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1. 20. 15:27.
▲은송정(隱松亭) : 은송처사 이영우(李英雨) 선생을 기리는 재실(齋室)이다.
■ 은송정기(隱松亭記) 역문(譯文)
저번에 고령(高靈)의 이태희(李台熙)라 하는 분이 한권의 가승(家乘)을 가지고, 내집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請)하고 말하기를, 이는 우리집의 파보(派譜)이고, 하나는 곧 우리 11대조가 되는 남포공(藍浦公)의 순절(殉節) 한때의 실상(實狀)을 기록(記錄)한 것이다.
남포공(藍浦公)은 벽오공(碧梧公)의 第五子로서 일찍이 벼슬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남포현(藍浦縣 : 오늘날 충남 보령시)을 다스리다가 丙子年[1636(인조 14)]에 북쪽 오랑케가 일으킨 난리(亂離)를 만났다.
나라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잇달아 일어났고, 난리(亂離) 뒤에 우리 조상(祖上)은 멀리 외가(外家)에 찾아가 함께 살려고 남하(南下)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고령(高靈)의 가곡(佳谷) 땅에 이르러 정착(定着)하여 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은송공(隱松公)이 하루는 저희들을 께우쳐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이 남(南)쪽으로 내려온 뒤로 비록 그사이 사이로 三代가 성균진사(成均進士)를 했다고는 하지만 전(前)날 삼공(三公)과 재상(宰相)의 자리에 앉아서 나라일을 다스리던 때를 돌이켜 보고 이렇게 애잔(哀殘)하여 겨우 살아가고 있는것과 비교(比較) 한다면 과연(果然) 어떻다고 하겠느냐?
문벌(文閥)을 개척(開拓)하고 세상(世上)에 나가서 벼슬하여 입신출세(立身出世) 하려면 책(冊)을 읽고 궁리(窮理)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공부(工夫)를 힘써 해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날이면 날마다 문(門)을 닫고 책 읽기를 부지런히 하며 고달퍼하거나 싫증내거나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늙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쉬지를 않았다.
일평생을 학문(學問)을 딲고 쌓은 곳에 몇간(間) 되는 집을 지었으니 선생(先生)께서는 이 집을 은송정(隱松亭)이라 이름 부쳐서 선생께서 이 집에 대(對)한 기(記)를 써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기(記)를 쓸만한 자격(資格)도 아니고, 글재주가 없어서 사양(辭讓) 했건만 억지로 청하고 가더니, 뒤에 다시 찾아와서 여전(如前)히 기(記)를 청하는 것이었다.
할수없이 붓을 들고 쓰거니와 아! 조상(祖上)이 살던 곳을 자손(子孫)이 지키는 것은 의당(宜當)한 바이며, 조상의 아름다운 덕(德)을 자손이 본받는 것은 당연(當然)한 바이다. 은송공(隱松公)의 평소 마음가짐과 행동거지(行動擧止)와 이룩한 일과 그 자취는 비록 후세일지라도 사람마다 모두가 스승 삼고 본받을만 하거늘 하물며 그의 후손들에게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이제 그대는 이미 은송정(隱松亭)을 지어놓고, 여기서 학문(學文)을 딲고, 여기서 기거(起居)하며, 여기서 시(詩)를 읊고, 여기서 벗을 사귀며, 따뜻하고, 정(情)겹게 마음껏 추모(追慕)하며, 지내고 있다.
산(山)에 올라서는 높은 산을 우러러 보던 생각이 일고, 물가에 가서는 흘러가는 세월(歲月)이나 인생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한번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탄식(歎息)하던 생각을 품던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대가 조상(祖上)을 본받고자 한 바는 거의 본받았으니, 그대의 자손들이 또 한 당연(當然)히 그대를 본받을 것이다. 대대(代代)로 내려가면서 버리지 않을것이니 은송정(隱松亭)을 지어놓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다들 알고 있는 말을 또다시 이르거니와 진실(眞實)한 효도(孝道)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이고, 정자(亭子)나 루대(樓臺)는 그 마음을 밖에 나타낸 것이다. 비가 새고, 바람이 치니 어찌 집을 손질하고, 지붕을 다시 이는 일이 없겠는가? 험이 날때마다 보수(補修)하는 것도 또한 참된 효도(孝道)의 한 방법(方法)이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일을 힘써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公)의 여러 아드님과 나는 소화(小華) 이옹(李翁)하고 친(親)했는데, 옹(翁)과 나는 몹시 친해서 몸은 둘이지만 마음은 하나가 되어 사귀었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고령(高靈)의 일가사람들은 나와 같은 파(派)의 친족(親族)들로 성실(誠實)하고, 순후(純厚)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기에 어떤 사람들인가 했더니 이제 그대를 대하고보니 과연(果然) 그말이 꾸민 말이 아님을 알겠다. 그 대강(大綱)을 들어 글을 이루고, 이것으로 기(記)를 삼는다.
기해(己亥), 1959년 정월 보름날 풍산 류돈묵 기(歲白猪之上元上澣 豊山 柳敦黙 記)
◇문헌자료 : 경주이씨천행록(1985년)
◇소재지 :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770-6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