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답잖은 사연이다. 십수년도 넘은 예전에 친한 교회 동생 녀석을 심하게-내 나름으로는- 꾸짖은 적이 있다. 이라크에서 참수형으로 소천召天하신 선교사의 살해 영상을 굳이 찾아봤단다. 그거 보고는 구역질을 느꼈다나 뭐라나. '아무리 호기심이 동하기로서니 그것은 망자에 대한 예禮가 아니지 않느냐’ 한참 성을 높였는데, 솔직히 그의 면면에 ‘잘못했다’는 자책은 없는 듯 했다. 그냥 나이 좀 있는 교회 형이 언성 높이니 침묵해준 걸테지. 그때 확실히 알았다. 대개 인간이란 규범보다 즉자적 흥미나 호기심, senstive한 감각에 훨씬 잘 작동하는 편이라는 거. 죄책이란 생각보다 노력이 필요한 감정상태라는 거. 뭐. 나라고 얼마나 다르겠냐만.
곰팡내 나는 소리일려나. 뭐. 그렇대도 어쩔 수 없다. 꼰대의 말을 해보겠다. 윤리(倫理,ethics)란 인간의 삶에 각 잡힌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자. 우리 마음에 텅빈 A4용지를 펼쳐보자. 당신께서 생각하기에 사람이 해도 되는 것, 안 되는 것 사이에 상상의 점을 찍어보자. 사랑해도 되는 경우, 사랑해서는 안되는 경우. 해도 될 말, 하면 안될 말. 가도 되는 곳, 가면 안되는 곳 사이에도 점을 찍자. 이 점을 선분으로 주욱 이어가면 우리는 각자의 도덕률을 시각화한 도형을 마음에 그릴 수 있다. 어떤 이는 우아하고 고상한 모양을 그릴거다. 어떤 이는 괴물의 모습을 그릴런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꽤 큰 도형을, 어떤 이는 심플하고 작은걸 그릴테다. 하여간 멀쩡한 인간은 멀쩡한 도형, 경계가 오롯한 그림을 그릴거다. 기독교 교육이나 에드먼드 버크 식 보수주의 윤리의 핵심도 이 윤리적 경계를 잘 수호하며 거기에 튼튼한 외피를 두르는거다.
대개 기독교도나 도덕선생 같은 사람들은 이런 경계가 뚜렷하고 각이 잘 서있다.(뭐. 아닐 수도 있다) 하면 안되는 것, 해선 안되는 말들의 목록이 많고 콘트라스트(contrast)도 선명하다. 영어로 좀 리지드(rigid)하다, 곧은 사람이라고 평받는다.
일반적인 경향 만을 말씀 드리겠으니 양해 부탁 드린다. 인간은 개인으로 있을 때보다 군중이 되면 잘 지켜온 윤리적 행실이 종종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이야기變身談’를 보면 당대 바쿠스축제 이야기가 나온다. 조용조용하고 점잖던 사람들이 바쿠스축제가 개시되면 포도주에 취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패륜을 저질렀다. 부모가 아이도 죽이고, 남녀 간, 인간 간에 해선 안될 짓도 해방 되었다. 평소 못 말했던 온갓 죄악된 말도 솟구치는대로 내뿜었다. 그리고 배설같은 이 축일이 끝나면 군중은 다시 조용한 개인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윤리적 경계를 잘 못 세우는 사람은 대개 그가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의 통념에 종속되곤 한다. 요새도 뉴스에서 잊을만하면 장애인들을 착취하는 전통사회의 사연. 꼭 섬지역 염전 같은 전통 산업시스템 내에서만 노예 노동이 작동하는게 아니다. 시골마을에서는 ‘동네바보’로 통칭되는 장애인들이 항시 있었다. 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개인적 농사에 부당하게 차출된다. 학대도 예사롭게 당한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딱히 악인의 면모는 아닌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장애인을 착취, 학대한다. 그것이 장시간을 거쳤기에 일종의 자연스러운 ‘관습’이 된 것이다. 폭력적 관습이 동의 받고 권위를 갖는 것은 대개 ‘시간’이라는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죄악은 구성원들의 도덕적 죄책을 별반 자극하지도 않는다. (영화 ‘도그빌’을 보라) 도회지 바깥의 전통사회는 제도화된 법보다는 관습이 지배한다. 심지어 경찰 같은 공권력도 지역사회의 장로elder들에게 굴복한다. 관습의 지배 앞에서 의문을 갖거나 도덕적 죄책을 느끼는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저항하는 사람 일부는 도시문화에 편입되길 택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항시 ‘도시야말로 도덕적 공간이고, 시골이 부조리한 장소일 수 있다’는, 좀 묘한 주장을 펼치는 까닭이기도 하다.
소위 금도襟度, 인간의 도덕적 경계가 흐려지거나 둑이 터져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내려준 창세의 계명은 곧 ‘먹어도 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어주신 것이다. 신의 명命으로 매뉴얼manual을 세운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규범적 인격체인지, 반대로 인간은 그 규범을 흩트리길 좋아하는, 얼마나 얄궃은 피조물인지 알 수 있다. 인생에서 규범을 잘 세우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잘 준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고상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고상한 인간을 선생으로, 목사로, 부모로 세워야 한다. 물론 쉽진 않다.
놀랍게도 여기까지가 서문이다. 남은 분량이 본문이며 끝말이 될텐데 수습이 되려나. 이리도 긴 서문을 한 까닭이 있다. 몇 일 전, 나는 대학원에서 현직 선생들의 윤리과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정은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어떤 현직 윤리 교사의 해맑은 말을 들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의 수업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교수도 대학원생들도 하나같이 하하호호 너무나 행복했다. 새로운 행복과 번영에 관한 세속의 찬송이 빼곡했다. 나는 이 행복의 전당인 교실에서 극도의 고독을 느꼈다. 이런 부조리극은 처음 본 것이었다. 지상에 현존하는 인간 중 가장 많은 살인을 지시하고 국내외 테러 행위에 직접 연관된 젊은 독재자가 ‘너무너무 귀여워지는’ 공간. 다시 말씀 드리겠다. 윤리수업 시간에 윤리선생들 말이다. 한 학기 내내 미운털 박힐 것을 각오하고 아웃사이더적으로 소신껏 떠들던 나는, 이상하게 그 천진난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극단주의로 유명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전두환씨를 ‘엔젤두환’이라고 애칭한단다. 일부러 보란듯이 그런다. 80년 5월 광주의 영령(英靈)들을 고의로 조롱하는 네티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윤리선생은 아니다. 만일 김정은이 귀여워 죽겠다는 그 젊은 선생이 김정은에게 살해당한 무고한 영령들, 그에게 가족을 잃고 이국을 떠돌며 남녁으로 도피한 수십만의 인생들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염두했다면 차마 ‘귀엽고 예쁘다’는 소리는 못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한나 아렌트’는 600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한 이 미스터리에 관하여, 독일인들의 ‘생각하지 않음’을 지목했다. 생각의 중단. 전통사회에서 수십년간 장애인을 착취해온 선량한 모습의 마을 사람들도 실은 ‘생각하지 않음’의 문제가 있었다. 선교사의 참수동영상을 흥미로 찾아본 교회동생도 ‘나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하지 않음’의 잘못을 저지른게 아닐까.
나는 한동안 교회 청년들부터 내 또래의 여러 젊은이들, 교사 신우회를 비롯한 여러 신앙인 커뮤니티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람들의 말을 접했다. 대개 ‘김정은과 우리 대통령이 손맞잡은 모습에 눈물이 났다’는 식의 이야기가 주였다. ‘김정은이 참 괜찮아보이더라, 사랑스럽다’는 말도 들었다. '화해와 협력의 큰 전환기가 열린 시대에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도 한다.
글쎄. 모르겠다. 김정은은 지금껏 한번도 우리의 숨진 무고한 영령들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화해란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는 이들끼리 하는 것이다.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와 아직도 사과받지 않는 피해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윤리적일까. 나는 한때 학교폭력 업무를 담당했었는데 지침으로 항시 주의받았던 것이 있었다.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을 함부로 화해시키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관계회복의 시작점은 사과할 사람이 사과하는 것으로부터다. 수백만의 자국 유대인이 살해당한 일에 관해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 씨는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유대인 비문 앞서 무릎을 꿇었다. 폴란드와 관계는 그렇게 회복을 시작했다. 우리는 윤리학에서 말하는 ‘회복적 정의’라는 말을 한번쯤 곱씹어 볼 필요도 있다.
얻그제 모 공중파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세월호 침몰장면을 쓰면서, 영령들을 조롱하는 말들을 마구 했다. 방송국 사장 명의로 공식사과도 있었다. 어쩜 사람들은 못돼도 저리 못됐을까. 세상만 이런가. 아니다. 교인들도 못지 않다. 얼마전 나는 기독신자 모임에서 매우 이상한, 성적 강연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보았다. 놀라지 마시라. 남녀가 알몸으로 성관계를 하는 전신장면을 일러스트로 그려서 포스터에 떡하니 그려놓았다. 강연 제목에는 욕설에 가까운 험담 투성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성욕’ 어쩌고 하는 대목에서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멀쩡한 교회에서 대낮에 하는 강연이다. 현대 기독신자의 억압된 성을 해방하자는, 엉덩이에 뿔난 지식인들의 진부한 말장난이다. 90년대 대학가에서 지겹게 듣던 네오막시스트들 얘기를 이제는 교회에서 듣는다.
어쩌다보니 꾸짖은 이야기를 또 하게 되는데,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기독청년인 또래의 여선생을 참지 못하고 꾸짖었던 적이 있다. 교회 전도사와 묘한 관계인가 보던데 이 여선생님의 휴대폰으로 젊은 전도사가 자기 사진을 보내어왔단다. 내게 ‘멋지지 않느냐'며 자랑스레 보여준 휴대폰에는 낯뜨거운 가느다란 속옷만 한 장 걸친 근육질의 사내가 있었다. 전도사 녀석이 헬스트레이닝을 하나보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표정관리를 못하고 매섭게 물었다. 그 날 대화를 재구성해보겠다. / 선생님. 이게 지금 정상이라는건가요? / 네. 어때요. / 선생님 그러면 반대로 여자 전도사님이 저 같은 남자 성도에게 이런 속옷만 입은 사진을 보내어도 괜찮다는 말이네요? / (침묵) / 선생님. 이런걸 세미누드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목회하는 젊은 사제가 여신도에게 세미누드 사진을 보낸거라고요. / (침묵)
그 주에 우리 교회 강도사님께 이 일을 말씀드리고 물었다. 고신대학교에서는 이런 전도사가 있으면 가만두느냐고. 한마디로 단언하셨다. ‘퇴학입니다!’ 안도했다. 역시 고신은 다르구나 싶더라.
사람들은 거룩과 고상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억압을 받는다고 느끼고 스트레스 받는다. 수시로 바쿠스축제, 윤리가 와해되고 규범이 해체되는 순간을 꿈꾼다. 그래서 불뚝불뚝 이런 식의 큰 참람된 짓들을 일삼는다.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엄청난 살인을 저지른 독재자를 귀엽다며 하트뽕뽕 한다. 교회에서 누드 포스터를 펼쳐 놓는다. 교회당직자가 여신도에게 나신의 사진을 보내고도 제 행동에 무감각하다. 나는 우리 시대, 우리 신자들의 윤리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의 물음표를 그리는 중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규범보다는 통념에 더 기우는 습성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매뉴얼은 ‘남들은 어떻게 하느냐’에 있지, 내면에 있지 않다. 그냥 '남이 하면 나도 하고, 남이 멈추면 나도 거기서 멈춘다' 이거다. 나는 지금 우리 당대 신자들의 태도에서 어떤 ‘경향성’ 같은 것을 의심하고 있다.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얼마전 그의 목회 32년을 재검토하며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잘못했다.’는 놀라운 고백을 했던 바 있다. 내 머리 속에 물음표가 점점 선명해져간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잘못 커가고 있다. 마흔도 안된 자가 꼰대처럼 이리 말하여 송구합니다만. /
첫댓글 교회가 시대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앞에 바로 서도록 충성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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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힘내십시다! 우리의 마음과 성찰을 지켜주소서!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