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 예배 각 순서에 대하여
여수
은혜와 평강 교회 주보를 요약한 것입니다.
올바른
예배드림이란?
이전시대에는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즉 이 산에서 저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했다. 특별한 성소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옛시대 예배는 장소적이고 성소적이고 의식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가 가리켰던 실체, 그 진리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이 산에서 저 산에서 즉 특정한 장소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지금은 구약시대와 다른 새로운 예배질서가 임했기 때문이다. 그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이제 예수 안에서 막바로 할 수 있는
이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구약식 예배관에 젖어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제는 새로운 예배시대가 임했다고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가 가리켰던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시고 그 영을 부어주신 새로운 영의 시대를 여셨기 때문에 이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런 새로운 예배질서가 임했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이 산에서 저 산에서 특별한 곳에서만 예배할 수 있었던 구약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예배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요4:23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이제 예수님 자신 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새로운
예배시대가 열린 것을 말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께서 구약의 성취자요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4: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는 말은 단순히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놓은 우상과 대비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개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옛 시대와 대비된 새 시대의 예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경건주의자들이 말하는 개인의 정성과 경건을 말하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장소적인 예배, 모세 의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다른 새로운 예배질서가 임한 그러한 때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안 에서 이런 새로운 예배질서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구약과 달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런 새로운 예배질서가 임했기 때문에 이제 예수 안에서는 아무렇게나 예배해도 괜찮은 것인가?
신약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이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할 수 있는 이런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한다. 이제는 의식적인, 장소적인 예배가 아니라 주의
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다른 말로 하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
아버지로 임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셨으니 이 은혜를 바로 아는 사람이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 영광을 경홀히 여기고 무감각하게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온 교회가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일은 결코 방종으로 흐를 수 없는 것이고, 교만과 무관심과 무성의나 나태함 등 불경건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뵙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은 참다운 복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행위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홀대하는 행위여서 성경은 그런 마음과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간과하시지 않고
그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뵙고 예배하는 이 영광스러운 특권을 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도무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즉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예배 중에 임하여 계신다는 의식이 없이 그냥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이런저런 잡다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반듯하게 드리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생생한 교통을 하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새롭게
되고 충만케 되는 것이다. 6일 동안의 삶 속에서 이런저런 일로 피곤해지고 곤비해지고 낙심되고 침체되고 우울해진 우리 영혼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의 원동력은 예배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할 때는 우리가 우리 중에 임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예배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예배의 각 내용들 각 순서들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갖고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무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앉아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주어진 이 은혜를 참으로 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방종과 무성의와 무관심과
나태함과 교만한 모습 등 기타 잡다한 행동들을 예배 시간에 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
예배전 행위와 무언 사회
예배드리기
전에 조용히 앉아서 각자의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은혜로 이처럼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게된 새
시대의 이 은혜로 인해 우리 마음이 가득차도록)들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 즉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예배를 잘 드리도록 주의 영으로 각 사람을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예배 식순을 집행하는 목사의 직무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예배드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목사가
예배인도를 한다는 것은 예배식순에 있는 그대로 진행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자 개념이 아니고 예배인도자다. 이 예배인도자와
성도들간에 무언의 교감으로 자연스럽게 물흐르듯이 주보에 기록된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주악
주악은
이제 예배하니까 어서 앉아서 마음을 준비하라는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주악하는 사람이 예배의 시작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모인 회중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올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반주하는 사람이 교회가 예배로 모였을 때 교회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리는 자로 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악곡도 예배시작 때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는 심정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곡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악곡도 사람의 마음이 차분한 가운데서 주께로 모아지게 하는, 참으로 주를 찬송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진지하고도 간절한
곡을 택해서 반주자가 간절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으로 연주해야 한다.
3.
시편 낭독
하나님의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찬양하는 성시를 낭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그 존귀함을 선포하고 예배회로 모인 회중에게 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도록 초청하는 시간이기에 그런 의미에 걸맞는 내용의 시편을 택해서 낭송해야 한다.
4.
기원(개회기도이므로 짧게)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이름으로 교회가 모여서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 빛 앞에 서서 예배할 수 있게 된 이 은혜를 감사하고 저희 가운데 주님의 영광의
빛으로 충만케 해 달라고 간구한다.
5.
신앙고백(주기도문)
신앙고백
: 기도의 또 다른 방식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요약한 것으로서 보편교회가 공인한 성경진리의 요약이다. 이것을 고백함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확인하고 우리의 생명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옴을 고백하는 행위가 된다.
거의
모든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유는 사도신경이 교회의 기초적인 교리들을 간결하게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지키고 진리를 수호하는데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는 니케아 신경, 칼케톤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고백하는 교회들도 혹
있다. 교회가 예배회로 모여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이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확인한다.
특히
주기도문을 해도 아주 좋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기도의 완전한 모범으로서 가장 집약적이고 포괄적인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여서 예배할 때, “저희 교회가 항상 이것을 원합니다.”하고 교회가 예배 첫시간에 마음을 합쳐서 주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아주 좋다.
주기도문은 예배가 끝났다는 표시로 하는 끝맺음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사용이 틀에 박혀있고 고정적인 관념을 갖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다. 아무튼 예배기원 다음에 주기도문을 하는 것도 아주 좋은 예배식순이다.
6.
찬송
이때
찬송은 일어서서 찬송한다. 사람끼리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아버지나 어른을 맞이할 때는 가만히 앉아서 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는
공식예배는 서서하는 것이 바른 예법이다.
7.
교독문
초대교회에서와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에서는 성경봉독을 단순한 설교본문으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예배의 한 요소로 행해져 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교독문으로 대치된 것이다. 이렇게 변질된 데는 예배를 간단히 끝내야 한다는 등등의 여러 요소가 작용하였다. 하나님은 친히 그의 말씀으로
교회에 임하신다. 그리고 주의 영이 친히 자기 백성들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도록 개인이
성경을 읽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교회로 모여 예배할 때 설교본문과 구약과 신약을 낭독하는 성경낭독 시간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교회에
말씀하시도록 했다. 그리고 방법에 있어서는 교독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할 사람을 택해서 낭독하게 할 수도
있다.
8.
찬송
찬송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음율에 실어 표현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일을 노래로 감사하는 것이다. 이 찬송이 바른 찬송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베푸신 은혜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불러야 한다. 죄와 사망의 세력에 메이고 어두움에 갇혀 종노릇하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 보좌에 앉아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시대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된 이 승리의 기쁨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심정이 생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 가운데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내 믿음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그런 찬송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 찬송을 누구한테 드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찬송을 어떻게
불러야할 것인가는 자명해진다. 우리는 천지의 창조자시오,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 그렇게 함으로 비로소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배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일들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해서 찬송하는 심정 가운데서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찬송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찬송가
선택 : 찬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예배식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시에 부르는 찬송은 성도들의 일반적인 간증이나 체험을 담은 그런 류의 곡들은 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배송 위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찬송가 가사도 될 수 있으면 우리가 믿는 복음진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골라야 한다.
찬송가
곡조 또한 감정을 자극하여 음악적 쾌락으로 빠지게 하는 곡조 보다는 차분한 가운데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마음으로 찬송하는데
중점을 두는 그런 곡을 택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예배는 온 교회가 함께 찬송을 불러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음정이 너무 높지 않은 쉬운 곡을 택해야 한다. 음악은 음악자체로 법이 있기 때문에
될 수만 있으면 교회전체가 곡을 맞춰서 부르는 것이 좋고 또 각각 자기 목소리를 사용해 다성부로 부르는 것도 좋다. 또한 그렇게 하려면 많은
노력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예배가 참으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예배가 될 것이다.
9.
대표 기도
이
기도는 예배식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표기도이다. 소위 목회기도라고도 한다. 장로교 헌법책 예배 모범란에 보면 대표
기도를 1) 하나님께 영광 돌림 2) 감사 3) 자복 4) 간구 5) 마지막으로 예배 인도자들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께 영광 돌림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일들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영광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일과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삼아 함께 하신 일, 그리고 마지막 때에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신 구원의 일에서
나타난다. 이것을 시인하고 아뢰고 그것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내용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베푸신 일이 고백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고백하면 함께 머리 숙여 기도드리는 성도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그 기도 내용에 마음 속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과연
그렇게 하셨다고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란 무엇을 구한다는 그런 개념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가지는 것 그것이 기도의 핵심이고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자기가 기도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할지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어느 정도로 고백할 것인가 했을 때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를 중심으로 해서 간단히 아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주
설교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고백해주면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그렇게 고백하면 함께 기도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도 함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 주 설교 내용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기도에 모두가 함께 마음으로부터 쉽게 공감을 할 수 있는
은혜의 일을 고백하면 좋다.
세월이
가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장성함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우리의 내용도 옛날에
했던 내용과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2)
감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신 이 영광의 은혜를 감사한다.
3)
고백
이
고백은 우리의 허물들을 고백하는 것인데 주의할 것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일상의 자기 죄목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우리의
허물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 깨어 사는 이 일에 있어서 신실하지 못한 우리의 허물들을 자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죄의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난 권세 있는 백성으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보이는 것만을 좇아 믿음으로 살지 못한 삶을 산 것을 고백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런저런 죄를 범하는 부끄럽고 비천한 삶, 어두움 가운데 거한 삶을 산 것을 자백한다.
4)
간구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일들을 잘 알아서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일을 위해 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복주신 은혜의 일을 알아서 그 일로 날마다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날마다 하늘의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으로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따라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런 것이 우리가 간구하는 근본적인 내용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간구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백성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백성으로
지으셨으니 이 은혜를 따라서 날마다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해 주시라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영광을 받으시라고
간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구는 아직 알지도 맛보지도 못한 것을 구하는 그런 간구가 아닌, 이미 와 있는 은혜요, 이미 주신 생명을 누리면서 간구하는 그런 성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구는 저 멀리 초줠적으로 계셔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룩하고 두려운 그런 분에게 내 실리를 위해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아뢰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모르면 무엇을 간구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간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셔서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또 어린 아이들에게 언제까지라도 진리의 영으로 함께 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더불어 새로 나온 사람이 있으면 그들에게도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하셔서 참으로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생명의 교제를 누리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특히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의 직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높아진 사람들의 모든 이론과 생각을 바로 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직무를 위해서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당한 형제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긍휼하신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저희가 약함 중에 있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서 믿음의 승리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아울러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아신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의 형편을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일로 교회가 함께 더욱 힘을 얻어 감사할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형제들을 위해서
간구한다.
이외에도
우리의 상황을 따라 간구할 바가 있으면 간구해야 한다.
10.
헌금이란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자원하여 자기에게 있는 것을 드려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교회를 세워가고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고, 함께 몸을
이룬 형제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사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헌금을 기쁨으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보좌에 앉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사는 이 영광의 은혜를 입게 되었고 우리가 지금도 만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이 구원 역사에 봉사토록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런 믿음이 없다면 사람은 돈 앞에 마음이 좁아지게 된다.
그래서
헌금은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1)
예배 속에서의 헌금의 순서
초대
교회에서부터 종교 개혁 시대까지 예배 속에서 헌금의 순서는 성만찬 예전에서 행해져 왔다. 헌금의 순서가 이처럼 성찬식 바로 전에 있었던 것은
헌금이 내포한 성격 때문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여 봉사하는 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여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설교)은 전도적인 요소도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함께 들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함께 비세례 교인도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있었다. 그러나 헌금은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여 주님과 한 몸의 교제로 함께 한 상에 먹고 마시며, 주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여 자신을 드리는 표이기 때문에 헌금은 세례 받아 주님과 연합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사에서 배우는 것은 헌금은 반드시 예배 속에서 행하여 하나님께 드리게 했다는 점이다. 교회의 예배 예식을 떠나서 기부금 내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게 한 것이다.
교회사에서
헌금의 순서가 성만찬 처음에 행해진 것은 주의 상 앞에 나와서 주님과 한 몸의 교제로 먹고 마시는 자만 헌금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헌금의 순서를 예배 예식 밖에 두고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혼자 하게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세례교인이 하나님께 헌금을 하고자 헸을
때는 어떻게 했는가? 그들을 위해 예배당 입구에 헌금함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비세례 교인이 헌금을 하고 싶을 때는 자유로이 헌금함에도 하게 했고
그 헌금은 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2)
헌금을 드리는 방법
[1]
먼저 헌금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미리 준비(예비)하여 매주일 드리라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예비하여 두었다가 매 주일에 헌금하도록 성경은 말한다. 아무 생각없이 예배로 모이고 헌금 시간에 그제서야 호주머니를 뒤적이는 그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예배자의 모습으로는 너무나 준비가 부족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하여 이(利)를 얻었을 때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미리 준비하였다가 드리는 이런 믿음이 요구된다.
[2]
또한 헌금은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반대되는 말은 억지로 인색함으로 헌금하는 것이다. 억지로 인색함으로 드린다는 것은
근심하는 마음으로 분리된 마음으로 드린다는 뜻이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사랑하는 두 마음으로 드린다는 말이다. 구약 시대에는 외적인 규례와
법의 강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약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모든 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에 앉은 자유하는
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구약 시대처럼 외적인 법규에 의한 강제적 의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주께 드리고
살 수 있게 된 은혜와 특권을 생각하여 자원하여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법으로 규정된 헌금은 신약 시대에 있을 수 없다.
[3]
그리고, 헌금은 있는대로 해야 한다. 너희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힘껏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대로 하지만, 힘껏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분별하여 그에 합당하도록 하되 사랑의 마음으로 힘을 써서 헌금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최선을 다해서
봉사해야 한다.
3)
십일조
먼저
십일조만큼은 지금도 법적인 의무라고 말하는 분들의 이론적 근거는
①
마태복음 23:23의 말씀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판단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아직 율법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주님의 교회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게 때문에 십일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드렸고 야곱도 십일조로 서원한 것을 근거로 십일조는 율법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런 해석도 아주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모세 제도 안에 살았던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야곱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서 이루어졌던 것을 기념적으로 이루고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로 멜기세덱을 봉사했던 것이
그림자적으로 이스라엘에게서 십일조로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섬겼던 것을 이스라엘은 반복하고,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그 완성을 소망하고 섬겼다. 그런데 이제 예수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이제 예수 안에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전체를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로서 신령한 이스라엘인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십일조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완성된 전체로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에게서 이루어진 것이 후손들에게 반복되고 기념되고 그 완성을 소망하도록 된 것이고, 그것이 이제 완성된 것이다. 한 마디로 이제 신약
시대는 십일조 헌금이란 없다. 이제는 구약 시대 백성들이 드렸던 십일조보다 더 드려야 하는, 아니 더 드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데
강조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십일조 헌금이 없고, 이제 무슨 헌금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헌금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가?
구약
때는 첫 것을 드리고,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어서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구약 시대는 아직도 죄가 제거되기 전이어서 그들의 전체로 하나님을 봉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십분의 일과 첫 것을 드림으로 앞으로
전체를 하나님께 드릴 그 소망 중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다. 대표 수로 십분의 일을 드림을 통해 앞으로 모든 것, 전체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릴 그런 소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질서다.
구약의
모든 제도들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이런 구원을 그림자적인 방식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도나 규례들은 신약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옳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세력은 영원히 제거되었고 모든 것이 거룩해졌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고 사는 이런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것 전체를 주께 드리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복이다.
4)
주일 헌금
주님은
그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제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분의 일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머지는 우리 마음대로 쓰라고 그렇게 가르칠 수 없다. 신약 백성은 이제 우리의 전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봉사해야 하는 거이다. 따라서 지금은 십일조 헌금 종목은 더 이상 없다. 주의 날에 교회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니까
‘주일 헌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일헌금을 얼마큼 드릴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린 정신을 살펴보자.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만 바친 것이 아니라 첫째 십일조,
둘째 십일조가 있었고, 그리고 3년마다 드리는 셋째 십일조가 있었다.
첫째
십일조는 한 해의 추수가 끝나면 백성들은 먼저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자기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 소출의 십분의
일을 내어, 분배 받는 기업이 없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보장하게 한 것이다.
둘째
십일조는 소위 축제 십일조로서 첫째 십일조를 바친 백성들이 그 나머지 소출 9/10가운데 다시 1/10을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으로
하나님께 감사 축제(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셋째
십일조는 3년마다 십분의 1을 내게 해서 그것으로 성중에 거하는 고아나 과부, 가난한 자, 나그네 등을 돌아보게 했다. 즉 구제비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2/10를 드린 것이고, 3년마다 한 번씩 3/10을 드린 것이다.
이
십일조 제도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배우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따로는 존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내가 벌어서 나 혼자 먹고 산다는 그런 이방의 풍조를 따라 산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립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그냥 하나님이나 믿음과 전혀 상관없이 그냥 먹고 살기만 위한다면 십일조를 안 내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와 같이 십일조도 안 내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즉 땀 흘려 농사 짓고 부지런히 일해서 먹으면 잘 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이란 나라로 세우신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징은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과연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목적대로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려면 반드시 율법에서 명한대로
첫째 십일조, 둘째 십일조, 그리고 3년마다 드리는 셋째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이루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에서 배우는 바이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없어졌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가 땅 위에 하늘의 신령한 공동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서 있고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로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땅 위에 서 있는 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세워 가고,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일 헌금을 얼마나 드려야 할 것인가를 믿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땅 위에서 사는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에 속한 지체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해서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깨달으면 우리가 각자의 형편대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생명을 바쳐 수고하고 헌금도 힘을 다해 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어떻게 살든지 관심도 없이 혼자만 잘 살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헌금을 얼마나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로 굳게 서야 나와 가정도 믿음에 서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교회의 지체로 부르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 속에서 배우고 자라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할 때 ‘그대는 이제부터 교회의 지체된 한 사람임을 알아 교회의 사명을
드러내고 완수하는데 힘쓰며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는 일을 하는 데 새인 생활의 목적도 있다는 것을 알아 앞으로 교회 지체로서의 본분과 책임과 그
의무를 다하시겠습니까?’ 라고 묻고 거기에 ‘네’라고 대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합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개인주의는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로 부른
구원이어서 우리의 바른 신앙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아는 자들답게 우리가 땅 위에서 주님의 교회를 이루어 가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 진행되어
가는 하늘의 하나님의 경영을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가 헌금을 얼마나 드려야 하는 것인가를 참으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묻고 믿음으로 생각하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 헌금을 드려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5)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복 주님
우리가
헌금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그런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봉사하는 기쁨으로 준비하여 헌금하면 그런 일에 대해
하나님의 복주심을 성경에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5~11, 빌립보서 4:17~1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즐겨 내는 자에게 계속 풍부하게 주셔서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헌금하는 것을
심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한다. 하나님을 위해 심는 자에게 그 착한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심을 것을 계속 풍성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속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주님의 복주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9:6절에 보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시면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할 것을
말한다. 문맥에 의하면 적게 심는다는 말은 억지로 인색함으로 한다는 뜻이고, 많이 심는다는 말은 자원하여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즉 축복의
마음으로 심는 것을 뜻한다. 많이 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즉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신다는 것은 만사형통의 뜻이 아니라, 연보의 일을 넘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하신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여 함께 부요케 되고 함께 감사하는 헌금의 일을 말씀하는 마지막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후 9:15)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여 헌금하는 일을 말씀하면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찼던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주신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는 곧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자신을 주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 헌금생활을 비롯하여 성도의 봉사 행위에서 지극한 감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의
헌금 생활과 봉사의 행위를 통하여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시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교회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만물의 생명을 새롭게 하도록까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교회 안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될 수 있도록 주님께 드리는 자들을
복 주신다고 하는 것이 성령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