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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法華經)의 핵심사상 >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공관(空觀)의 실천,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일체 중생의 성불에 있으며,
이런 뜻을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법화경>이다.
진정한 법은 진흙 밭에 피는 하얀 연꽃과 같다.
한 권의 경전을 요약해 간단하게 드러내는 것을 대지(大旨)라고 하는데,
<법화경>의 대지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다. 그동안 소승의 수행으로 삼았던
성문성(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성(菩薩乘)의 삼승을 전부 다 모아
성불이라는 일불성(一佛乘)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화경>의 핵심사상의 하나는
개삼현일((開三顯一 ; 성문⋅연각⋅보살 3승을 일불승으로 회통)로 본다.
즉, 3승 가르침의 차별상을 구원실성의 본불사상으로 회통한 것이 <법화경>의 교설이다.
회삼귀일(會三歸一)과 같은 말인데, 처음 삼승(三乘)을 설해 중생을 인도한 연후에
오로지 대승으로써 제도해 해탈하게 함을 말한다.
여기서 삼(三)은 보살(菩薩)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삼승을 나타내는 말이고,
일(一)은 일승(一乘) 즉 불승(佛乘)을 나타내는 말로서,
보살ㆍ성문ㆍ연각 등 삼승의 방편에 의해 진실인 일승 즉 불승으로 들어가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삼승은 방편으로서 진실인 일승에 들어가게 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출현하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니
<아함경>에 설해진 4성제(四聖諦)와 12연기(十二緣起),
그리고 <반야경>에 설해진 6바라밀(六波羅密)은 하나의 불승(佛乘)에서
임시로 삼승을 분별해서 설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화엄경>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십주경(十住經)>은 <법화경>에서 설하고 있는
이러한 오직 하나의 불승에 입각한 보살의 길을 새로 조직한 것이다.
화엄학(華嚴學)의 종지(宗旨)와 현대학자들의 견해가 어떻든 간에
처음의 환희지(歡喜地)에서 제10지(地)의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는
십지(十地)에 수록된 보살의 행법(行法)을 살펴보면, <아함경>에서 <반야경>, <반야경>에서
다시 <법화경>에 이르는 교리(敎理)가 차례로 배열돼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불교경전의 하얀 연꽃이며, 불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경전임에 틀림이 없다.
<법화경>은 전체 28품 중 앞 14품을 적문(迹門)이라 하고, 뒤 14품을 본문(本門)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품을 들라고 하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나,
적문에서는 방편품(方便品)이 되고, 본문에서는 여래수량품(如來數量品)을 든다.
적문(迹門)에서는 대체적으로 성문성 연각승 보살성의 삼승을 전부 모아 가지고
우리의 최종 목적인 하나의 불승으로 나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本門)에서는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의 수명이 장구(長久)하게 이어간다는
구원불성(久遠佛性)을 다루고 있어서 법의 영원성을 논하고 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법화경>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신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여래수량품’이 중심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먼 옛날에 이미 성불하셨지만 중생을 위해 방편으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시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을 떠나 학문적 입장에서 보면 ‘방편품’을 중심으로 하는
성문의 해탈 쪽이 <법화경>의 중심이라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
‘방편품’에는, 부처님이 이 세간에 나타나신 것은 사람들에게 불지혜(佛智慧)를 알리고
불지혜로 인도해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일 때문이라고 역설하셨다.
그러나 <법화경> 전체를 통해 부처님의 자비가 흘러 내려오고
사람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80세에 입멸하신 뒤에도
부처님 보기를 원하며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간절히 신행한다면,
부처님은 항상 그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구원의 손을 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여래수량품’ 제16의 게송에
「모든 사람이 내가 멸도에 든 것을 보고 널리 사리를 공양해
모두가 연모의 뜻을 품고 갈앙심(渴仰心)을 내며
중생이 그와 같이 신복(信服)해
질직(質直)하고 유연(柔軟)한 마음이 돼
일심으로 부처님을 보고자 해 신명을 아끼지 않으면
그때에 내가 대중과 함께 영취산에 나타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법화경>은 부처님의 대자비 위에 성립된 신앙경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면, 싸늘한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위대한 부처님 생명의 흐름이
영원한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다시 미래로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법화경>의 많은 부분에 어떠한 고난이라도 무릅쓰고
부처님 진리에 이르도록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법화경>을 널리 펴기 위해서는 모두를 희생하고
자기 몸마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설하고 있다.
이 점에서 혹자는 <법화경>이 광신(狂信)을 설하는 기묘한 경전이라든가
또는 거기서 어떤 저항감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당시의 인도의 계급사회에서 보면 만인의 성불과 평등을 말하는 <법화경>은
대단한 이단(異端)사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반발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법화경>뿐만 아니라 <반야경>에도 처음에는 마설(魔說)이라고 생각된 때도 있었으나,
결국 대승에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구하는 보살들이
신명을 바쳐 노력하는 것을 역설하고, 신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구하며,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은 대승경전 전반에 통하는 보살의 이상이다.
<법화경>의 근본은 부처님의 절대적인 자비심과 그것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의 너그러운 마음의 소통을 설하고 있을 뿐이다.
<법화경>은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모두 다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원력의 발로로 가지가지 비유와 인연으로 교화하기 때문에, 따라서 내용도 방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간단하게 숫자를 사용하여 “일승(一乘), 이문(二門), 삼주(三周), 사행(四行),
오사(五事), 육공(六功), 칠유(七喩), 팔보(八菩), 구비(九譬), 십여시(十如是)”로 정리해
<법화경>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① 일승(一乘)은 모두 다 성불한다는 일불승(一佛乘)이고,
② 이문(二門)은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을 말하고,
③ 삼주(三周) 설법은 근기를 셋으로 구분해서
상근기에 대한 설법인 법설주(法說周)와 중근기의 수행자에게 비유로 설법하는 비설주(譬說周)와
하근기의 수행자에게 설법하는 인연주(因緣周)를 말한다.
④ 사행(四行)은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설해지는 것으로
설법자(說法者)가 갖추어야할 신(身)ㆍ구(口)ㆍ의(意)⋅서원(誓願)의
네 가지 구체적인 행동지침이다.
⑤ 오사(五師)는 <법화경>의 유명한 오종법사(오종묘행/五種妙行)를 말하는 것으로
경을 수지, 독, 송, 해설, 서사하는 것이고,
⑥ 육공(六功)은 육근공덕(六根功德)을 가리킨다. 즉. <법화경>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공덕이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서 소상하게 밝혀지고 있다.
⑦ 칠유(七喩)는 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법화경>에서 그려지는 유명한 일곱 가지 비유이다.
⑧ 팔보(八菩)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 <법화경>을 널리 이 세상에 펴겠다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에 의해 부정당해지는 팔천항하사보살(八千恒河沙菩薩)들로서 매우 깊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⑨ 구비(九譬)는 앞서의 칠유에다 두 가지 비유를 더 첨가한 것이고,
⑩ 십여시(十如是)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가르쳐주는 십여시를 말한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물은 차고 불은 뜨겁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친다,
눈은 가로로 찢어졌고 코는 세로로 서 있다 등 실로 만물 있는
그대로의 변치 않는(如是如是 如如不動) 모습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누구도 의심을 할 수 없는 진실 그것을 여시(如是)라고 한다.
그리고 보살이 갖추어야할 일체지(一切智), 즉 평등상(平等相)에 대한
설법이 바로 십여시이다. 십여시란, 일체의 현상(現象)을 열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 설명한 것이다.
어느 것도 십여시를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즉, 사물마다의 ①모습(如是相) ②성질(如是性) ③체상(如是體) ④능력(如是力)
⑤작용(如是作) ⑥원인(如是因) ⑦보조원인(如是緣) ⑧결과(如是果) ⑨과보(如是報)가
⑩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사실은 한 결 같이 평등한 것(如是本末究竟等)이라는 말이다.
즉, 현상계(有爲)의 모든 것은 천태만상이지만, 그 현상은 일시적인
인(因)과 연(緣)의 모임에 지나지 않을 뿐, 그 내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의 대생명(眞理), 즉 절대(無爲)이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천태종의 모든 가르침이 시작되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법화경>의 문장은 장문(長文)과 게송(偈頌)으로 돼 있는데,
특히 다른 경전보다도 게송 부분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내용이나 표현에 있어서도
훨씬 우위인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체로 이 게송이 먼저 결집됐다고 보고 있다.
<법화경>의 대표적 게송 한편이다.
•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법화경>의 근본정신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깊은 도리를 말하고 있다.
<법화경>의 다른 이름이 곧 제법실상이다. 대승불교, 그리고 법화경의 핵심사상의 하나가 제법실상이다.
‘제법(諸法)’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현상까지도,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전부 최고의 경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제법 하나하나가 다 있을 자리에 있고, 거기서 제 나름의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물의 참된 성질, 참된 상(相)을 아는 것이 제법실상이고,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일체법(一切法)이 곧 제법이란 말인데, 그 제법이 불법이란 것이다.
일체 불법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모든 사물, 심지어 먼지까지도 전부 나름의 가치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현실 긍정적인 철학이다.
있다는 모든 것을 말함이요, 실상이라 함은 모든 것의 참모습이며 중도를 일컫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이다.
제법(諸法),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해 청정한 것이라는 말은
그대로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나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제법’이란 <금강경>에서의 상이 있는바 모든 것, 즉 ‘범소유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은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지만
본래는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이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번잡하며 끊임없이 시비분별을 일으키는가.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 공한 것이고,
본래는 청정하고 고요하다는 말이다.
각기 존재 본연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일체유심조]이므로
허망하고[개시허망], 본래는 청정하다는 말이다[상자적멸상].
그러니 모든 수행자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부처를 이룰 것이라 했다.
이 말이 그대로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나
<화엄경>의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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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는
『화엄경』의 게송에서 나온 말로,
삼세(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법계(현상 세계)의 성품을 보아야 하며,
그 성품은 오직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 있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