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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의 솔기 같은 인생
왕상 22장 29~40절(대하 18장 28~34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삶이라는 붓으로
자신의 인생 이야기 책을 엮어 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은 인생살이, 즉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인생이라는 이야기책을 엮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작가라 할 수 있고
우리의 인생은 모두 이야기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 이야기책은 A4용지 한 장보다도 더 얇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의 이야기책은 백과사전보다 더 두꺼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저급한 삼류통속 소설 정도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주는 양서가 될 수 있습니다.
자서전이든, 수기든, 자전적 소설이든
어떤 사람들의 인생의 이야기는 활자화되어 출판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다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책은 활자화되지 않습니다.
활자화되지 않은 인생 이야기책은 그냥 소멸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멸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말씀을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내가 작가가 되어서 내 인생의 이야기책을 엮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활자화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가면
우리가 살았던 삶은 흔적도 없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국에서 우리의 삶을 다 보고 계시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을 바꿔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CCTV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휴지조각 하나 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얼렁뚱땅 살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일단 앞으로 어떤 인생의 이야기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책이 될 것 같습니까?
지금이라도 우리 생이 끝나버린다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인생 이야기책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떠난뒤에도 누군가가 삶의 이정표로 삼을 이야기책일까요?
하나님의 진노를 부를 이야기책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이야기책일까요?
중요한 사실은 우리 각자가 우리 삶으로 우리 인생이야기책을
바르게 엮어 가기 위해서는 대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전제 조건은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만이 인생 이야기책을 바르게 엮어 갈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산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인생 이야기책은 엮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성경을 통해서 일깨워주고 있는
‘인생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 함께 사색하고 숙고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인생은 갑옷 솔기입니다.
갑옷은 창이나 화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군인의 옷입니다.
그러나 모든 군인들이 다 똑같은 갑옷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계급에 따라서 갑옷이 달라집니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갑옷의 재질과 공법이 더 견고해집니다.
그러면 왕의 갑옷은 어떤 것일까요?
왕의 갑옷은 그 나라의 최고의 장인이 만듭니다.
가장 견고하고 가장 튼튼한 최고의 재질을 가지고
최고의 장인이 왕의 갑옷을 만듭니다.
왕의 갑옷을 만들면 자신이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 갑옷을 입고 상대방이 창으로 찔러 보고 칼로 찔러 보게 합니다.
그래야 그 갑옷이 통과되는데
장인은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런 갑옷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갑옷의 솔기는 갑옷의 조각과 조각을 잇대어서
철사나 가죽끈으로 연결한 부분을 솔기라고 합니다.
갑옷을 금속으로 만들든지 가죽으로 만들든지
갑옷을 한 덩어리로만 만들 수 없습니다.
가령 왕의 갑옷을 쇠붙이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하면
입지도 못하고 벗지도 못합니다.
그럼으로 입고 벗기에 편하도록, 또한 입고서도 마음대로 손과 팔을 쓸 수 있도록
금속이든 가죽이든 몇 조각 붙여서 만들어야 합니다.
조각과 조각을 연결하는 것이 솔기인데
말하자면 솔기는 견고하기 짝이 없는 갑옷의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갑옷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갑옷 솔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한 나라에서 가장 강하고 견고한 갑옷이 아닙니다.
인생은 갑옷이 아니라 갑옷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
갑옷의 아킬레스건이 갑옷 솔기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북왕국에서 가장 패역한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한 뒤에
이세벨의 계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계략을 따라서 선량하기 짝이 없는 나봇을 모함해서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극악무도한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왕의 그 패역함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그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보냅니다.
열왕기상 21장 18~19절에서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너 그렇게 패역한 짓을 계속 하면서 살면
너 인생 비참하게 끝날 거야 경고한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패역함에서 돌아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아합은 잠시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척 하더니
패역의 길을 그대로 걸어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는 천하무적의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갑옷입니다. 내 인생이 갑옷인데 누가 건드려!
하나님인들 건드릴 수 있으랴?
아합이 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왕과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아람왕이 자기 신하 32명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애들아 다른 장군이나 다른 오합지졸들을 상대하지 말고
너희 32인은 힘을 합쳐서 아합왕만 공격하라! 고 합니다.
아합은 이 첩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적군의 지휘관 32인의 집중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기 전차 병거에 걸려 있는 왕의 휘장을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도 왕임을 알아볼 수 있는 투구도 벗어 버렸습니다.
대신에 일반 병사들이 쓰는 투구를 썼습니다.
왕의 투구 대신의 일반병사의 투구를 쓰고
심지어 왕의 휘장을 떼어내고 적진 깊숙히 뛰어 들어갔습니다.
32인의 공격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장점은 자신이 적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다는 것이고
단점은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에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아군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장을 한 아합이 무엇을 믿고 적진 깊숙이 뛰어 들어간 것일까요?
왜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천하무적의 갑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창에 맞아도 죽지 않고 화살에 맞아도 죽지 않는
불사의 슈트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2장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여기 보면, 한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겼다 했습니다.
이 한 사람은 누구인지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전문적인 궁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수도 아니고, 장교도 아니고, 일반 군사입니다.
이 군사는 겨우 활 쏘는 방법만 배워가지고 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많은 화살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겨우 몇 발 가지고 나와서 쏘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깁니다.
무심코 라는 말은 마구잡이로 쏘아 댄 것을 말합니다.
열 개 중에 하나는 맞겠지 하고 봉사 문고리 잡듯이 쏜 것입니다.
사실상 전쟁 중에는 제정신 가지고 싸울 수 없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걸려 있기 때문에 죽자 사자 싸우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활을 쏘더라도 집중해서 쏠 수 없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칼이 날아오고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감추면서 활을 쏘아야 합니다.
우리가 양궁을 보면 알겠지만
양궁에서 표적에 맞추려면 먼저 자세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자세가 흔들리면 안됩니다.
꼿꼿하게 바르게 서서 활을 쏘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무명의 궁사가 쏜 화살은
100발을 쏴도 1발도 맞추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발에 아합왕이 맞은 것입니다.
그것도 갑옷의 이음새 부분인 솔기에 맞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가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구잡이로 쏘아 댄 화살에 사람이 맞는다는 것도 어렵지만
32명의 장수들이 잡으려고 하는 아합왕을 맞춘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화살이 뚫을 수 없는 갑옷이 아니라
갑옷의 이음새인 솔기를 맞춘다는 것도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화살이 튕겨나갈 수 있는 그 넓은 갑옷을 피하고
전문적인 궁사가 쏘아서 맞추려 해도 맞출 수 없는 솔기를
맞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영화로 만들면 그렇게 연출을 할 수 없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는 영상입니다.
왜 우연같지도 않은 우연이 아합왕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1만분의 1도 안되고 10만분의 1도 안되는 가능성이
왜 아합왕에게 일어나 화살이 그 솔기에 맞춘 것일까요?
우리 한 번 34절부터 38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해가 질 녘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화살을 맞는 순간에 아합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에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곁에 있는 병사에게 자신을 피신시켜 달라고 했는데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피신시킬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아람 군사를 막다가
그 병거에 탄 채 저녁이 되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데리고 와서 장사를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는데
개들이 와서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
다시말해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 하였던 나봇의 피값이 갚아진 것입니다.
만약에 아합이 자기 자신이 갑옷솔기인 줄을 알았더라면
약하디 약한 갑옷솔기인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을 향하여 180도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갑옷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갑옷이 아니었습니다.
무명의 궁사가 마구잡이로 쏜 화살에
갑옷이 아닌 솔기에 맞아 그 날로 세상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청탁을 넣었습니다.
자기 형제하고 재산 싸움이 붙었는데
자기 형제에게 이야기해서 아버지 유산을 좀 잘 나누도록
자기 형제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형제의 재산 싸움이나 해결해 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4절입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산 싸움에 개입해서
재판을 하고 물건을 나누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재산을 더 가지려고 하는 형제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말에 넉넉하다 라는 말은 너무 좋은 말입니다.
넉넉하다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넉넉한 마음, 넉넉한 사고, 넉넉한 삶에서 모든 나눔이 나옵니다.
굉장히 좋은 단어인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는
이렇게 따뜻한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에 넉넉하다는 것은 따뜻한 의미가 아니라
과잉으로 철철철 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그 소유가 과잉으로 철철철 넘친다고 해서
그 생명이 강해지는가?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합니다.
그해 소출이 많아 풍성해서 곡식을 쌓아 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거기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는 자신의 갑옷이 재물입니다.
이 재물만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솔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날 밤 그 영혼을 데리고 가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솔기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솔기인 줄 모르고 그 많은 재산을 흘러 보내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갑옷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중국대륙을 통일했던 진시황제도
죽을 때는 천하를 놓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솔기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지배했지만
결국 빈손으로 떠나가는 솔기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솔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건강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솔기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들은 젊었을 때는 자신이 갑옷인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늙고 나이를 먹다 보니까
인생은 갑옷이 아니고 솔기이구나 하는 것을 철저히 느꼈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솔기인 것을 깨달았을 때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솔기인 것을 깨달았을 때에
내게 어떤 고난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내가 갑옷이 아니라 솔기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오히려 감사하고 은혜가 될 것입니다.
평생 솔기로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으로 수 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의 지병인 가시는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육체의 괴로움도 많고, 활동의 장애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약할 때에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자신이 솔기라고 고백할 때에
자신의 능력이 온전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이 약하고 궁핍하고 핍박받는 솔기인 것을 기뻐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내가 갑옷이 아니라 내가 솔기이다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