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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이야기 와 비련의 철인왕후이야기–
비극의 시작은 정조?끝은 흥선대원군 섭정?-
은언군,은신군,은전군,상계군,전계대원군,용흥궁,이하전,메이지유신,정조형제
정 조
(1752.10.28 ~1800.8.18)
등극 1776년 통치기간 24년
등극 24살 죽음 48살
순 조
(1790.7.29~1834.12.13)
등극 1800년 통치기간 34년
등극후 4년간 정순왕후가 섭정
등극 10살 죽음 44살
헌 종
(1827.9.8.~ 1849.7.25.)
등극 1834년 1841년까지
할머니 순원왕후 섭정
1842년부터 7년간 친정
통치기간 15년
등극 7살, 죽음 22살
철 종
(1831.7~1864.1.16.)
등극 1849년 통치기간 15년
등극 18살 죽음 33살
헌종보다 4살적고,
대원군보다 10살 적음
대 원 군
(1821.1.24.~1898.2.22.)
1815년 생부가
사도세자 서자
은신군 양자가 됨
1864년 43살에
12살 차남이 고종이 됨
1873년 52살에 실각
(9년간 통치)
77살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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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종
(1831.7~1864.1.16.)
등극 1849년 통치기간 15년
등극 18살 죽음 33살
헌종보다 4살적고,
대원군보다 10살 적음
철종의 어진
강화도에서 살던 철종이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마지막 증손자인 헌종이 죽게되자 왕의 직계는 절손이 되어 사도세자의 서자의 후손 중에서 왕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
(1754.5~1801.6.30.)
철종할아버지인 은언군(1754.5~1801.6.30.)과 작은 할아버지인 은신군(1755.음1.11~1771.음3.29)은 1771년(영조가 죽기 5년전) 형제의 빚을 홍봉한 등이 대신 갚아준 사건을 가지고 노론이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유배에서 동생 은신군은 풍토병으로 죽습니다, 그리고 1776년(정조가 등극하는 해) 석방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778년(정조 2) 홍국영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이듬 해인 1779년(정조 3)에 원빈 홍씨가 갑자기 죽습니다,
그러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적자 맏아들인 상계군(1769 ~ 1786)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준관을 시켜 양자로 삼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언군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인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수용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정조가 등극한 지 3년뒤인 1779년에 홍국영(1748~1781.4.28.)이 쫓겨납니다. 그리고 2년후에 홍국영이 33살로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들이 계속 역모를 꾸미다가 1786년 상계군을 추대하려던 구선복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상계군은 자살을 하고 상계군의 아버지이며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후 정조는 은언군을 석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벽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론벽파는 여러 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정조는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정조가 죽고 그 다음해인 1801년(순조 1) 2월 신유박해 때 의금부에 체포된 양제궁 나인의 진술로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는 주문모 신부를 양제궁에 숨겨둔 것도 밝혀지면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무수히 받고 1801년(순조 1년) 3월 17일 사약형을 받고 죽습니다,
이때 은언군도 삼사로부터 가족이 사교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탄핵을 받았고, 삼사와 정부 관료들은 상계군, 홍낙임 등과 관련해서도 계속 탄핵하였습니다,
그리고 1801년 6월 13일 사사령이 내려지고, 6월 30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47살에 사사되었습니다, 이때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은 16살이었습니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1785.4.29.~1841.12.14.)
아버지 은언군의 사사 후에는 천극죄를 받고, 강화도 내 그의 거주지에 가시울타리가 쳐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강화도 내 위리안치된 집과 움막 등에 거주하며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일일 잡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갔습니다,
1812년(순조 12) 8월 사옹원봉사 박종일과 한광우, 이진채 등의 모역사건이 적발되자, 은언군의 아들들 중 한명을 추대하려 했다 하여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순조가 사건을 무마시켜 은언군의 적자아들 이당과 서자아들인 이성득, 이철득 등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사형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뒤 강화도 내로의 이주가 허용되어 전계대원군(이광)은 강화군 강화읍내로 이주하여 가족들은 강화도에 살았는데, 가족들이 살던 집은 현재의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에 있었고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 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습니다.
(철종은 아버지가 죽은 후 강화도로 이주됩니다)
1817년(순조 17) 3월 홍경래와 기맥이 닿던 채수영이 은언군의 첩의 소생인 아들 중 한 명(이철득)을 추대하기로 하고 채수영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에도 그는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20년(순조 20) 순조는 은언군의 생존한 아들들을 모두 석방시켜주어 이때 그는 한성으로 갔지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강화도로 보내졌습니다.
철종 즉위 이후, 철종 때와 고종 때 은언군과 은언군 일가, 상계군 일가 등에 관련된 자료는 대부분 세초, 각자, 먹칠, 인멸해버려 전계대원군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확인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그는 1822년(순조 22) 2월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철종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묘비문과 신도비문에 의하면 1822년 2월의 어느 시점에 순조는 임오년을 다시 맞이했다는 이유로 그를 풀어주었는데, 그해 음력 윤 3월에 비로소 그는 성인식인 관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수감되고 1826년(순조 26) 그는 갑자기 노비가 되어 충청남도 온양으로 옮겨졌으나 1826년 5월 2일 형조의 건의로 죄수들을 석방할 때 그도 석방되었습니다,
1830년(순조 30) 순조의 특명으로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일시 방면하여 도성에서 거주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어 서자 철종은 1831년 한성 경행방 향교동 사제에서 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왕족으로서의 예우와 작호, 관직 등은 받지 못했으나 만년에는 첩도 두는 등 어느정도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34년 3월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 염씨(1793.7. - 1834.3)가 41살로 죽습니다, 이 때 철종의 나이는 3살이었습니다,
1836년 한때 경기도 여주로 내려가서 생활하였다고 하는데 그 1836년(헌종2)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모반사건이 발생하나 실패합니다.
어느 시점에 다시 한성부 경행방 사저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은 1841년(헌종 7) 12월 14일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사저에서 원인 모를 병에 걸려 56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때 철종은 10살이었는데 생모는 7년전에 이미 죽었기에 이제 고아가 됩니다,
이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이 죽은 후 1844년(헌종 10) 8월 몰락한 노론가문 출신인 민진용이 중인 이원덕, 이종락 등과 모의하여 전계대원군 이광의 적자 장남 이원경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처참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해 전계대원군 적자 장남인 원경도 역시 사사되고 그의 남은 가솔들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때 13살의 철종도 같이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5년뒤인 1849년(헌종15)에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첩이었던 염씨에게서 얻은 아들 원범이, 순원왕후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지명되어 18살에 철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반면 헌종은 사도세자의 고손자가 되어
철종은 헌종에게는 아저씨 항열입니다,
그리고 대원군은 생부가 순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선발되어 사도세자의 양증손자가 되기에 철종과 항열이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철종이 왕이 되자 흥선대원군은 더 이상 왕이 될 수가 없게 됩니다,
순조가 등극한지 15년 후인 1815년 흥선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을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선발하지 않았다면 흥선대원군이 왕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꿈도 꾸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헌종이 몸이 좋지 않자 헌종어머니 신정왕후는 이하전(1842.2.15.~1862.8.20.)을 후계자로 세울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이 이하전은 선조 형의 후손이기에 왕의 직계가 아니고 방손이기에 문제는 있지만 헌종보다 촌수가 한단계 아래라서 촌수 측면에서는 철종보다 잇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동김씨 세력이 서자손자출신으로 헌종보다 촌수가 위이지만 왕의 직계인 철종을 왕으로 올리게 됩니다,
이 이하전은 안동김씨 세력이 철종을 왕으로 올리는 바람에 자신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안동김씨 세력에 대항하다가 결국 철종이 죽기 2년전 20살에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역모로 몰려 죽습니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바짝 몸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안동김씨 세력과 대척관계인 풍양조씨 신정왕후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차남이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풍양조씨에서 왕후로 삼으면 된다고 하면서 왕으로 밀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동김씨 세력에게도 안동김씨에서 왕후로 선발되게끔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하여 흥선대원군의 차남이 고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보다 6살이 적은 헌종이 22살에 죽었을 때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왕가의 방계출신으로 양자집안이기에 꿈을 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직계지만 서자출신인 18살 철종이 왕이 됩니다, 이때 28살 흥선대원군의 심정은 어떤지 짐작이 갑니다, 안동김씨 세력에게 결코 좋은 감정이 있었을 리가 없었고 왕이 되고 싶은 야욕으로 마음앓이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정치배경을 가진 철종은 조선을 개방할 생각도 못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흥선대원군마저도 안동김씨 세력은 천주교를 배척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밀었던 풍양조씨 세력은 천주교를 배척하였기에 대원군은 풍양조씨 세력과 뜻을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조선이 일본에게 뒤처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전 방송되었던
바람과 구름과 비라는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 불행하고 처연한 모습의 철종이 통치하는 15년동안의 이웃 일본을 살펴보면 철종 등극 4년 후인 1853년 미국이 일본에 개항요구를 하자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후 1858년에는 영국,프랑스,러시아,네덜란드와 연달아 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런 일본은 철종이 죽고 고종이 등극한 후 2년뒤인 1866년에는 막부체제가 막을 내리고 그후 1년 뒤인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1868년부터는 메이지유신이 시작합니다,
그리고 행정개혁과 토지개혁 및 조세개혁을 통하여 21년만인 1889년 메이지헌법을 발표하여 유신개혁을 완성시킨 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국가를 출범시킵니다.
이 철종 통치기간 15년은 우리 역사속에서는 뼈아픈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왜 이런 시기에 나라를 앞서나가게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는 지 말입니다,
철종도 개인측면에서는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왕을 믿고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백성은 더 측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종 비극의
시작점인 정조 ??
철종 비극의 시작은 정조가 아닐까합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고 그 후에도 사도세자를 부정하는 벽파세력에게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아들 순조를 김조순의 딸과 혼인을 시켜 김조순 세력이 옹호를 해주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결국 이 김조순세력이 순조부터 외척정치를 시작하여 34년간을 지속하다 헌종 15년은 풍양조씨세력과 공존을 하다 철종을 왕으로 올려 다시 15년간을 지속합니다, 그러다 풍양조씨세력과 공조한 결과인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섭정하게 되자 이 안동김씨 세력의 외척정치가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참고로 이 김조순은 병자호란 때
김상헌의 후손입니다,
철종의 마지막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철종이 죽음으로써 영조의 직계는 절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왕을 이을 사람을 방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왕이 왕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고 신하들이 왕을 찾아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순조가 은신군의 양자로 흥선대원군의 생부를 지명하여 양자로 이어져서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으로 이어지고 흥선대원군의 섭정이라는 불행의 서막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왕이 아들이 낳지 못하고 죽거나 반정인 경우를 살펴보면 중종반정 때 중종은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왕비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명종이 죽었을 때 선조도 명종아버지 중종의 후궁이 낳은 아들에서 본 손자입니다,
인조반정 때 인조도 광해군 아버지 선조의 후궁의 아들에서 본 손자입니다, 그러나 이 고종은 9대를 올라간 인조의 직계로 효종의 친동생의 후손일 뿐입니다, 이러니 정통성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일입니다,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조선 제25대 철종의 정비.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종묘에는 명칭이 황후로 격상되어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예릉(睿陵)
예릉(睿陵)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
조선 25대 철종과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
철인왕후는 조선의 대비들 중 유일하게 왕대비가 되지 못한 대비였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선왕의 정실 부인인 대비(大妃)의 정식 명칭은 왕대비(王大妃)이다.
하지만 보통 줄여서 대비라고 부르는 것. 따라서 인수대비(소혜왕후), 소성대비(인목왕후) 등의 정식 존호는 인수왕대비, 소성왕대비인 것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조씨),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대비(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비(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된 것이다. 그래서 효정왕후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인원왕후, 정순왕후 등
이전 왕비들이 대비(왕대비)로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로 존봉받았다.
그런데 철종 또한 젊은 나이에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효정왕후)보다 먼저 승하하면서 철인왕후도
왕대비가 아닌 '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게다가 고종이나 신정왕후 조씨보다 일찍 사망해 왕대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대비'로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