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올라오니 또 젊은 피를 끓게 하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도는 통제되었지만 지난 6월 9일 신촌 로타리에서 김종태라는 성남 야학출신의 노동자가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분신하여 투병하다가 12일 끝내 숨졌는데 계엄당국의 방해로 장례를 간신히 치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정말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로서는 광주에서 약 2.000여 명이 살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퍼져 있었다. 이토록 동족에 의해 꽃다운 청년학생들이 무참히 살육 당한데 대해 해외의 수많은 자유와 평화를 애호하는 시민들이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고 있는데 이 나라의 피끓는 젊은이로서 뒷골목에 숨어 있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일보사가 주최하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같은 지면에 세계적인 첼리스트인 러시아의 망명 예술인 로스트로포비치가 예정된 내한 공연을 취소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당사에 배달되는 외신에 의하면 한국군부의 광주학살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뜻으로 내한 공연을 취소하였다는 것이다.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광주의 피비린 냄새가 가시지 않은 나라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스유니버스 대회 같은 유흥행사를 취소하거나 보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김종태씨 분신자결의 감동과 분노가 가시지 않은 터였다.
그 때 같은 자리에 통일사회당 정책실장이던 권오창 선생이 함께 있었다. 권오창 선생은 일찍이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사회주의 철학과 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과묵하고 기품있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까지 하신 분으로 젊은 당원들의 존경을 받고 계신 분이었다.
이때 권오창 선생이 "이런 시국에 미스유니버스 대회를 연다니 양심도 없구만, 이런 것은 당장 저지해야 되는데"라며 개탄을 금치 못하였고 동석한 당원들도 모두 공감하였다.
이 말을 들으며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기사를 자세히 보니 6월말에서 7월초까지 3∼4일 간격으로 모두 3회 열리는 대회 실황이 미국 CBS TV에 의해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된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화약이나 적당한 무기를 가지고 가서 대회장을 점거하고 광주학살의 비극과 신군부의 헌정파괴를 고발하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조속히 회복하도록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를 혼자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많은 외신 기자들에게 내 뜻을 알리는 문서를 영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영작문을 할 수 없었다. 또 효과적인 거사를 위해서 성명서를 낭독. 배포하는 동안 체포당하지 않도록 대회 참가자나 진행자 등을 인질로 잡고 있어야 하니 그 역시 혼자서는 힘겨운 일이었다.
이를 도와줄 사람으로는 권운상 씨가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매일 보이던 권씨는 기다리니까 나타나지 않았다. 이 날부터 온통 머릿속에는 미스유니버스 대회장을 어떻게 점거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것인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거사 후 무사히 피신할 것을 전제로 천영초 씨를 찾아가서 취업할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여 영등포 지역의 작은 공장에 취업중인 비슷한 또래의 학생을 하나 소개받았다. 또한 진행 중이던 사북 구속자들의 구명을 위한 일도 점검하였더니 천영초 씨는 다시 한 번 사북을 다녀와 줄 수 없느냐고 제안하였다.
취합된 변호사 선임용 서류를 전달해야 되고 일의 진행을 점검해서 군사재판에 회부된 이들의 명단 등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미스유니버스 대회장을 점거하려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발물이 있어야하므로 사북에 가서 화약을 구해야했다.
사북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며칠만에 권씨가 나타나서 나를 따로 만나자고 하였다. 며칠을 기다리다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삼각지 부근의 중국집으로 가서 내 취업 계획의 재고를 요청하며 김철 선생과 상의했다며 당의 활성화를 위해 내가 할 역할에 대해 제안하는 것이었다.
당의 외곽기구인 한국노동평의회를 강화하기 위해 내가 거기서 일정한 직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일에 내가 공장에 취업을 하거나 노점상을 하겠다고 했더니, 그러지 말고 당의 전업 일꾼으로 일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는데 그때문인 듯 했다.
그러나 권씨의 제안을 잠시 제쳐두고 내 계획을 말하였다. 지금 시국에 그런 일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군부의 집권계획을 수수방관하지 말고 무언가 타격을 줄 방안으로 미스 유니버스대회장을 점거하자고 제안하였다.
일순 당황하는 권씨에게 김종태 씨의 분신을 거론하며 실행은 내가 할 테니까 권씨는 성명서를 영문과 우리말로 작성하여 한 2∼3백 부 프린트하여줄 것과 함께 실행할 사람으로 부산의 정구원 씨를 불러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대회장 사전 답사와 결행에 필요한 입장권 두 장씩 모두 4장을 사는데 필요한 돈 5만원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돈은 어렵고 부산의 정구원 씨를 올라오도록 연락하겠다고 동의한 권씨와 본격적으로 거사를 상의하였다.
이 날이 아마 6월 23∼24일 경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원칙적으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대회참가자나 진행자 등의 인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첫 째는 꽃다발을 가장한 화약을 들고 무대로 뛰어 올라가 진행자와 참가자를 인질로 잡고 성명서를 낭독, 배포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신군부의 처벌을 요구하고, 김대중씨 등 모든 민주인사, 청년학생의 석방, 즉각적인 계엄해제와 직선제 헌법개정 등 헌정 복원 등의 요구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느니 자폭을 하는 것도 상황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꽃다발 속에 미리 도화선에 점화한 폭발물을 넣고 무대로 던지면 대회장이 수라장이 될 테니까 그 틈을 타서 객석 위에서 성명서를 살포하고 가능하면 몸을 피한다는 것 등 그동안 궁리해 둔 두 세 가지의 예상 시나리오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권씨는 대회장 근처에도 오지 말고 거사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뒷처리를 맡는 것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사실 권운상 씨는 약간의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한 부친의 자상한 훈육에 따라 활달한 성격을 형성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다.
게다가 신체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에도 열심이어서 국민대학의 유도부원으로 활동한 유단자이기도하다. 후일 대중운동의 영역과 개인적 진로가 달라 오랫동안 함께 일하지는 못했지만 인간적 덕성이나 친화력 등 여러 측면에서 본받을 바가 많은 사람이었다.
6월 28일인가 열리는 개막식인 오프닝 세레모니에 가서 대회장 구조와 분위기를 살피고 2∼3일 후에 열리는 본선인 프리젠테이션 쇼 행사 때 거사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내가 사북에 가서 거사에 쓸 화약을 구해오는 동안 권운상 씨는 부산의 정구원 씨를 불러와서 계획을 설명하고 내가 마련해 온 돈으로 입장권을 예매하는 한편 미리 상의한대로 내가 초안한 성명서 등을 영역하고 프린트해 놓는 등 준비를 마치기로 하였다.
6월 26일 다시 사북에 잠입하여 성당으로 가서 신부님을 뵈려는데 마침 지학순 주교님이 사북 성당을 방문하였다.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 유신반대 투쟁으로 투옥 생활을 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심적 지도자의 한 분을 직접 뵙게 되니 몹시 반가웠다.
하지만 당장 내가 해야할 일이 있어서 귀한 분과의 소중한 만남을 새길 여유가 없었다. 동료 노동자들의 구명운동에 관해서 주교님께 다시금 도와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하였는데 물론 주교님은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하셨다. 실제로 내 요청이 아니더라도 현지의 신부님과 수녀님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다행히 손 수녀님이 지난 번 내가 다녀간 이후로 구속자 가족들을 만나 그들의 실태를 나름대로 파악해 두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 문제는 내 거사 계획이 성공하면 더 빨리 풀릴 것이라 생각하고 대부분 수녀님에게 부탁하고 나는 폭약을 구하는 일에 신경을 썼다.
화약을 구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읍내의 장로교회에 같이 다니며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선배가 인근 삼척탄좌의 관리직에 있었기에 내가 수배중인 것을 알면서도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단이 난 것은 선배의 사촌 동생이자 내게는 후배가 되는 친구가 이 일을 엿들은 것이다.
교회 학생회장을 지내며 친동생처럼 지냈던 후배인데 대구에 있는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에 재학하다가 계엄 확대조치로 휴교령이 내려 사북에 내려 온것이다. 때마침 사촌형 집에 놀러왔다가 내가 수배 중인데다 화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듣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개인적인 인연이 전혀 없는 천주교 관계자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가능한 도움을 아끼지 않는데 비해, 오랫동안 다닌 장로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시간에 목사가 지역사회의 평온을 깨뜨렸다며 노동자들을 힐책하는 한편,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냉정히 외면할 뿐 아니라 동료 신자에 의해 고발까지 당하는 현실을 겪으며 참으로 많은 상념이 교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