻을 어기며 비문을 직접 작성하고 새기는데 " 이름은 멀리해도 이름이 남는 명성은 기념할 만한 것으로 불법은 문자를 떠난 것이지만 문자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밝힐 수 없다" 며 비문을 지었다고 전한다. 비문은 전체 높이 3.63m, 비신 높이 2.02m, 비신 폭 1m으로 통일신라시대 작 품이며, 임진왜란과 전쟁을 통해 대부분 파손되었는데 쌍계사 진감선사비는 파손되지 않고 모든 형태가 보존되어져 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부도비가 대웅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이유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대웅전 앞에 부도비가 있는 예는 전무하다는 점을 볼 때 부처가 모셔진 대웅전을 향하지 못하고 측면으로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찰로 접어들며 최치원 선생의 입산시를 읽어보자. 僧乎莫道 靑山好/山好何事 更出山/試看後日 吾 跡/一入靑山 更不還 스님들이시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 산이 좋을진댄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십니까. 시험 삼아 저의 뒷날 자취를 보시겠습니까.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저의 모습을……. 매화꽃 향기를 따라 길을 거닐다 보면 쌍계사 입구에 나무장승 및 큰 바위가 자리 잡고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쓴 글씨라는 전설을 간직한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란 글귀가 있고 더 오르면 다포집형태로 삼신산 쌍계사 및 선종 대가람이란 현액이 걸린 일주문이 있다. 해강 김규진이 쓴 글로 알려진 일주문은 큰 기둥과 작은 기둥이 머리가 큰 다포집을 겨우 떠받치고 그 위로 계단을 오르면 맞배집 형태의 금강문-천왕문-팔영루-대웅전으로 능선 비탈을 이용, 일직선상에 놓여있지만 진입로는 약간측면을 돌아가도록 만들어 두었다. 이어지는 건물 중 팔영루는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율로 범패를 만들면서 팔영루라 불렀다 전하지만 중국 위나라 조자건이 고기 노는 모양을 보고 범패를 익혀 어산(魚山)이라 부른 것을 보아 팔영루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팔영루는 보편적으로 사찰이"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루"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며 범패를 가리키는 교육장으로 활용되어 왔다. 범패 즉 음성공양을 두고 말하는 말로서 소리 내어 하는 공양으로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범서(梵書)를 찬탄하는 불교의 모든 음악을 통칭하고 있다. 진감국사가 범패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9년(760)범패가 이미 존재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월명사 도솔가 조}에 두 개의 해가 떠서 왕이 해결책을 물으니 범패승을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부르면 괜찮을 것"이란 구절로 보아 범패는 이미 진감국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범패는 어려운 형식이었거나 신라풍이라는 향풍(鄕風:)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본도 범패가 있는데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고 흘러들어가 고풍(古風)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국사가 가져와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풍(唐風)으로 분류되면서 범패 보급의 시발점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대웅전 오른편 기단부에 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사찰에서 마애불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대부분 암벽을 이용하거나 쪼아서 옮겨 놓는데 이곳 마애불은 화려한 모습은 없고 근엄한 표정으로 다소 여성스러운 풍을 풍기고 있다. 마애불을 조각할 때 부처를 음각하거나 양각 또는 선을 따라 깊게 홈을 파서 윤곽을 잡는 것과는 달리 아예 작은 바위에다 네모 반듯한 암실을 만들고 그 안에서 바깥표면과 일치하도록 돋음 양각을 해 놓았다.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부처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일주문에 내걸린 삼신산의 삼신할미가 아닐까? 예로부터 단군시절 이 지리산 일대를 관장하는천황할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천황할미를 이곳 쌍계사 이전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조성된 것은 아닐까 싶은 의혹이 드는 것은 마애불을 통해서 부처가 아닌 다른 영감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는 탓일 것이다. 마애불은 입체감이 뛰어나고 큰 귀와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모양을 하고 손은 서로 맞잡고 소매 속으로 넣고 정좌를 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감실 바로 윗 단은 나무아미타불이라 기록되어져 있으며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총 1.35m 높이로 안정감 있는 자세로 정좌하고 앉아 있다. 쌍계사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전각이 팔상전(捌相殿)이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세분화 하여 그린 팔상도와 영산회상도를 모시는 전각으로 팔상전 또는 영산전이라 부른다. 범패가 노래를 통해 불법을 전하였다면 팔상도는 그림 속 부처님의 일대기를 통해 불법을 전파하는 목적에 있으며, 보통 팔상전에 모셔진 부처는 작고 경배대상은 팔상도와 영산회상도이다. 팔상도는 부처의 일생을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나눈다. 팔상전으로 대표적인 사찰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며,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개심사, 송광사, 해인사 및 쌍계사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길이 410m. 폭273m의 17세기 중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석가불을 중심 상단에 모시고 사보살, 사천왕, 육제자, 사분신불, 타방불, 팔부중이 좌, 우 2열로 채우고 조선 숙종 7년(1681)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하지 않은 탱화적 기법을 통해 사바세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팔상전팔상탱은 1.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향하는장면 2.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산하는 모습 3. 태자가 성문 밖 중생의 고통을 살피는 모습 4. 출가하는 모습 5. 설산에서 신선과 수행하는 모습 6. 수행 중에 겪는 고통 7. 녹야원에서최초로 설법하는 모습 8. 쌍림수 아래에서죽음에 이르는 모습 등이 있다. 쌍계사에서 또 하나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면 육조영당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꾼 생활을 하다 금강경 소리를 듣고 홍인대사 문하에서 가사를 전해 받고 훗날 황실로 초대되어 조서를 지내면서 석가모니로 부터 33대 육조 혜능대사로 알려진다. 쌍계사에서 육조 혜능대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쌍계사 창건과 관련한 이야기로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육조 혜능의 머리를 당나라 홍주 개원사에서 역사 장정만에게 돈 2,000냥을 주고 매수하여 조계사의 육조인 육조탑에서 존중 혜능의 두골을 훔치게 하여 가져와 옥천사를 만들었다는 설과 혜능대사가 육조 혜능을 평소 흠모하여 찾아갔을 때 이미 고인이 되어 머리만 모셔와 돌로 만든 석감에 넣어 안치하였다하는 설이 있지만 사람의 머리를 가져온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의 불전에 있는 석탑은 1800년대 7층 석탑을 옮겨와 석감위에 올려놓았으며,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계사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웅전은 조선 중엽의 전형적 목조건물로 건축미에서 단연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게 하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우측 아미타불, 좌측 약사여래불을 모시며, 관음, 세지, 문수, 보현 등 4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칠존불을 모신 대웅전 불상은 아마타불을 제외하고는 조성시기 및 재료, 양식 등 동일하다. 삼세탱불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을 한 문수 보현 등 8대 보살,재석범천, 2위의 타방불, 가섭 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 용녀와 용왕 그리고 2금강과 사천왕을 배치하고 있다. 대웅전의 불상은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부처는 나무로 만든 불상으로 조각솜씨가 우수하며 둥근 얼굴형에 경직되거나 온화한 미소를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고 자세하게 살펴보면 약간의 미소를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세탱불은 18세기 후반의 대형불화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화엄사처럼 거대한 석등은 아닐지라도 석등1기가 눈에 들어온다. 흡사 호롱불을 켜고 불경을 연구한 것처럼 호롱불 등잔을 닮은 석등은 모진 세월을 대변하듯 중간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양식을 반영하고 8각형으로 뻗어 올라가며 위 부분에 연꽃잎으로 장식해 놓고 있다. 쌍계사 홍도화 한그루가 담장에서 세월을 말해주고 있어 짧게 눈인사 올리고 다시 내려와 계속 벚꽃 길을 따라 달렸다. 쌍계사 입구보다 인적이 뜸한 곳이라 다소 여유가 있다. 좌우에는 야생 차밭이 초록 세상 만들기에 분주하고 도로는 칠불사 주차장에서 끝난다. 칠불사에서 “한기를 느끼다” 남방불교전래설을 말해주는 칠불사는 지리산 토끼봉 아래 800고지에 위치한 고찰로 쌍계사 북쪽 도로를 따라 진입하면 10여분에 도착할 수 있다. 101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허황옥 왕비 오빠였던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이곳에 운상원이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103년 8월 보름날 밤 일곱 왕자 광불, 당불, 상불, 행불, 향불, 성불, 공불 모두 성불했다는 전설을 지닌 칠불사는 1800년 화재로 10여 동의 전각이 소실되고 그 후 복구되었지만 여순반란군토벌(1948)로 소실된 후 다시 지은 전각으로 1978년 복구 과정에서 신라 당시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만들었다는 2중 온돌방인 벽안당 아자방을 복원하였다. 칠불사 첫 만남은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서 시선이 위에 고정될 만큼 높은 위치에 동국제일서원 편액을 달고 있는 보설루를 계단을 만나게 된다. 보설루를 지나면 중앙에 대웅전이 자리 잡고 왼편에 아자방이 있다. 전설로 굳혀진 지명과 관련하여 왕자가 성불한 운상원, 수로왕이 머물던 범왕사, 허황옥이 머물던 대비사, 3정승이 머물던 삼정이 지명이 있다한다. 아자방은 방 모양이 亞자와 같아 아자방으로 불리는데 벽안당 아자방은 세계건축대사전에 수록될 만큼 우리나라 온돌문화 중 독특한 방식으로 길이가 약 8m로 네 귀퉁이를 70cm 높여 좌선처를 만들고 중앙에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행경처로 한번 불을 지키면 49일 동안 온기가 가시지 않는 특징과 100명이 동시에 좌선할 수 있으며, 서산대사가 좌선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선 순조 28년(1828) 대은선사가 율종을 수립한 곳이기도 하다. 1951년 화재로 불에 타 초가로 복원 후 1978년 복구하면서 유리로 창을 내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칠불사에서 내려선 후 다시 화개장터까지 달려가면서 찻집에 들러 다향의 향기에 잠시 매료되어 본다. 화개장터에서 구례방향으로 따르면 이번에는 피아골계곡으로 향하는 865번 지방도를 따라 진입하면 연곡사가 피아골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연곡사 “부도탑을 돌아 나오며”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는 연곡사 유물 대부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인조5년(1627) 소요대사에 의하여 복구되지만 이곳에서 생산되는 밤나무를 이용하여 위패를 만드는 신주목으로 봉납하게 되면서 고역에 참다못한 승려는 하나 둘 떠나고 사찰은 폐쇄되는 위기까지 치닫고 결국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폐허로 변하게 된다. 1981년 주지였던 장숭부 스님이 정부지원과 시주로 구 법당을 철거하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새 법당을 신축하면서 대적광전, 명부전, 일주문, 종각 등을 보수 중창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연기조사가 지리산 피아골로 풍수를 찾아 다녔는데 연못에서 갑자기 소용돌이가 일어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올라 허공으로 사라지자 연기조사는 곧장 그 연못 위에다 사찰을 만들고 연곡사라 불렀다 전하며,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사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폐찰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후기 동부도로 출발하여 고려시대 부도인 북부도와 조선시대 부도로 알려진 서부도가 사찰을 호위하고 있다. 연곡사에 숨겨진 비석이 하나있다. 부도로 향하는 길목에 겨우 작은 비석하나만 서 있어 스쳐가기 쉽지만 비석의 사연은 의병장이던 고광순 순절비이다. 담양출신이던 의병장 고광순은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지를 만들고 의병활동을 하다 왜군의 기습으로 순절하면서 절도 함께 소실되고 이를 기리는 비석을 사찰에서 드문 예로 경내에 비석을 세워 넋을 기리고 있다. 불교문화재로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 연곡사삼층석탑(보물 제151호), 연곡사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연곡사동부도비(보물 제153호), 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등이 있다. 연곡사를 내려서면서 주변경관을 살펴보면 야생차밭의 이랑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연곡사에서 다시 길을 잡고 구례로 진행하면 금락환지를 자랑하는 운조루와 만나게 된다. 운조루 “쌀독에 쌀이 없다” 운조루는 남한 삼대 길지인 금락환지에 자리 잡은 조선 양반가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 사랑채로 지금은 전체를 운조루라 부른다. 구름 속에 나는 새가 사는 집으로 불리는 운조루는 중국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 혜사에서 첫머리인 운과 조를 따서 만든 "루"각으로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명당자리의 증거로 운주루에서 거북돌이 출토되었지만 1989년 도난을 당하고 지금은 운을 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운조루는 명당 터임에도 불구하고 걸쭉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였고. 지금은 10대손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운조루의 주인인 유이주가 평북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산을 넘는 과정에서 호랑이를 만나 채찍으로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께 받치고 뼈는 잡귀를 막기 위해 운주루 홍살문에 걸었는데 이를 안 사람들이 뼈를 민간요법과 민간신앙에 의하여 조금씩 탐을 내다보니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임금이 백 칸에 살기에 아무리 벼슬이 높아도 99칸이 최고였던 당시 운조루도 아마 99칸의 대저택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60여 칸이 전해져 오며, 굴뚝을 건물보다 낮게 배치하여 바깥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볼 수 없도록 하여 그들의 배고픔을 같은 아픔으로 느끼며 쌀 두지(뒤주)로 불리는 통나무 원형에 쌀을 담아 놓고 누구라도 항상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아래에 구멍을 내어 두는 넉넉함을 통해 운조루 주인의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운조루 쌀통은 퍽 재미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 표기해 놓고 언제라도 쌀을 가져 갈 수 있도록 입구에다 내 놓고 있다는 점은 주인장 과 굳이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쉽게 찾아와 가져 갈 수 있도록 한 주인장의 세심한 배례가 엿보이며, 쌀이 줄어들지 않으면 주인은 며느리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하거나 얼마나 인심을 얻지 못하면 쌀을 퍼가지 않느냐는 것으로 당시 이곳 운주루의 주인은 인접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넉넉함을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1776년 무관 유이주(1726-1797)가 만든 사랑채 운주루는 비록 주인은 떠났지만 그 날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덕을 베풀고 살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운조루에서 지척에 있는 화엄사는 봄이면 화엄매로 유명하다. 운조루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구례로 향하다 18번 국도로 접어들면 18번국도 끝자락에 화엄사가 자리 잡고 있다. 구례화엄사 “화엄매에 취하고” 노고단 남쪽 기슭 해발 250m 산간 구릉지에 위치한 화엄사는 화엄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백제 성왕 22년(544) 연기스님이 창건한 후 문무왕 10년(670) 3층의 장육전을 의사대사가 주석하면서 건립하고, 신라후기 승려 도선에 의하여 확장, 고려 문종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받치던 곡물을 저장하는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만들 정도로 번창하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630년 각성스님에 의하여 다시 전각을 보수 중창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오늘에 이른다. 지정문화재 현황으로는 총 14점 (국보4, 보물5, 천기1, 도지정4)인데, 국가지정문화재(10점)로는 국보 제12호 화엄사각황전앞석등, 국보 제35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 국보 제301호 화엄사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32호 화엄사동5층 석탑, 화엄사서5층 석탑(제133호), 화엄사대웅전(제299호), 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제300호), 구례화엄사화전석경(8,980점 외 일괄 : 제1040호), 천연기념물 제38호 화엄사의 올벚나무가 있고, 시·도 지정문화재(4점)로는 도유형문화재 제49호 화엄사보제루, 화엄사9층암석등(제132호), 문화재자료 제34호 화엄사, 남악사(제36호)가 있다. 화엄사에 피는 올벚나무는 수령 300년,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4.42m로 병자호란(1636)으로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한 후 전쟁에 필요한 활을 만드는 목재로 벚나무를 사찰마다 심게 하였는데 당시 주석하신 벽암스님이 인조의 뜻을 받들어 올벚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중 한 그루는 80여 년 전 절을 수리하면서 베어 적묵당 안마루에 깔았다. 화엄사 맞은편 암자 앞에 1그루가 지금도 살아 있다. 화엄사에는 각황전과 석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가장 큰 법당인 각황전과 가장 큰 석등 때문.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늘씬하게 늘어선 모습이 흡사 궁궐을 방불케 한다. 처음 이곳은 의상대사가 만든 2층 4면 7칸의 장육전이 있던 곳으로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셨지만 정유재란을 피해가지 못하고 소실된 후 숙종 25년~28년(1699~1703)에 계파 성능선사에 의하여 중창하고 1730년 형조참판 이진휴가 편액을 봉양하니 오늘날 최고의 법당으로 자리메김하게 되며, 숙종 임금에게 불교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 불렀다. 각황전 내에는 보통 3불을 모시는 것과 달리 3붕 4보살을 모셨는데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이 모시고 있다. 화엄사를 들어서다 보면 불이문을 시작으로 금강문과 천왕문이 일직선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게 된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개의 태극형상을 하고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만 불이문-금강문-천왕문은 태극형상을 이루고 보재루-운고각-대웅전 또한 태극형상을 하고 있다. 이 태극형상은 처음 만나는 것이 세간법을 비유한 것이고 두 번째가 출세간법으로 불교의 오묘함을 곧장 반영해 보여주는 것이다. 화엄사에서 다시 내려선 후 구례군에 입성하면 구례교차로가 나온다. 이때 17번을 이용하여 순천방향으로 길을 잡다가 문척 교차로에서 861번을 따라 섬진강을 건너 강변을 따르면 사성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사성암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그야말로 차로 이동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산길을 돌고 돌아가면 절벽에 위태롭게 올라서 있는 사성암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린다. 사성암 “절벽에 손톱으로 그려야 했던 벽화는” 전남문화재자료 제33호 사성암은 백제시대 오산(530m) 정상부 벼랑지역에 성왕 22년(544) 연기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오산암으로 불리다 원효(元曉)·도선국사(道詵國師)·진각(眞覺)·의상(義湘)이 수도를 한 후 4명의 고승을 배출하였다 하여 사성암으로 고쳐 불렀다 한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오산 정상에 참선하기 알맞은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서 도선, 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를 했던 곳이라 기록한 문집이 있다. 사성암이 자리한 오산은 금강산과 같은 경승지로 평가되며,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부를 만큼 산 정상에 올라서면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배석대, 낙조대를 비롯하여 12대가 있으며, 눈 아래로 섬진강이 펼쳐지고 지금은 벼랑 위 아슬아슬하게 절집이 자리 잡고 마애여래입상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마애여래입상(시도유형문화재 제220호)은 총 높이 3.9m로 음각조각 수법을 통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가슴아래 뭔가를 받치고 있는 미타정인 모습으로 약사불로 추정되며, 불꽃무늬와 넝쿨무늬로 장식된 광배가 새겨져 있다. 마애불에 관한 전설로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 전하며 토지 촬영장소로 서희와 길상은 암자를 찾아가는데 바로 사성암이다. 사성암 난간을 따라 절집을 여행하다 보면 큰 바위에 소원을 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일명 소원바위로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하며, 소원바위를 지나면 위태위태한 암벽 끝 난간에 흡사 성곽처럼 보호대를 만들고 안쪽으로 서로 바위와 바위가 연결통로를 잇고 작은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사성암을 여행하고 다시 내려선 후 구례군으로 진입하여 19번 국도를 이용하여 지리산 온천까지 길을 달린다. 지리산온천 “하루 지친 심신을 내려놓고”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에 장군대좌로 기록되어 있는 지리산온천 일대는 신비의 영수로 알려진 게르마늄과 탄산나트륨 온천으로 피부병과 신경통, 관절염, 당뇨병, 부인병 등 성인병 예방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게르마늄원소로 인해 산소를 활성화 시켜 저온상태로 6개월 이상 보관해도 수질에 변화가 없고 자연치유력을 증강시켜 면역기능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콜레스테롤 축출효능이 탁월하다. 온천지역에는 많은 온천탕과 식당 및 숙박시설을 두루 갖추고 지리산으로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여행 중 일박하는 코스로 적당하다. 지리산온천 주변은 이른 봄 산수유로 물들이는 곳으로 전국에서 유명한 산수유 상위마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지리산온천랜드 앞 도로를 따라 산길로 오르면 상위마을이다. 산수유마을 “꽃 여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산수유 꽃여행의 대명사로 불리는 상위마을은 지리산온천에서 10분이면 도착하는 소박한 마을로 전국 최고의 산수유 생산을 자랑한다. 산수유 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이 일대는 10리길은 노란 봄꽃 산수유를 보려는 인파로 지리산 자락 해발 700m 에 위치한 마을이 한바탕 시끄러워 지고 지리산온천 일대부터 산수유축제가 열린다. 산동마을에서 만나는 산수유는 중국 산동성에 사는 여자가 이곳으로 시집오면서 나무를 가져와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전하며, 이 일대의 지명이 산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산수유는 비단 상위마을에만 피고 지는 봄꽃이 아니다. 지리산 온천 주변과 산동면 일대는 온통 노랗게 꽃망울 터뜨린다. 가을이면 노란 산수유는 붉은 색으로 바뀐다. 10월에 만나는 상위마을의 산수유 열매는 구기자보다 크며 신장계통 및 당뇨, 고혈압, 관절염 한약제로 사용되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붉은 모습과 말리는 모습 또한 색다른 여행이 될 것이다. 상위마을의 노란색과 붉은색을 펼쳐놓는 산수유의 모습처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상위마을은 여순 10.19사건 및 빨치산 토벌로 인해 수난의 시대를 겪기도 하였고 여순 10.19사건에 연루되어 토벌대에 붙들려가며 "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한 채..." 19살 처녀 백부전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산동애가 노래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위마을의 산수유여행은 지리산 온천부터 계곡을 따라 이동하면서 상위마을까지 진입한 후 상위마을 중앙을 가로 흐르는 계곡 앞에서 최고 절정을 이루며 정자에 올라서면 마을을 내려다보고 산수유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내려서는 길은 그와 반대로 마을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면 정겨운 시골운치와 함께 산수유를 볼 수 있다. 여행을 마치며 섬진강 여행은 봄바람을 따라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이면 녹색향연이 펼쳐지는 야생화 차밭이 기다리고 있으며, 가을이면 지리산 골짜기의 단풍도 아름답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은 생각 외로 많은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풍경과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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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도심 속 항만도시2009-04-09
용두산공원 영화 친구에서 부산 야경을 내려다보며 주인공이 이야기를 나눈 곳이 과연 어딜까? 그 멋진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부산을 대표하는 부산타워로 바로 용두산 공원이다. 소나무가 많아 송현산으로 불리던 곳을 1898년 풍수설을 신봉하는 일본인 승려에 의해 산의 형태가 흡사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하여 용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공원 내 신사를 크게 지었다. 오늘날 까지 우리는 용두산 공원을 그냥 부르고 있지만 서둘러 일본 승려가 마음대로 작명한 용두산을 송현산으로 환원할 필요가 있겠다. 해발 49m 용두산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1만2천 평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일본신사가 있었지만 해방과 함께 일본신사는 헐려 사라지고 한국 전쟁 당시는 피난민들이 형성한 판자촌 지역으로 변했지만 1954년 12월 10일 판자촌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자 나무를 심고 1957년 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불리다 4.19혁명으로 우남공원은 오늘날 용두산 공원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용두산공원은 부산 바다를 상징하는 오륙도와 함께 육지에는 부산탑이 있다. 해발 69m에 높이 120m로 정상에 있는 전망대는 불국사 다보탑의 보개를 형상화하여 만들고 중앙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타워 전망대까지 이동하며, 그 앞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용두산 공원의 상징인 꽃시계탑, 미술관, 수족관, 용상, 4.19혁명탑, 국민교육헌장비,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 및 1996년 12월 만든 부산 시민의 종이 있다. 1973년 11월 21일 완성된 부산타워는 총 높이 120m로 승강기 2대가 운영 중이며, 청동으로 제작된 충무공 동상은 높이 12m이다. 태종대 예로부터 많은 묵객이 찾아와 해안절경에 심취하여 자연과 함께 노닐던 태종대의 생성시기는 12만 년 전으로 제4기 최종 간빙기 이후 부산만의 간헐적인 융기운동에 의하여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쥐라기 마지막 무렵 공룡이 활보하였고 신라 무열왕이 삼국 통일대업을 이룬 후 전국을 순회하다 태종대의 해안 절경에 반하여 오늘날의 태종대로 부른 천하절경의 명소이다. 태종대 망부석 일대에서 발견된 90여개의 발자국은 망부석과 인접한 두 개의 평지로 4백여㎡ 와 동편 바위 일대 8백여 ㎡로 백악기시대 공룡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룡의 발자국을 추정해 보면 높이가 15m, 무게가 20t 가량의 초식공룡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다. 태종대 공룡이 부각되는 이유는 인접한 고성 상족암 보다 1천만년 뒤의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가장 후기의 발자국으로 추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룡의 발자국은 이 일대가 호수로 융기파식대로 퇴적층에 찍혀있는 발자국 위에 시대를 달리하는 퇴적물이 쌓이고 굳어지는 과정을 통해 바다에 잠겼다 융기되면서 노출된 것으로 삼면의 바위가 모두 수직으로 솟구쳐 올라 이 일대에 더 많은 발자국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태종대 해안단구의 특징은 지반이 융기하거나 낮아지면서 형성된 흔적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전형적인 융기 파식대로 이곳에서 공룡의 발자국이 발견된 것은 지나칠 수 없는 해안 융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종대의 암반은 1억 년 전부터 8천년 전 사이인 중생대 백악기로 주장하는 설에 의하면 1년에 1.4mm씩 솟아오르면서 태종대가 형성되었으며, 지금도 파도에 의하여 침식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언젠가 태종대의 두 개의 돌출부분은 갈라지고 떨어져 나갈 것으로 예측이 가능하다. 태종대의 개방은 1967년 건설교통부에서 유원지로 고시하고 1969년 관광지로 지정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후 1970년 태종대 해안선을 따라 총연장 4.3km의 도로개설을 착공, 1973년 완공하고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태종대의 명물이 하나씩 자리 잡았는데 기암바위가 만든 신선대(사선암)와 왜국에 잡혀간 지아비를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영도남항을 불 밝히는 등대, 주전자를 닮았다는 주전자섬 등이 있다. 태종대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몇 가지 구전이 동래부지에 전해져 온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무술을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설과 통일을 이룬 태종무열왕이 궁인을 대리고 와서 비경을 즐기며 놀았다는 설, 태종무열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궁인이 마중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는 설, 태종무열왕 사후의 장소였다는 설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태종대는 단비를 기다리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동래부사가 직접 기우제를 통해 가뭄해소를 빌었는데 기우제 역시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있다. 태종무열왕이 병환으로 있을 당시 가뭄이 심해져 자신의 치료보다 단비를 기다렸지만 5월초 열흘날 결국 승하하였고 기우제를 통해 음력 5월 초열흘날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 부르기도 했다. 태종대는 무료입장을 실시하면서 승용차진입을 통제하고 다누비열차를 대신 순환도로를 따라 운행한다. 다누비열차는 하절기( 4월~10월) 09:00~24:00 09:00~22:00, 동절기(11월~ 3월) 09:00~21:00 09:00~20:00 운행되며, 아침 안개가 피어나는 시간에 순환도로를 산책하는 기분은 묘한 느낌을 주며, 순환도로에 피어나는 철쭉과 자생하는 해송, 겨울철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백꽃은 환상적이다. 송도 암남공원 암남공원은 부산 쪽빛바다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탁 트인 전망과 함께 크고 작은 선박들이 머물러 있는 모습, 자갈치 항구로 몰려가는 배가 물살을 가르는 모습 그리고 영도에서 송도를 잇는 남항대교의 곡선을 두루 볼 수 있는 곳으로 많은 낚시꾼이 주차장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여가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다. 송도해수욕장과 암남공원은 해안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잇고 인근을 약 12만평의 자연 상태 공원으로 중간 중간 구름다리를 설치하여 바다 전망과 함께 지겹지 않도록 배려해 놓았다. 1972년 공원화 된 후 1996년 개방과 함께 주변을 단장하였다. 암남공원의 특징은 바다 위 머물러 있는 대형급 선박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비로소 부산이 항구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곳이다. 암남공원에서 해안데크를 따라가면 송도해수욕장이 나온다. 부산에서 제일 먼저 개장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송도해수욕장의 백사장 길이 800 m, 너비 50 m, 평균수심 1~1.5 m로 지금도 좋은 경관을 자랑하지만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에 밀려 지금은 주변 사람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민주공원 및 중앙공원(구. 대청공원) 민주 부마항쟁 20주년 기념사업으로 개원한 민주공원은 부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청공원에 자리한 민주항쟁기념관으로 1999년 개관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 대한 민주주의 교육의 체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민주공원은 일제 감정기 당시 항일투쟁을 시작으로 4.19민주혁명, 부마민주항쟁, 6월항쟁 등 민주 항쟁관련 다양한 자료가 전시.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민주공원 맞은편에는 중앙공원으로 1948년 이후 국가를 위해 순국한 7,704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충혼탑이 자리잡고 있다. 중앙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대청산에 몰려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던 부산에서도 가파르고 높은 지역으로 이 일대의 주민들이 전망 좋은 곳에 휴식처를 만들면서 대청공원이라 시민들에게 알려져 왔다. 대청공원에서는 부산역을 비롯하여 부산항과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1986년 정식으로 중앙공원이란 명칭과 1999년 민주공원이 나란히 자리 잡았다. 또한 공원 정상에는 1948년 이후 국가를 위해 순국한 7,704의 호국영령을 모시고 높이 70m의 충혼탑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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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시 선진리성~삼천포항 벚꽃 낙조여행2009-04-05
남해고속도로 사천IC에서 하차 후 남해, 삼천포항 방향을 따라 진행하면 첫 번째로 만나는 곳이 사천 선진리성이다. 일본군 점령 당시 왜성으로 축조되었다하여 소외되던 선진리성은 지금도 일부 성문 및 성곽을 일본에서 자료를 가져다 재현해 놓았는데 성 안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의 벚꽃이 성 외곽을 따라 피어나며, 특히 낙조 무렵 벚꽃을 감상하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출전시킨 해협이 붉게 물들어 벚꽃과 환상을 이룬다.일본 왜성으로 전해지면서 잊혀진 선전리성선진리성은 한때 왜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전국최고의 벚꽃군락지로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신진리성은 과연 왜성일까? 잘은 알 수 없어도 그곳에서 피 흘리며 산화한 이름 없는 병사는 분명 신지리성을 사수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졌으리라... 선진리성은 이순신장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옥고를 치루고 나온 후 거북선을 건조한 아군은 1592년 05월 28일 이곳 신진리성 앞 바다에서 처녀출전을 통해 왜선 12척을 격파하는 승과를 거둔다. 정유재란 당시인 1598년에는 조. 명연합군과 왜군간의 처절한 전투를 통해 명나라 장수인 팽신고가 대패한 뼈아픈 현장이기도 한 이곳에는 100년이 가까운 벚꽃이 지천에 널려져 그날의 처참한 기억들을 뒤로한 채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성이 있는 산등성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삼면이 바다인 탓에 지리적 요건으로 중요한 요새역할을 하여 왜군과 조선수군간 치열한 자리다툼을 한 곳으로 충무공 해전승첩비와 토성이 아직도 남아있다. 선진리성은 왜장 가토가 만든 울산 학산산성, 서생포성을 비롯하여 기장 묵성리성, 부산진 지성, 웅천 안골포성, 김해 죽도성 그리고 선진리성이 왜성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자료에 의하면 선진리성이 왜군이 만든 왜성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597년 12월에 왜군 시마즈가 수축. 성곽주변을 토성으로 쌓고 일부 중요한 곳에는 석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왜군이 토성을 쌓았을까? 외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퇴각하는 왜군의 거점으로 급하게 만들려면 그곳 지형에 널려있는 자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선진리성은 흙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거의 돌을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시간에 쫒긴 왜군은 임시방편으로 흙을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여러 갈래로 나누어 왜군과 전투를 벌려온 명군은 시마즈가 있는 사천을 향하였고 왜군은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미 신진리성에 주둔시킨다. 이 사실을 모르는 명군 팽신고 부대는 이곳에서 무려 3000여명의 시상자를 내면서 승리하게 되지만 이내 성을 내 놓게 된다. 싸워서 성을 함락시킨 것이 아니라 신진리성을 손에 넣은 시마즈는 뜻밖에 본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게 되고 싸움을 통하지 않은 채 성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이 사실들이 왜성임을 굳게 확신하게 만드는 대목이지만 이와는 좀 더 먼 이야기를 하고 싶다.정유재란 당시 이곳에 왜군이 전략적 요충지로 교도부를 확보하면서 왜성으로 불리는 비운을 격지만 정작 왜군이 아무것도 없는 땅위에 스스로가 토성을 쌓고 요새로 만들었나 하는 것이다. 퇴각하는 왜군의 집결지로 급하게 쌓았다는 것은 분명 뭔가 기초가 되는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 이곳에는 왜군이 점령하기 전에 뭐가 존재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진리성은 일본 측의 기록인 도진가기에서 밝혀둔 것이 전부이다. 일본이 우리의 많은 부분을 왜곡시켜온 것으로 볼 때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선진리성의 지명은 조선 후기 수군이 전선소를 설치하면서 선진, 선소로 불리게 된다. 구한말에는 화계, 1914년 행정구역 재편성때 선진이라는 지명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여기서 선진이 화계로 불리운것은 당시 만개한 벚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려 초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에 고통양창이라는 것이 나온다. 인근에서 거둔 조세를 조정에 받치기 위하여 모우는 12조창 중 하나로 그 규모가 3.086척이라는 기록을 볼 때 이미 이곳은 비록 성곽의 규모를 갖춘 성은 아니지만 거두들인 조세를 모우고 지키기 위해서 큰 건물과 외곽을 경비할 성곽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냥 가져온 조세를 창고에 넣어두고 병졸 몇 명으로 지킨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모든 정황을 근거로 볼 때 당시 조세창을 경계하기 위하여 일부 토성이 아니거나 토성을 겸한 바깥 담장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은 패전을 통해 퇴각하는 과정에서 집결지를 물색하는 도중 일본과 가깝고 바다와 바로 연계되는 이곳에 적당한 방패역할을 하는 담장까지 갖추고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 선발된 왜병은 이곳 기존 담장을 따라 토성을 보충하거나 더 연장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의 벚꽃은 무술전투 당시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이곳을 매입해서 공원을 만들고 정상에 사천신채첩지비라 새긴 비석을 만들고 주변에 벚꽃을 심었지만 해방직후 주민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지금은 사천해전승첩비가 서 있고 전몰자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령비와 매향비가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다.국내 낙조여행지로 알려진 사천실안낙조비토섬을 돌아 다시 삼천포항 방향으로 따르면 갓 잡아 건져 올린 죽방렴 그물에 걸려든 충혈 된 눈동자들이 사천의 작은 섬을 불 밝혀 놓고 동공을 멀어 버리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실안낙조는 남해여행의 길목에 자리 잡고 오가는 여행객의 마음속에 노랗게 타다 붉게 사그라지는 열정을 아낌없이 보여주기에 새천년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전국 9대 일몰여행지로 당당하게 선정되었다. 일몰이 시작되면 죽방렴으로 향하는 뱃길이 바빠지고 일몰이 절정에 달하면 되돌아 나오는 뱃길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과히 환상적이다. 해가 섬으로 살짝 넘어가면 이번에는 남해로 잇는 연륙교의 야경이 남은 아쉬움을 달래주는 그야말로 야간 길목의 최고 여행지가 따로 없다. 일몰을 보고 다음날 일출도 볼 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는 기회로 실안동의 낮은 밤이 되어도 꺼질 줄 모른 채 가슴속에서 이글꺼리며 재촉하고 있다. 실안마을을 잇는 대방동과 실안동 사이에는 고급 카페와 쉬어갈 공간이 몇 있다. 일몰은 해안도로를 따라 실안 소공원 방향으로 진입하는 것이 좋으며, 실안동 해넘이의 장관은 죽방렴 기둥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모습과 금빛을 가르고 지나가는 고깃배 그리고 저도, 마도, 둥근섬, 신섬, 늑도, 학섬, 초양섬, 모개섬, 코섬 등으로 많은 유무인도를 넘어가는 낙조의 모습이다. 실안낙조가 사람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그 여운을 남겨놓는 이유는 거센 파도가 없다는 점이다. 물의 유속과 달리 남해도와 창선도로 인해 실안낙조가 있는 일대는 그야말로 평온 그 자체로 흡사 호수에 온 착각을 통해 환상의 낙조여행 코스를 만들어 낸다.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사천연륙교실안낙조 전망대는 곧장 연륙교로 이어진다. 연륙교를 건너 남해군으로 진행하거나 지친 허기를 삼천포항에 들러 싱싱한 횟감으로 배를 채우고 고성군으로 향해도 좋다. 새로운 명물로 부각된 연륙교는 교량이 연이어 이어져 전국의 연륙교를 다 전시해 놓은 듯 다양한 연륙교를 자랑하며 남해 지족으로 이어져 있다.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부를 관통하면서 바다와 이웃하는 그 즐거움은 배가된다. 삼천포에 접어들자마자 이정표를 따라 진입하면 남해대교와 비슷한 첫 번째 다리인 삼천포대교가 나온다. 사천 대방동을 출발해서 모개섬을 잇는 3경간 강합성 사장교로 길이가 436미터에 이르며,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곧장 이어지는 다리가 일반다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늑도대교를 지나간다. 늑도대교는 초양섬에서 늑도로 잇는 340미터로 2경간 피시박스 상자형교이다. 중간에 섬이 주춧돌 역할을 한다. 늑도대교를 지나면 붉고 선명한 다리가 정면에서 마주하는데 모양섬과 초양섬을 잇고 있는 202미터의 다리로 하나의 원을 반으로 짤라 상단부를 올려 중로식의 초양대교이다. 초양대교를 지나면 창선대교가 섬을 잇고 남해로 들어선다. 창선대교는 이미 남해에서 한번 무너진 후 다시 만든 것으로 기존교각의 자리에 위치하고 그 옆으로 바다의 아름다움이 개벌 냄새와 함께 물씬 풍겨져 온다.교각과 교각을 교묘하게 섬을 두고 이어져 있는 연륙교는 사천에서 남해까지 마치 대교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저마다의 다리가 각자 다른 모습을 한 7개 교량이 연결, 총 2.1km에 이른다. 1994년 공사를 시작으로 9년 만에 완성된 교각 중 삼천포대교는 순수 국내기술로 제작하여 더욱더 의미가 깊고 국내에서 작은 섬을 서로 잇는 국내 최초의 건설은 앞으로 다 많은 섬이 육지로 탈바꿈 할 수 있는 전환점이 아닐까 싶다.연륙교는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 어쩌면 밤 보다 해질녘 노을과 함께 잠시 후 연륙교 교각을 밝혀주는 불빛이 점등되는 그 순간이 더욱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연륙교는 바다를 건너기 전 낙조로 아름다운 실안낙조 해안을 따라 진입하면서 연륙교 진입 후 오른편 공간에서 낙조를 감상하고 다리를 다시 돌아 나와 야외주차장에서 연륙교 야경을 올려다 볼 수 있다. 연륙교를 지나면 곧장 남해군으로 지족대교 좌, 우로 펼쳐진 죽방렴을 구경하고 상주해수욕장이나 남해읍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삼천포항우리나라 5대 미항 중 한곳인 삼천포항은 남해안에서 큰 어항에 속하는 항내수 면적 213만 6000 m2으로 항만법상 1종항에 속한다. 한때 삼천포 쥐포가 유명하던 시절 삼천포 어항 주변은 쥐포를 말리는 장관을 연출하였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그곳에 횟집이 자리하고 있다. 삼천포항은 1966년 4월 16일 개항하여 많이 쇠락하였지만 지금도 한려해상 기항지로 손색없다. 횟집단지로 들어서면 고기를 수족관에서 직접 골라 이층에서 재료비만 주고 매운탕까지 먹을 수 있으며, 마른 건어물이 단지내 입구와 도로변 그리고 항구를 따라 형성된 어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삼천포항에서 고성군으로 진입하면서 하이면 상족암군립공원 및 계승사를 거쳐 옥천사 그리고 당항포국민관광지에서 세계공룡엑스포를 여행하거나 삼천포항에서 남해군으로 진입하여 죽방렴 및 독일마을, 나비생태관을 돌아 상주해수욕장, 가천 다랭이마을, 금산을 경유하여도 좋다. 벚꽃시즌에는 남해대교에서 하동으로 잇는 국도를 따라 하동으로 진입하면서 벚꽃을 감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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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작천정~등억온천 벚꽃 드라이브2009-04-05
언양군 작괘천 입구에는 오랜 수령의 벚꽃길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작괘천입구부터 작천정까지 그리고 등억온천까지 도로를 잇는 벚꽃터널 중에서 작괘천 벚꽃은 장터가 형성되어 벚꽃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등억온천 지구에 진입하면 도깨비도로부터 가로수로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고목이 된 벚꽃의 고고한 자태 “작천정 벚꽃길”축제기간 일명 작천정이 가까이 있다하여 작천정 벚꽃 길로 불리는 약 500m 거리는 지나친 풍물시장으로 고목이 된 벚꽃을 가려 놓는다. 작천정 벚꽃은 1936년~39년 삼남면 곽해진 면장이 면서기였던 지역주민과 함께 황무지였던 천변에 식재한 것으로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다리에 총알이 관통되는 등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고 1939년 52세로 타계하자 그 뜻을 기려 지금은 상북 경의고등학교 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시인 묵객이 즐겨찾던 ”작천정“작천정 벚꽃길이 끝나면 곧장 작괘천과 서예가 김성근씨가 현판을 올린 작천정이 자리 잡고 있다. 작천정 앞 맑은 청류는 간월산(1,083m)에서 모여든 계류가 모여 큰 계곡을 이루는 곳이 작괘천이며, 작괘천을 배경으로 올라앉은 정자가 바로 작천정이지만 흔히들 이 일대를 작천정이라 부른다. 작천정 일대는 봄철 만개한 벚꽃을 시작으로 여름철 계곡을 찾는 피서객으로 넘쳐나며, 가을이면 간원산 단풍과 신불산 억새를 향한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곳.세종 20년 이 일대의 학자들이 세종을 생각하며 만든 정자 작천정은 작괘천 암반층이 흡사 술잔을 주렁주렁 매달아 둔 형상을 닮았다하여 작천정으로 어원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작괘천은 냇물이 흘러가면서 만든 암반의 패인모습이 큰 것은 절구, 작은 것은 술잔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자갈돌을 헤집고 내려온 물살은 비로소 작천정 앞에서 크고 작은 반석위에 수정같이 맑은 물을 뿌려 놓는다.작천정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 시인 묵객의 발걸음을 대신하여 한때는 고려 말 유배온 포은 정몽주 선생이 자주 찾던 곳이며, 3.1운동을 준비하며 의기투합하였던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순국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천주교, 천도교가 들어왔을 당시는 노천교회로 자리를 내 놓은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누각 건물로 울산군수 최시명이 1900년 착공하여 1902년 준공하고 서예가 김성근이 현판을 올렸으며 1944년, 1955년, 1967년, 2005년 중건했다.작천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고목 왕벚꽃나무길이 500m 터널을 이루고 봄이 되면 상춘객을 유혹하며, 인근에는 자수정동굴, 등억온천, 반구대암각화, 천전리각석 을 비롯한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작천정에서 계속 진입하면 자수정 동굴과 등억온천길로 나누어 진다. 봄이면 등억온천길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온천욕을 즐기려는 사람, 등산을 하는 사람이 찾는 곳으로 모텔촌이 형성되어 있으며, 자수정 동굴은 모터보트를 타고 동굴안을 탐사하거나 걸어서 신비한 자수정 동굴을 두루 여행할 수 있다. 또한 등억온천 지구 입구는 신비한 착시현상을 불러오는 도깨비도로와 문화재가 많은 간월사지가 함께 공존하고 있어 작천정을 출발점으로 자수정동굴-도깨비도로-간월사지를 여행하고 지친 심신을 등억온천에서 풀거나 홍류폭포까지 등산을 쉽게 연계 할 수 있다.국내 최고의 “자수정동굴”자수정동굴에 과연 자수정이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자수정은 거의 없어 자수정 동굴에서 파는 자수정 역시 진품이라고 보기 힘들다. 연인들에게 사랑받는 2월의 탄생석 자수정은 주로 반지, 브로치, 목걸이 등 여성의 액세서리에 사용되며, 동의보감에는 약재로도 사용 된다 기록하고 있을 만큼 자수정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보석으로 자주색을 띠어 자수정으로 불린다. 일제점령기 당시 광산개발은 불법이였지만 해방과 더불어 별다른 장비도 없이 광산 붐이 일어났고 1891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보석광산으로 알려지면서 제일광산주식회사를 설립 후 본격적인 광물채굴을 하면서 국제 인증기관으로부터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던 자수정동굴은 폐광된 후 폐갱도를 활용하여 국내 최초로 인공 동굴 관광지를 조성하였다.자수정동굴은 한국자수정산업관광주식회사가 동굴공원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동굴 길이 2.5km 5000여 평을 개방하고 동굴 내 실내온도는 10∼14℃로 여름철에는 풍혈바람이 나올 정도로 시원하며, 겨울에는 포근하여 사철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자수정 동굴 내부에는 자수정전시관, 독도관, 인류변천사관, 인도네시아 원시부족 풍물전, 동굴음악당, 동굴법당, 동굴폭포가 있으며, 야외에는 썰매장과 폭포, 산책로, 도자기촌,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입장료를 포함하여 시설 이용료가 비싼 게 흠이다.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등억온천 벚꽃길”국내 온천단지 중 가장 큰 규모인 22만평 부지 위 온천과 숙박업소, 위락시설을 갖춘 대단위 온천타운으로 알칼리성 중조천 수질로 피부병과 신경통, 소화기 질환, 기관지염, 고혈압, 피부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등억온천을 찾는 사람이라면 텅 빈 온천과 상대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대중탕 또는 가족탕을 만날 수 있는데 한 때 등억온천 일부업소에서 지하수 및 냇물을 끌어다 혼합하여 가짜온천수를 사용하다 적발되어 온천객으로부터 외면을 받기 시작하면서 빈 건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등억온천은 신불산 자락에 위치하여 등산객에게 좋은 휴식처로, 인근 자수정동굴을 찾는 어린이 또는 가족형 휴식처 및 봄이면 벚꽃 길과 여름이면 계곡물이 넘쳐 드라이빙을 즐기는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지만 지금은 국내에서 가장 조용한 온천단지로 변해버렸다.신비한 이적현상 “도깨비도로”자동차 기어를 중립으로 하고 비상등을 켜고 오르막 앞에서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 차가 저절로 오르막을 향하여 움직이는 신비한 도깨비도로가 울산광역시에도 있다. 등억온천 단지 입구에 있는 벚꽃터널 4차선 도로를 진입하면 바닥 유도표시에 “ START"라고 적혀있고 친절하게 안전지대까지 표시해 놓고 있다. 그곳이 출발지점으로 재미나는 실험을 할 수 있는데 그 해답은 착시현상 일뿐 실제로는 약 80cm 정도의 내리막길로 4차선 도로 중 80m 구간에서 발생한다.주의: 도로를 진행하는 차량과 실험을 하려는 차가 뒤엉켜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안전에 유의하고 확인.사라진 옛 절터에 남겨진 유물 “간월사지”울산광역시기념물 제5호 간월사지는 신라 진덕여왕 당시 자장스님이 창건한 고찰로 임진왜란 당시 폐사되고 인조 12년(1634) 명언이 다시 짓지만 헌종 2년(1836) 다시 폐사되고 1984년 발굴을 통해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와 석탑 2기, 축대, 주춧돌, 장대석을 확인하였고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기왓조각, 질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당시 상당한 규모를 갖춘 양탑일당식 가람으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 우에 각기 하나씩의 삼층석탑을 두고 있다. 지금의 간월사지에는 작고 초라한 전각 2동이 있다. 입구에 있는 전각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370호)를 봉안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2기의 석인상과 1기의 탑신만 보이고 뒤편으로 요사채와 산신당이 있다.간월사지 쌍탑 중 서쪽(등억온천방향)에 있는 탑과 동탑이 있는 위치는 동탑의 경우 암반층이 없는 평지에 가까운 반면, 서탑은 암반층 위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 우 거리를 맞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점과 탑에 새겨진 인왕상의 모습은 완벽에 가깝다. 간월사지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앉은 키 1.35m, 머리 높이 46cm, 무릎 너비 1m의 비교적 안정감이 있는 9세기 불상으로 방치되어 오다가 불상의 목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복원하여 1979년 전각에 모셨다. 간월사지 2기의 석탑은 금당지 좌. 우에 매몰되어 있던 석탑을 복원한 것으로 탑신의 각 면 중앙에 문비를 새기고 3단의 턱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75cm의 인왕상을 새겨놓은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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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군 나비축제 및 주변 따르기2009-04-05
함평군 나비 곤충축제 국내 지방자치제 축제 중 손가락에 드는 나비, 곤충 축제는 함평군 함평엑스포공원에서 진행된다. 함평엑스포공원은 총 109만㎡으로 함평천을 비롯 군내 일원에서 다양한 경축행사를 비롯하여 생태학습 축제를 매년 4월~5월 개최한다. 공원 내에는 다양한 대형 곤충 캐릭터와 함평천의 24만 평 유채꽃길, 국내 서식 나비 4과 70여종 5만 마리와 세계각국 수천 마리의 나비 등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하늘빛을 쫒는 훌통해수욕장나비축제를 보고 지도로 달리면서 서해안 바다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해제면 지도로 들어서면서 첫 번째 목적지로 무안군 오류리에 있는 홀동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서해 해수욕장이 남해와 동해에 비하여 밋밋한 멋 때문에 찾는 곳으로 홀통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물 빠진 개펄에서 낙지를 잡는 모습과 뻘 위에 덩그렁 하게 남겨져 있는 작은 배, 끝을 알 수 없는 조용한 파도의 교차 그리고 구름사이를 헤집고 비추는 해내림은 서해안의 특별한 것이 없는 듯한 매력이다. 홀통해수욕장은 길이 1,500m, 폭 20m 로 천혜의 자연 발생적 유원지로 곰솔과 해양스포츠로 알려진 파도가 거의 없는 해수욕장으로 모래는 거의 굵은 사질로 멀리서 보면 하늘의 구름이 조용하게 내려앉은 듯 침묵만 할 뿐이다. 훌통해수욕장 가는 길목에 팔방미인마을이 눈에 띈다. 해안 쪽으로 갈대숲과 멀리서 확인이 어려운 해송 한 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갈대와 어울려 있다. 훌통해수욕장을 나와 중도와 도리포 갈림길에 잠시 멈칫하다 우선 중도를 찾기로 했다.단일 규모 최대 소금창고 중도가는 길해제군 지도면에 도착하면 중도와 도리포로 향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중도로 향하면 지도대교 아래 수협 송도위판장에서는 새우젓갈류를 경매하느라 분주하다. 수협 송도위판장을 떠나 사옥도로 진입하면 중도로 향하는 신개리 선착장 못미처 제법 큰 규모의 소금창고가 도로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염전과 만나게 되고 바닷물이 증발하여 소금이 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곳이다. 신개리 선착장에 도착하면 국내 단일 최대 염전이 있는 중도 버지선착장을 잇는 철부도선이 왕복 운행되며, 지금은 교량건설이 진행 중이다. 중도 가는 길목은 크고 작은 염전이 자리 잡고 신기함을 더해줬다. 특히 송도 선착장 수협에서 경매되는 새우젓갈의 모습에 입이 고래처럼 떠억벌었졌다.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모습에 넋 나간 표정이랄까? 소금창고와 지도다리를 지나면 신개리선착장에 도착한다. 송도로 향하는 철부도선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심한 뱃멀미 걱정에 중도 진입은 포기하고 중도 앞에서 건져 올린 조기가 햇살에 뻐득뻐득 굳어가는 모습에 만족해야 했다. 저 섬에만 도착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단일 소금농장을 볼 수 있는데... 솔섬에서 지도대교를 건너 사옥도로 진입하면 중도가 코앞에 있지만 지금은 교량건설 중으로 신개리 선착장에서 중도 버지선착장까지 철부도선이 왕복운행하고 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소금창고부터 찾았다. 일행에서 신기한 것은 평평한 바닥에서 빛나는 물체의 궁금증 이였고 차량은 소금밭 사이로 향했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차에서 내려 확인한 결과 타일이 아닌가. 타일은 뜨거운 태양열을 반사시켜 소금을 만드는 하나의 비결이란다. 소금밭에는 소금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땀 냄새가 빼어나는 밭두렁을 밀대로 밀고 다니는 모습은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이 결코 한가롭지 않다는 것이다. 소금창고를 떠나 다시 송도 수협위판장에 들렀다. 4월 새우젓, 5월 갑오징어, 6월 벵어, 8월 민어가 널린다. 신안군 99개의 섬에서 잡아 올린 수산물이 몰려드는 곳으로 사계절 간재미, 송어, 병어, 농어, 낙지가 대표적이다.도리포로 향하다중도와 도리포 갈림목에서 이번에는 도리포로 방향을 잡았다. 도리포로 향하는 길은 온통 짙초록 색상으로 양파와 마늘, 쪽파, 양배추가 자리 잡고 바다에는 김양식장이 연초록 세상을 펼쳐 놓는다. 바다건너 영광군과 마주한 도리포는 서해 낙조로 아름다운 곳이지만 잔잔한 바다와 답답한 조망권으로 사실 해수욕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곳이다. 동해안을 자주 찾는 여행객이라면 다소 실망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도리포 앞 송석리 바다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유물 고려청자가 무더기로 건져 올린 역사적인 곳으로 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리포 해제반도 끝자락에 위치하여 해넘이와 해돋이는 서해에서 드문 일출과 일몰 여행지로 겨울에는 함평 바다에서 일출이 시작되고 도리포구 반대편 영광 칠산바다로 일몰이 진행된다. 특별한 볼 꺼리가 없다. 오죽하면 바다의 파도마저 소리 없이 밀려왔다 머물기를 잠시한 후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갯벌을 드러내 보이겠는가. 지도로 여행하는 것은 특별한 만남보다 붉은 황톳빛과 연초록이 펼쳐놓은 세상을 달려가는 색다른 여행이다. 바다의 김밭도 봄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연초록 손을 흔들어 보여준다. 봄바람에 무럭무럭 자라난 마늘과 대파가 그냥 한 뿌리 뽑아들고픈 충동을 줄 만큼 도로변에는 그야말로 생명의 빛으로 물들어 간다. 바다라고 그냥 조용하지만 않다. 갯벌 저 깊은곳을 삽으로 후비면 낙지가 올라온다. 특히 이곳의 낙지는 맛 좋기로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소금염전이 타 들어가듯 지도는 그렇게 봄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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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부산 삼락공원 유채꽃밭길을 거닐며2009-04-02
부산시 사상구 낙동강변에 다양한 체육시설 및 화초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개발은 삼락공원을 시작으로 대저지구 및 화명지구를 잇는 대단위 사업으로 봄이면 샛노란 유채꽃의 장관을 시작으로 들꽃과 갈대가 옷을 갈아 입는다. 갈대의 보고 낙동강 삼락공원낙동강 둔치를 활용한 삼락강변공원은 불법경작지를 원상회복하고 그 장소에 시민휴식공간을 조성하여 친환경적인 공간으로 탈바꿈 시키면서 북구 금곡동에서 화명동에 이르는 141만㎡의 둔치를 꾸준하게 개발하여 자연친화적인 생태하천으로 가꿀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삼락강변공원은 사상구에서 진입하는 낙동대교 아래편 좌, 우측에 위치한 공원으로 체육시설과 이동화장실, 인공수로, 수생식물원을 만들고 들꽃을 가꾸어 산책로를 조성하고 쉽게 낚시를 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삼락강변공원은 총 471만9천㎡이며, 염악지구인 맥도생태공원은 254만1천㎡이다. 또한 2010년 까지 대저지구 266만㎡을 개발 중이며 화명지구도 개발에 들어간 상태다.삼락지구는 4월이면 고속도로변 아래 유채꽃단지가 노란 물결로 장관을 이루고 5월 자산홍, 영산홍, 철쭉이 피어나며 봄부터 가을까지 감전야생화단지에는 아름다운 꽃망울이 쉴 틈 없이 피고지기를 거듭한다.부산 유일의 낙조가 숨어드는 다대포해수욕장다대포 해수욕장은 부산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수욕장으로 한때 군부대가 장악하여 폐장위기 까지 갔지만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가족동반 피서지로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가족단위 피서지로 해수욕장 개간 기간 중 부산국제락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다대포해수욕장 백사장 길이는 1000m로 썰물 때면 폭 300m이상 펼쳐지며 수온이 따스하고 깊지 않으며, 파도가 심하지 않아 안전하게 피서를 즐길 수 있으며, 을숙도 앞바다로 사라지는 낙조와 철새 그리고 몰운산에서 낚시와 조용한 삼림욕과 산책까지 두루 겸할 수 있는 곳이다.다대포 해안자락을 왼편 돌출부분에 있는 몰운산은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왜적을 상대로 전쟁을 치룬 지역이자 정운장군이 몰운대에서 전사하자 "몰운"이란 지명과 함께 몰운대 정자가 생겼다. 몰운이란 지명에는 전쟁을 치루기 전 장군의 비통한 심정과 최후까지 왜적을 방어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데 이는 정운 장군의 "운"이 한자로 몰운대의 "운"과 같아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였다는 속설이 전해진다.낮보다 밤이 뜨거운 다대포해수욕장 서남쪽 해발 78m 몰운대는 부산시 기념물 제27호로 삼림욕장을 거닐 듯 산책을 할 수 있는 산책로와 낚시터,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져 있는 명승지이다. 몰운대는 강 상류의 토사와 퇴적물이 섬을 잇는 길목에 모여 몰운도 섬을 육지화 시켜놓았으며, 1763년 일본통신사로 온 조엄은 몰운도 섬을 둘러보고 “몰운대는 신라 이전에는 조그마한 섬으로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아름다워 아리따운 여자가 꽃 속에서 치장을 한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지금도 다대포와 몰운대 주변은 파도가 거의 없이 고요하며, 동래부지에는 몰운대 지형이 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형상으로 표현하였으며, 몰운대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이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몰운대라 불렀다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몰운산에 있는 다대포객사 주변 경관을 두고 몰운대라 부르며, 동쪽 벼랑 위를 화손대로 알려져 있다.몰운대 중간지점에 있는 부산 문화재 기념물 제3호 다대포객사는 1970년 구한말 당시 사립다대실용학교 교실로 사용하다 현 다대초등학교 남쪽 정문 서편에 있던 것을 복원 옮겨 놓았으며, 부산시 문화재 기념물 제20호 순의비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몰운대에서 순절하자 사당과 순의비를 세웠다. 당시 해전을 치루기에 앞서 이곳 지명 운(雲)과 자신의 이름 운(運)이 같은 음이라는 것을 두고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 예언했다고 전한다.몰운대의 뜻말처럼 하구와 바다가 만나면서 구름과 안개가 자주 끼어 낙조가 무척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며, 몰운대 하조대에 올라서 조금만 자리를 옮겨 보면 서쪽과 동쪽 바다를 볼 수 있는 장점을 살려 부산시에는 산책로와 편의시설을 정비 확충하고 낙조 전망대를 설치하여 해안과 연계한 생태관광벨트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예로부터 몰운대 팔경에는 화손낙조라 하여 화손대에 깔려드는 낙조를 칭송했다.낙동강 수위를 저절하는 을숙도 하구언보존이냐 개발이냐를 놓고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는 현장 을숙도는 철새와 갈대, 모래섬, 개벌 등 다양한 염생식물의 생태계 보고로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지만 1987년 4월 낙동강 물길을 가로막아버린 하구언 물막이 공사가 진행된 후 을숙도의 생태계는 급속도로 파괴되어 버렸고 하구언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김해시에 편입되고 부산방면은 사하구 하단1동, 2동으로 줄어들어 총 면적 0.08㎢이다. 하구언에는 물막이 공사 당시 제막탑과 야외자동차극장, 인라인 스케이트장, 문화회관이 생겨나면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탈바꿈하였다.을숙도 하구언에서 낙동강 본류와 죽림강 사이에 발달된 삼각주를 찾는 철새는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될 당시 50여 종, 10만여 마리로 추정 집계되었지만 환경파괴와 함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세계적인 희귀조로 알려진 재두루미, 저어새, 흰꼬리수리 및 백조가 찾아와 동양 제1의 철새도래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최근 환경운동과 함께 을숙도 주변이 많이 변화를 하고 있다. 개벌에서 부쩍 “게”의 모습이 많이 관찰되며, 재첩, 모시조개가 확인되고 갈대숲도 점점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개발이 진행되면서 명지대교 건설로 인해 을숙도에서 자라던 세모고랭이 영역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명지주거지가 형성되면서 비상하는 철새의 장엄한 군무장면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을숙도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노력과 개발의 미명아래 사라져 버린 유명무실한 을숙도를 변화시켜 놓고자 봄이면 노란 유채꽃단지를 조성하여 봄소식을 전하며,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연약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인근 남해고속도로 진입로 주변에는 야생화단지를 조성하여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하도록 발상의 전환을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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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벚꽃의 화려한 낙화 진해 군항제2009-03-30
04월이면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화려한 벚꽃이 만개하여 북상한다. 가냘픈 꽃잎이 봄잎에 떨리는 모습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옛 추억의 꽃이 되거나 새롭게 시작하는 연인에게는 더없이 사랑하기 좋은 가벼운 차림을 통해 도심 속에서 짧은 봄꽃소식에 흥겹다. 벚꽃여행의 일 번지 진해시진해시 일원에는 하얀 눈꽃이 휘날리듯 벚꽃이 지천에 피고 떨어지기를 짧은 기간을 통해 보여주는 전국 최고의 벚꽃여행지로 오랜 고목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진해시도 다양한 행사를 통해 만개한 벚꽃을 맞이한다. 벚꽃여행과 아울러 인근 해안도로를 함께 드라이브할 수 있는 코스를 달리며 봄꽃소식과 함께 찾아온 해산물을 통해 입맛을 느껴 보는 것도 좋다. 해산물 천국 용원시장부산에서 진해방향으로 진입 후 용원시장을 들러야 한다. 지금은 비록 개발이란 미명아래 갯벌이 신음하고 가덕도를 잇는 교량이 가설되어 탁 틔인 전망은 볼 수 없지만 부산에서 보기드문 어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먹거리 난전을 펼쳐놓고 세월만큼 익숙하고 날렵한 흥정과 칼 솜씨로 고기를 다듬어 내는 익숙함은 이곳 용원시장의 진풍경이다. 용원시장의 겨울 진객은 북태평양에서 산란기를 맞아 11월에 회유하는 대구로 이 일대에서 거둬 들이는 대구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데 바로 가덕 대구로 12월이 제철이다. 용원시장에서 거레되는 해산물은 부산 인근항에서 잡는 고기와는 달리 해물종류가 많다. 특히 새조개와 꼬막, 게 등 갯벌에서 잡아들이는 종류가 많고 현지가격이 저렴하다. 단지 시설이 정비되지 못한 탓에 비좁은 횟집골목과 주차시설이 부족하다. 용원은 가덕도로 가는 배편이용하던 선착장이 있던 곳으로 겨울에는 대구, 봄에는 도다리가 시장 자판 위 모양세를 뽐내고 있다.용원시장을 벗어나면 안골포구강을 스쳐 지나간다. 안골포구강은 조선시대 안골포진 계선장에 자연석으로 축조된 방파제이다. 평면 반원형의 웅성처럼 안골포진성의 서쪽 해안에 설치한 이 굴강의 내부에는 빨리 퇴적되고 상단부가 일부 훼손되었으나 수중에는 원상이 양호하게 잔존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존하는 석축의 길이는 47m정도이고, 굴강 내부 폭은 약 20m이다. 안골포진은 조선 세조 8년 (A. D1462)에 설치되었다.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안골포에 주둔한 일본수군의 주력대를 부수기 위해 1992년 7월8일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이 집결하여 한산섬 앞에 배수진을 치고 있던 왜선을 섬멸하고 안골포에 머무르고 있는 수군장 구키와 가토가 이끄는 제2의 수군부대를 10일 새벽 공격하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안골포해전으로 수중에 석축을 쌓고 아군 함선만 드나들게 만들었다.지금의 안골포구 주인은 해상에 솟아있는 조개패목이 전부이다. 지방기념물 제143호라는 비석이 외롭게 방치되다 시피하고 있다. 안골포구강은 진해에서 강서구로 편입되면서 진해보다 강서구에서 찾아가는 것이 훨씬 빠르다. 대중가요 황포돛대 발상지용원시장 난전에 펼쳐놓은 해산물을 뒤로하고 다시 해안로를 따르면 영길만 앞바다를 지나게 된다. 해안관광도로에서 만나는 낯선 탑하나가 해안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 바로 대중가요 황포돛배 노래말을 만든 작사가 이일윤씨가 경기도 연천의 포부대 근무 중 자신의 고향 앞바다 영길만을 회상하며 만든 기념으로 가로 5m, 세로 6m, 높이 7m 규모로 화강석과 청동을 이용하여 세워놓고 작품을 고향의 향수로 칭했다. 영길만은 인근 부산신항 사업으로 전망이 막혀 버렸지만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또한 황포돛배기념비와 흰돌매공원 그리고 삼포로가는길, 군함공원이 연계되어 색다른 해안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황포돛배에 서면 바닥에 발모양의 버튼이 있어 발로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와 당시 분위기를 대신 말해주는 곳이다. 신항을 한눈에 흰돌메공원황포돛대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영길해 안도로 정상부근에 민선4기 시장 공약사업 일환으로 추진된 산림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특별한 볼꺼리는 없지만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신항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간이식당, 화장실 등 드라이브 중간에 쉬어가기 좋은 곳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흰돌메 공원은 육교형 다리를 건너 숲으로 오르면 1.6km 등산길이 나온다. 전망대 주변은 목재데크를 설치하고 꽃으로 주변을 단장해 놓아 시민들에게 휴식장소로 각광받는 곳이다. 자연친화적으로 조성된 공원 명칭은 진해시민이 응모한 것으로 예로부터 이 일대에 하얀 바위와 흰 돌이 많아 백석산, 흰돌메라 불렀다 한다.함상공원진해시 함상공원에 오랜 세월 바다를 누비다 퇴역한 강원호는 전장 119.02m, 톤수 2500톤으로 1944년 10월 미국 뉴욕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1978년부터 한국 해군에 인수되어 동해를 지키다 200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퇴역하여 진해 함상공원으로 옮겨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해시 함상공원은 남해안관광밸트사업의 일환으로 해양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총 82,505㎡(공유수면매립 6,457㎡, 음지도 76,048㎡)부지에 공유수면매립 6,457㎡ 에코빌리지 리조트 3,000㎡, 해전사체험관 1,880㎡ 번 지 점 프 500㎡, 군 함 전 시 관 군함3척 전자게임장 200㎡, 해양생물테마파크 1,925㎡ 해양체험장 2,000㎡, 교량 L=250m 수 족 관 2,000㎡, 선박접안시설 잔교, 도교 등 향토음식점 640㎡, 도로(음지도내) 11,807㎡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기어링급 강원함(DD-922) 및 옥천함(MSC-559) 참수리(PKM-228) 등 3척의 군함은 아군 함대를 방호하고 바다의 기뢰를 제거하는 목적으로 건조되었다. 진해벚꽃길에 바람도 쉬어가고봄이면 진해시 일원이 벚꽃지천으로 진입하는 방향에 따라 제각기 다른 벚꽃을 볼 수 있는데 창원에서 안민도로는 약 4km 도로에 벚꽃과 편백나무가 대조를 이루고 데크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마산을 거쳐 장복산터널을 이용할 경우는 터널입구 옛 도로를 따라 늘어선 벚꽃모습이 절경이다. 장복산터널을 통과하면 장복산공원과 파크랜드공원이 보이며 이 일대가 가장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다.시내로 진입하면 복원로타리 및 중원로타리를 거쳐 제황산공원에 도착한다. 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365계단으로 정상에는 진해탑과 2층에는 시립박물관이 진해의 역사를 말해주며, 전망대에서는 진해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해군항제 기간동안 해군사관학교가 개방된다. 해군사관학교는 차량으로 진입할 수 있지만 주정차가 지정된 공간 외 일반인에게 허용되지 않으므로 입구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진입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해군사관학교 및 해군기지사령부로 평소에는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지만 군항제 기간에는 개방하여 실물크기의 거북선, 이순신 장군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다. 벚꽃은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지는 것 또한 아름답다. 남부내수면연구소 벚나무는 숲을 이루고 낙화모습은 장관을 이루는 드라마 배경지로 알려져 있고, 시내 경화역과 세화여고 사이 800m 벚꽃터널은 복잡한 벚꽃인파를 피해 가족까리 즐길 수 있으며, 철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좋다.진해군항제는 1952년 4월 13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최초로 북원로타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지내면서 시작된 행사로 전국 벚꽃축제 중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장 큰 규모로 진행, 진해시가지 장복산 공원 일대를 비롯하여 벚꽃명소는 벚꽃인파로 넘쳐난다. 진해시 벚꽃은 마산에서 진해로 진입하는 마진터널에서 검문소까지 1.5km 지점이 가장 압권이며, 창원에서 진해로 진입하는 안민도로 5.6km 벚꽃 길은 진해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즐길 수 있으며, 여좌천 1.5km 구간은 드라마 로망스를 촬영한 곳으로 로망스다리라 불리며, 유채꽃과 어우러진 벚꽃과 다리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으로 연인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받는 곳이다.황포돛대-흰돌메공원-삼포로가는길-군함해상공원-경화역-장복산 일원-여좌천거리(로망스촬영지)-중원로타리-해군사관학교-복원로타리-제황산 공원-남부내수면연구소경화역경전선의 창원역과 경부선 그리고 진해항을 연결하기위해 1926년 11월11일 개통 후 7개의 역과 4개의 무배치간이역을 둔 진해선 중 성주사역과 진해역 중간에 1926년 문을 연 경화역이 있다. 경화역은 세월의 흐름 속에 더 이상 운행이 필요 없어졌고 2006년 여객 업무를 중단하였지만 벚꽃이 피는 개화시기에는 상춘객을 위해 운행을 재개하고 있는 곳이다. 경화역에서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선로를 따라 피어난 벚꽃이 만개하면 철길은 벚꽃터널을 이루어 상춘객의 환호성을 자아내는 곳이다. 여좌천 로망스 다리 벚꽃시즌에 진해시를 찾는 연인들은 꼭 여좌천 길로 몰려든다. 특별한 이유라면 지명에서 금방 느낄 수 있을 만큼 2002년 5월 8일~2002년 6월 27일 방송종료 된 MBC 드라마에서 진해군항제를 통해 고등학생 신분이던 채원과 관우는 첫눈에 반해 버린 것. 그래서인지 로망스는 진해여고 옆 하천변이던 여좌천 벚꽃길에서 촬영되었다. 로망스 거리에는 벚꽃이 만개하면 아름다운 모습을 선보인다. 특히 하천변에 유채꽃을 심어 색의 대비가 더욱 뚜렷한 곳으로 여좌천 마을을 잇는 다리가 중간 중간 설치되어져 있다. 해군사관학교해군장교를 정규 양성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모체는 해방과 함께 창설된 해방병단 교육기관인 해방병단학교로 여러 이름을 거쳐 1949년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고 1976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을 건립 이순신장군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무기, 최첨단 해군의 모습을 전시해 놓았다. 벚꽃 군항제 기간 동안 사관학교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화려한 벚꽃 길과 해군진해기지사령부에서 함정을 공개하여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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