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선약수를 꿈꾸는 김여희
그림을 그리던 한 소녀가 있었다. 단발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그 소녀는 이젤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경기도 안중의 성당 옆에 있던 테니스 코트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기어코 테니스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테니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그때부터 이젤 대신 라켓을 잡았다. 대학 진로도 미대에서 체대로 바꿨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부터 입시체육을 준비하면서 테니스 레슨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체대 입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고 어쩔수 없이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대학 생활을 마쳤다.
발목 장애를 낳은 치명적인 교통사고
새내기 사회인이 되던 23세 때, 청천벽력 같은 교통사고로 한 쪽 발목 탈골에 연골이 완전히 파괴 되었다. 치명적인 사고였다. 회복 되어도 두 발로 걸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오로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만 으로도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했다. 결국 장애인 3급 판정을 받고 절룩거리면서 퇴원을 했다.
그 후로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어엿한 국화부가 되었다. 국민생활체육 감독관이 되었고 또 비트로 팀원으로 발탁되어 대학생들에게 재능 기부하는 우수한 선수로 성장했다. 최근 별들의 전쟁이라는 헤드배 국화부 왕중왕들과 겨뤄 4강까지 올랐다. 장애등급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비젼 있는 아마추어 선수로 성장했을까? 매우 궁금했다. 그것은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잘 될 것이라는 자기 확신과 믿음이 무기였다.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언제 다시 라켓을 잡았는가?
시간이 흐르자 발목의 탈골이 점점 회복되었다. 불완전하지만 걸음을 걷게 되었을 때 대학에서 테니스 동아리 활동을 했던 남편(노덕수)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자주 코트 장에 나가 남편이 테니스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테니스 하고 싶은 심정을 달래는 길은 대리만족밖에 없었다. 그렇게 5년이 흐른 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라켓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테니스에 심취해 갈 즈음 아이를 갖게 되었다. 얼마나 테니스를 하고 싶었는지 임신 6개월이 되도록 코트에서 운동을 했다. 담당 의사는 경고를 했다. 앞으로 운동을 계속하면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하다고. 몇 개월 동안 운동을 접고 출산 후 백일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다시 코트로 나갔다.
혼자서는 살수 없어!
코트에 라켓을 들고 나타난 그녀는 왕초보였다. 실력이 안 되니 코트에서는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다. 그때 수호천사가 있었다. 동네의 왕 선배 몇 분이 유모차에 실려 있는 아이를 돌봐 주었다. 가장 어려운 여건에서 운동할 때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평생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계속 레슨을 받았다. 행복했다. 다시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고당시 20%의 연골을 주입했는데 60% 정도로 자가 연골이 생성되었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천우신조였다. 병원에서 마지막 검사 결과를 듣던 날, 3급 장애인증을 반납했다. 드디어 정상인이 되는 날이었다.

역시 국화부 되는 길은 험난해
그동안 다진 실력으로 전국대회 개나리부에 문을 두드렸다. 발목도 웬만큼 버티는 힘이 생겼으니 금방 국화부가 될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8강에서만 18번 탈락을 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평택에이스 클럽 회원들과 가족들이 실내코트로 데려가 틈나는 대로 연습을 시켜 주었다. 마음 근력도 함께 키우도록 트레이닝을 시켰다. 남편과 함께 테니스로 희노애락을 공유한 뜻깊은 기간이었다. 결국 2009년에서야 국화가 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서러움 이 다 사라졌다. 그 순간 우주의 주인공이었다.
솔파크테니스장 사장이 되다
김여희는 학창시절 라켓을 처음 잡을 때부터 코트장을 직접 운영해 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마음껏 테니스를 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마침내 평택에 4면의 클레이 코트를 만들어 3년 넘게 운영을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람과 코트를 관리하느라 오히려 볼을 칠 수 있는 기회가 더 적어졌다. 직접 경영을 해 보니 상상도 못했던 애로사항들이 많았다. 온전히 테니스에 몰입하는데 오히려 코트장 운영은 방해가 되었다.
다시 꿈을 향해 뛰다
김여희의 카톡에 접속하면 소개란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한자 성어가 나온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을 가진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아래로 흘러가는 물처럼 겸허하게 살겠다며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지금도 온전하지 않은 발목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하는 상태지만 또 다른 꿈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국화부 슈퍼가 되고 싶은 꿈이다. 김여희는 "알을 스스로 깨고 나오면 한 마리의 생명력있는 병아리가 태어나지만 남이 깨주면 1회용 후라이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받아 들여 스스로 배우는 자세로 노력하면 언젠가 슈퍼가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고 했다. 꿈이 있어 그녀의 미소가 더욱 환해 보였다.
이름 김여희
나이 42세
20년 전 3급 장애인에서 현재는 정상인이 됨
비트로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