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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이상설.
▲시베리아 망명시절의 이상설선생 존영. ▲고종의 헤이그 특사 친임장
[서론]
조국(祖國)을 찾아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큰 어른이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시다. 선생은 제국주의 열강(列强)이 한반도(韓半島)를 에워싸던 1871년(高宗 8년), 1월 27일(음력 1870년 12월 7일) 오늘날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山尺里 山直) 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11대손으로 아명(兒名)은 복남(福男),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 당호(堂號)는 벽로방(碧蘆舫)이라했다. 6세가 되던 1876년에 종통(宗統)을 중하게 여긴 당시의 도의(道義)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던 일가(一家) 이용우(李龍雨)공에게 출계(出系)하여 학문(學問)에 전심하였다.
[과거 및 관계(官界)]
그리고 24세가 되던 해인 1894년(고종 31)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甲午文科) 병과 2등(12等/57명)으로 급제하고, 이미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조술(祖述)할 큰 학자로 칭송될 만큼 학문이 숙성하였다. 그 후 관계(官界)에 나가 한림학사(翰林學士), 다음 26세가 되던 1월 25일 성균관 교수겸 관장에 오르고 승지(承旨) 등을 거쳐 35세가 되던 해인 1905년(광무 9)에는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次官)에 발탁 되었다. 이는 재(才)와 식(識)이 탁월하지 아니했던들 그 당시의 난마(亂麻) 같은 정계에서 그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을사늑약 파기운동]
이상설은 이해말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는 나라와 민족의 비운(悲運)을 맞이하여 순국(殉國)의 결의로 그 조약(條約) 파기에 진력하였지만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다섯 차례에 걸친 사직 소(辭職疏)를 올리어 관직(官職)을 벗고, 저 유명(有名)한 네덜란드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사행(使行)을 비롯한 국권수호(國權守護)와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에 온 생애(生涯)를 바치어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에 새 장(章)을 열었다.
선생은 구학문(舊學問)을 수학(修學)한 왕조관인(王朝官人)이지만, 누구보다도 앞장서 근대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구미(歐美)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섭취하였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 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 보다도 그는 국제정치(國際政治)와 세계대세(世界大勢)를 인식하여 국가와 민족의 진로(進路)를 밝힐 수 있는 당대의 동량(棟梁)으로 추앙되었고, 또한 스스로 앞장서 그를 구현(具顯)하기 위하여 형극(荊棘)에 찬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에 헌신하였다.
[최초의 민족학교를 설립하다]
이상설의 그 같은 활동 중 두드러진 것만을 들면, 첫째, 1906년(광무 10) 4월 18일에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망명길을 떠나 중국 상해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경유 북상(北上)한 한인들이 개척한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 땅에 들어가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자비(自費)로 건립(建立)하여 일백여만의 한인이 사는 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南北滿洲)와 연해주지방에 무상으로 민족주의 교육을 펼치고 나아가 조국광복운동의 기지화(基地化)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전서숙은 그 다음해인 1907년 헤이그로 사행(使行)하는 일로 그의 동지인 여준(呂準)등에 맡겨져 잠시 더 운영되었으나, 곧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폐숙(廢塾)하였다. 그러나 그 설립의 목적(目的)과 이념(理念)은 가까이는 북간도의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서간도의 신흥학교(新興學校), 연해주의 한민학교(韓民學校)로 이어지고, 멀리는 국내외의 각 지방마다 한민족의 터전에는 어디에나 이와 같은 민족교육(民族敎育)이 확대되어 수많은 독립운동(民族運動)의 역군이 배출될 수 있었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
1907년(융희 1/순종의 연호) 6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海牙)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을 대동하고 한국의 주권수호(主權守護)를 위한 국제외교(國際外交)의 사행(使行)에서 그는 온갖 고초 끝에 회의장(會議場)에 당도 하였으나, 국력(國力)의 뒷받침이 없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협상(利權協商)의 성격을 지닌 동회의(同會議)에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치 못하였다.
[유럽 열국 순방 외교]
그러나 그로서는 일제(日帝)에 짓밟히는 한국의 실정을 국제공의(國際公議)에 제기시키고자 최선을 다하였고, 또한 그길로 1908년 7월 19일 헐버트박사와 이위종(李瑋鍾), 윤병구(尹炳球), 송헌수(宋憲樹)를 대동하고 열국(列國) 순방길에 올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의 여러 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東洋平和)의 관건(關鍵)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永世中立)을 주장 하였다.
아울러 영국 방문 중엔 학사원(學士院)으로부터 명예학사 학위를 받았다. 1909년(융희 3) 봄까지의 이와 같은 이상설의 폭넓은 국제적 활동이 민족수난(民族受難)에 접어든 한민족(韓民族)의 독립 문제를 비로소 국제정치에 제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독립활동]
둘째,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 사행 중 대한제국 통감부(統監府>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일본의 통치기구)는 한국 법부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기소하고 1907년 8월 9일 평리원(平理院>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이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은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을 선고함으로서 선생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1909년 까지 일 년 남짓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그해 4월 22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규합하여 국민회를 결성 후 정재관(鄭在寬). 최정익(崔正益). 송종호(宋鍾浩) 등과 함께 제1차 이사회를 열어 국민회의 사업을 결정한 다음 망명지로 정한 시베리아 연해주로 정재관(鄭在寬)과 함께 출발했다.
[최초의 망명정부 수립]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다시 도착한 선생은 이승희(李承熙). 김학만(金學萬). 정순만(鄭淳萬)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연해주와 중국 서북간도(西北間島)와, 멀리 하와이와 미주본토(美洲本土)에 교우(僑寓)하는 모든 해외 한인회를 조직(組織)하여 한국독립운동의 터전을 잡고 1914년에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국권상실 후(國權喪失後) 최초의 망명정부(亡命政府)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어 국내외의 민족운동을 총령(總領)하였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는 수립된 후, 그해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 틈에 일제와 제휴한 제정러시아와 연합군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일제의 탄압으로 표면적 활동기록은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경륜과 정신(精神)은 국내외의 모든 독립 운동자에게 계승되어갔다.
[시베리아에서의 독립활동]
이 동안에 또한 이상설은 1910년 국내외 의병을 통합하여 6월 21일에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그해 8월 27일 ‘한일합병)’을 계기로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 National committee of Korea)를 결성하고 일제와의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에 대한 반대운동 전개 일환으로 미국, 러시아 등 열강에 대하여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독립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선언서(宣言書)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상설은 이때 8,624명에 달하는 민족운동자의 서명이 붙은 스스로 작성한 이 선언서에서 "우리는 세계 속에서 대한국(大韓國)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민은 대한국민(大韓國民)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고 간직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光復)과 국권(國權)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武器)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이며 아울러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취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조국의 독립의지(獨立意志)를 천명하였다.
이 일로 동년 9월 11일 일제가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벌여 이상설 선생을 비롯하여 이범윤(李範允). 김좌두(金佐斗). 이규풍(李奎豊)등 성명회와 13도의군의 간부 수십명이 러시아 관헌에 구금(拘禁)되고 러시아 총독은 그중 이상설 선생을 니콜리스크로 추방했다. 1911년 초 이상설선생은 러시아 관헌에 의한 리콜리스크 추방에서 풀려나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12월 19일에는 권업회(勸業會)를 조직 권업신문을 간행하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상설선생은 광복군의 양성과 독립운동의 지원을 구할 목적으로 러시아 극동총독 보스타빈과 친교를 맺고 교유하였다.
[광복활동을 좀먿는 지방열 파쟁 병폐]
그러나 1913년 12월경에 어떤 사이비 애국자가 이상설선생을 매장하기 위해 일제의 밀정으로 몰아넣는 음모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설선생은 아무 변명도 없이 모든 공직을 내놓고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옮겨 머물며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읍국읍가우읍가(泣國泣家又泣己)”라는 시(詩)를 읊었다. 그리고 1915년 3월에는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본부를 북경(北京)에 두고 본부장에 선임되어 일관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배신을 당하다]
그 후 또다시 한사람의 동지로 믿었던 이종호(李鍾浩, 1885~1932/李容翊의 孫子)에게 배신당해 몇 해 동안 고심참담(苦心慘憺)했던 독립운동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지극히 가슴아파하였는데, 선생은 배신당한 것에 대한 분노보다도 지금까지 고심하여 구체화되던 독립군 장총(長銃 )무기 구입비밀이 러시아신문에 보도되는 등의 일을 저질은 패악(悖惡)한 자와 의논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매우 컸으며, 위와 같은 지방열(地方熱) 파쟁에 따른 음모와 배신의 일로 심신에 심대한 충격을 받아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다.
[요양]
선생의 병세가 위중함을 깨달은 동지들이 본국의 가족들에게 비밀히 연락하여 부인서씨(徐相淑)와 당시 18세인 아들 정희(庭熙,1899~1948) 모자(母子)분을 선생의 계씨(季氏)인 상익(相益)공이 동행하여 현지에 도착한 후 동지들과 함께 정(情)깊은 간호에도 불구하고 천추의 한을 품은 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 시베리아 니콜리스크(Nikol’sk-Ussuriiski, 1895~1935년), 한자로 雙城子/지금은 우스리스크)에서 1917년 3월 2일(음력 2월 2일) 눈을 감으시니 남은 동지들의 비애(悲哀)가 애절(哀切)했다.
[유언]
그리고 임종이 가까워지자
"동지(同志)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수있으랴!
내 몸과 유품(遺品)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후 제사(祭祀)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遺言)을 남기시었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조완구(趙婉九), 이민복(李敏馥) 등은 그의 유언을 쫓아 수이푼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강물에 날렸다. 그 강물은 아무르만으로 흘러 조수를 따라 동해(東海)에 다 달아 조국강산에 파도치는 것이다. 이때 그의 문고(文藁)와 유품(遺品)도 유언에 따라 알뜰이 거두어 불살랐다. 이에 그와 가까웠던 독립운동의 동지들은 물론, 나라를 잃은 국내외의 망국 조선인은 누구든지 애통한 심금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인물평]
□ 안중근
선생에 대하여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09년 7월 여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던 도중 이상설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
다.
“이상설(李相卨)을 금년 여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로소 만났다.
이 분의 포부는 매우 크다,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이범윤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
수차 만나서 그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됨과 부족함이 없더라.
세계 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 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 분일 것이다.
또한 동양 평화주의를 갖는 점에 있어서 이 분과 같이 초절한 마음과 뜻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 정인보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를 남겼다.
죽음에 임하여 크게 탄식함은
외로운 신하의 한이 가슴에 맺혔음이라.
원컨대, 죽은 몸은 불속에 던지고
재는 들어 바다에 뿌리기를.
스스로가 남은 글을 불태움은
행적을 전하지 않으려 함이더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훗날 이름마저 남아 있지 않을까 두렵구나.
□ 멀리 미국의 신한민보(新韓民報)는 1917년 5월 24일자 이상설 선생의 부고 기사를 실고
고혼(孤魂=문상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을 조문하였다.
"시베리아의 바람이 급하고 우수리 강의 물결이 목매 치니
오호라 우리 공(李相卨)이 길이 갔도다.
만리사절(萬里使節)이 바다를 건널 때는
천년국장(千年國章)이 땅에 떨어진 날이다.
성패(成敗)야 어찌 논 하리요.
충의(忠義)를 깊이 공경하노라.
공(公)은 몸을 버렸거늘 우리는 몸을 보존하였으니
한줌에 차는 눈물이 실로 공을 위로함이 아니요,
스스로 슬퍼함이로다.
지금 본국에 명월(明月)이 달렸나니
공(公)의 영혼이 항상 임(臨)하소서“
[결론]
이상설의 위업은 컸다. 그가 작고한 2년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3.1운동이라는 거족적 독립운동(擧族的獨立運動)이 일어났다. 이상설의 가까운 동지인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조성환(曺成煥),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등은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附)를 세워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이상설이 오랫동안 망명(亡命)했던 시베리아에서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성립되어 독립결의를 새로 다짐하면서 일제와의 혈전(血戰)을 선언하였다. 또한 서북간도를 비롯하여 남북만주에서는 그동안 양성된 광복군(獨立軍)을 바탕으로 군정부(軍政府)가 세워지고 많은 독립군단(獨立軍團)이 항전체제(抗戰體制)로 정비되어 1920년대의 독립군의 항일전이 펼쳐졌다.
미주의 교포들은 독립대회를 열어 세계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군자금(軍資金)을 모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민족의식(民族意識)의 새로운 각성과 민족역량(民族力量)의 향상을 꾀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한민족의 광복은 보다 밝게 비쳐갔다.
끝으로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면 민족자주독립을 위하여 자신에게 보장되어 있던 출세나 신변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어떤 일의 결과에서도 항상 다른 사람들을 높이 추대하고 스스로는 낮은 직책을 원하며 오로지 자기 목숨은 국가를 위해서 있다는 심지로 광복운동의 성공만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 위대한 애국자이기에 앞서 위대한 선각자요. 인격자였던 분이셨다. 그날 선생은 가셨지만 영원한 조국의 수호신으로서 그 이름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보재 이상설!
[상훈]
그리고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지만, 서훈 당시 선생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 문리. 근대과학의 수학자로서의 공적은 빠져있는 등 선생의 서훈(敍勳) 재평가 격상은 당연할 일일 것으로 사료된다.
[발췌문헌]
『나라사랑 20집』 1975
『이상설 약력』尹炳奭-1997
글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