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율곡 이이 (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림들이 창건하였다. 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그 후 숙종39년 (1713)에 이율곡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두 분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의 배향과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자운서원이 주는 이미지는 조금 씁쓸하다. 묘정비(廟庭碑)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두 유신 정권이 거창한 구호아래 복원한 것이고, 그 것도 그저 정신은 없고, 형체만 복원한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흔적을 남기고 만다. 화석정은 박정희가 쓰고, 이 곳 자운서원은 김종필이 �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00년동안 빈터로 남아 있던 자운서원...그리고 6.25전쟁 당시 없어진
화석정을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호국, 국가안보, 자주국방 등등의 화려한 구호와 함께 부활시켜 놓은 것이다. 그저 백일장이나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어린이 소풍장소로 이용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복원에 정성과 정신을 엿 볼 수 없어 많이 안타까워서 그런 것 같다.
나는 그저 이 곳을 둘러보며 이율곡을 다시 한번 생각, 공부해 보는 기회가 되는 것이 좋을 뿐..

율곡의 사랑 1
황해도 황주(黃州)에 유지(柳枝)라는 어린 기생이 있었다. 용모도 귀엽고, 마음씨 또한 고와서 뭇 사내의 가슴을 태웠으나, 본인은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절개를 굳게 지켰다.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율곡은 34세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치정(治政)의 道를 역설하고, 39세에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시정의 폐단을 극렬하게 상소하여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평소 율곡의 인품과 학덕을 사모하던 유지는 황주에서 해주(海州)로 넘어와 율곡의 수청을 들었다.
그러나 엄한 어머니의 가르침에 몸가짐을 바로 한 율곡은 안방에 들어 갈 때에도 의관을 정제한 뒤 들어갔고, 또한 몸도 허약하여 柳枝의 몸을 탐하는 살수청을 요구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도 동기(童妓)인 유지의 머리를 얹어 주지 않자, 뭇사내들은 너나없이 자기가 머리를 올려 주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유혹이 거세어지자 유지는 율곡에게 간청한다.

율곡의 사랑 2
드디어 유지는 학식도 풍부하고, 고매한 인품을 가진 율곡에게 성인지례(成人之禮)를 받았으나,율곡은 차마 유지의 몸은 범하지 못하고 축하하는 詩를 지어 주었다.
약질수저수 弱 質 羞 低 首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를 숙여
추파불긍회 秋 波 不 肯 回 추파를 던져도 대답이 없네
공문파도곡 空 聞 波 濤 曲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이건만
미몽운우대 未 夢 雲 雨 臺 운우의 정은 풀지 못하였오....
이장명응단 爾 長 名 應 壇 너는 자라면 이름을 떨칠 것이나
오쇠합사개 吾 衰 閤 巳 開 나는 이미 늙음 길에 들어 섰네
국향무정주 國 香 無 定 主 미인에게는 임자가 따로 없으니
영락가련재 零 落 可 憐 哉 영락없이 가엽겠구나......
나이 고작 40살인데 본인이 늙었다고 말한 이유는 평소 병치례가 잦았던 탓도 있었지만, 어려서 꾼 꿈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려오는 이야기로 열병에 걸린 율곡이 사경을 헤메어 저승에 다다랐다. 그러나 염라국의 수문장은 염마장(閻魔帳)에 이름이 없다며 돌려 보내면서, 詩를 한수 지어 주었는데..
사과춘산초자향 麝過春山草自香 ...사향노루가 봄산을 지나는데 풀이 절로 향기롭다....
사향노루의 배꼽은 귀한 약재인데, 늦은 봄 십여일만 향기를 내뿜는다. 사향노루에 율곡을 비유하였으니, 짧은 수명에 큰 이름을 빛낼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율곡의 사랑 3
2년간의 황해도 관찰사 임기가 끝나자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외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으로 가서 후학도 양성하고,성학집요(聖學輯要)도 저술하였다. 비록 어린 柳枝에게 깊은 정을 주지는 않았지만, 유지는 율곡만을 생각하며 굳게 지조를 지켰다.
유수같은 세월이 무정히도 흘러 유지가 24세가 되던 해, 율곡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海州로 오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낭군이었으나, 공무에 바빠 하룻밤만 지내니, 유지의 마음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밤새 흐느끼며 회포를 풀었으나, 이때도 서로 몸을 탐하지 않았다. 하룻밤을 지내며 두사람은 이윽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율곡은 필묵으로 이별을 아쉬어 하였다.
천자탁약일선아 天 姿 啄 約 一 仙 娥 타고 난 자태 선녀인냥 침착하고 고상하여
십재상지의태자 十 載 相 知 意 態 多 서로 알기 십년에 마음 움직임도 많았다네
불시오아장목석 不 是 吳 兒 腸 木 石 내 본시 목석같은 사내는 아니나
지연쇠병사분화 只 緣 衰 病 謝 芬 華 병으로 쇄약하여 화려한 꾸밈을 사양하였을 뿐이네....
율곡이 49세에 죽고, 해주에서 부음을 들은 유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두문불출한 채 3년 상을 치루었다, 그리고 그 후 머리를 깎고, 구월산에 들어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율곡이 유지에게 보낸 친필연서(親筆戀書)가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고종 5년 (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파괴되었으며, 빈터에 위의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 1970년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 지원을 받아 복원되었다.

제사를 지낸 후 축문(祝文)을 불 태우던 곳..

제사를 지낼 때 손을 씻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