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곡된 단군신화를 바로 잡으려는 소설가 김태영 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김 선생의 소설 ‘선도체험기 67권(유림출판사) ‘에서 일부를 발췌했다. /편집자주 ***
{요점 :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 왕검은 재위기간이 93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배달국 제18대 거불단 한웅천황이고 어머니는 웅씨 왕국의 공주입니다. 신묘년(서기전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단군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에서 1백일간 기도해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해 낳은 아들’이라고 한 대목입니다. 그리하여 단군의 자손인 한국 민족을 졸지에 곰의 후손들로 격하시켜 놓았습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민족을 일본의 영원한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서 이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이러한 역사 해석 방법이 이른바 식민사관인데 일제는 이것을 식민사관을 전파하는데 이용했습니다.
현재 각급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 민족은 곰의 자식이라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군신화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 중에는 그 속에는 한국 민족에 관한 심오한 철학과 종교적 함의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민족을 깎아 내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은 웅씨왕국의 공주인 초대 단군 왕검의 어머니를 웅녀 즉, 암곰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군요.“ ”바로 그것이 왜곡날조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내일 개천절... 단군은 누구인가
국제축구연맹(FIFA)의 2002월드컵 공식사이트(fifaworldcup.yahoo.com)의 뉴스(news) 코너에 단군신화가 자세히 소개됐다. 한국팀의 월드컵 4강 진출이 확정된 지 이틀후에 실린 ‘단군, 국가의 탄생(Tangun:birth of nation)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은 5천여년전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의 아들 환웅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에서 1백일간 기도해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해 낳은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단군왕검 재위기간 93년
월드컵 조직위 관계자는 “한국팀이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진출한 뒤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은 단군이래 가장 기쁜 날’이라고 소감을 밝히자 외국인들이 ‘단군이 누구냐’고 궁금해 했다”며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단군을 설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이트에선 한국팀의 쾌거를 단군신화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했다. “태극 전사라 불리는 한국 대표팀은 단군신화의 곰의 인내를 연상케 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강팀을 상대로 호랑이처럼 고도의 압박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해낼 수 있다’는 웅녀와 같은 진정한 믿음이었다.” “선생님, 저는 이 기사를 읽고 하도 속에서 뿔따귀가 치밀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거야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를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화도 치밀고 기도 막히겠지만 우리나라 상고사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단군 신화라는 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근거라도 있습니까?” “우리나라 고대사(古代史)에 대한 기록은 지금 세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서기 1145년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입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주축으로 한 삼국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문학과 종교, 민담, 언어, 사상, 전설과 같은 옛 자취들은 빠진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 책이 나온지 1백년쯤 뒤에 이를 안타깝게 여겨온 승(僧) 일연(一然)이 삼국사기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쓴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 역시 삼국사기에서 빠진 부분들이 많이 보충되기는 했지만 삼국을 주축으로 한 기록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 상고사 부분이 실사(實史)가 아니라 사람을 동물로 희화한 동화나 우화의 형태로 책 앞머리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본 사학자들은 단군신화라고 명명하고는 한갓 신화에 지나지 않는 우리나라의 상고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것을 식민사학을 보강하기 위한 호재로 이용해 왔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라고 만 적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기는 지금 전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고기를 단군고기(檀君古記)라고 말하는데 그러한 이름의 기록 역시 전해지지 않고 그러한 기록이 과연 있었는지 아직 확인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한웅이 곰이 변신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기록은 단군조선을 상세히 다룬 한단고기 속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도 규원사화에도 단기고사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한 글을 쓴 사람이 만약에 한국인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제 아무리 모화사대주의자라고 해도 감히 자기 조상을 곰이라고 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곰의 새끼로 비하하는 짓은 저지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측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들은 치우천황시대부터 쌓이기 시작한 배달족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기회만 있으면 우리의역사를 깎아 내리고 왜곡하는데 혈안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치우천황의 동생들중 하나이 치우비를 죽인 것을 치우천황을 죽였다고 허위 과장하거나 왜곡 날조하는 식입니다. 단군 우화도 바로 우리 민족을 평가절하하기 위한 왜곡날조의 한 실례입니다.”
“그럼 선생님, 우리측 기록을 참고해가면서 저들이 어떻게 우리 상고사의 진실을 자기네 구미에 맞게 뜯어고쳤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단군은 누구이며 역사의 실상을 어떠했는지 먼저 우리측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 왕검은 재위기간이 93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배달국 제18대 거불단 한웅천황이고 어머니는 웅씨 왕국의 공주입니다. 신묘년(서기전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사진 :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자락에 위치한 단군릉의 모습. 북한은 1993년 단군뼈 발굴을 계기로 이듬해 "민족의 시조"인 단군릉을 건설했다. 피라미드 형태의 단군릉은 장군총을 본떠 만든 것으로 규모는 한 변이 50m, 높이 22m, 9층 계단식 현채의 초대형 무덤이다 능 입구에 있는 화강암계단은 모두 279개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식민지 사학 보강 호재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했습니다. 그가 14세때 웅씨왕은 그가 지혜롭고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자기 나라로 모셔다가 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비왕이라는 직책을 주고 큰 읍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가 비왕으로 있은지 24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아홉 갈래로 갈리어 각처에 흩어져 살던 배달족의 무리들이 큰 모임을 열고 그를 새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배달국 기원 1565년 무진(戊辰) 원년(서기전 2333년) 10월 3일의 일이었습니다.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박달나무 무성한 둔덕에 자리잡은 그는 부하들과 함께 성대한 제단을 쌓고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려 나라의 융성과 백성들의 안녕을 빌고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의 큰길을 따라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을 엄숙하게 다짐했습니다. 단군 왕검은 나라를 새로이 세우는 데 있어서 배달국 신시 시대의 옛 규칙과 법도를 따르기로 하고 하고 서울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조선이란 국호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는 구별됩니다. 그래서 사학자들은 전자를 단군조선이라고 하고 후자는 이씨조선, 이조선 또는 생략해서 이조라고 부릅니다. 혹자는 일제가 이씨조선왕조를 폄하하기 위해서 이조라고 명명했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례로 저 유명한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조라고 불렀으니까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 우화는 배달국시대 18대 1565년의 역사와 단군조선시대의 47대 2096년의 총 3661년의 역사를 한웅과 단군의 단 2대의 역사로 왜곡 압축시켜 놓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치고 더욱 희한한 것은 단군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에서 1백일간 기도해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해 낳은 아들’이라고 한 대목입니다.
이리하여 단군의 자손인 한국 민족을 졸지에 곰의 새끼들로 격하시켜 놓았습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국민족을 일본의영원한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서 이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이러한 역사 해석 방법이 이른바 식민사관인데 일제는 이것을 식민사관을 전파하는데 이용했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에는 단군세기와 단군고사를 위시한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 기록들이 숱하게 남아있을 때였는데 하필이면 한족이 우리를 중상모략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유포시킨 것이 분명한 것을 우리의 상고사라고 하여 그가 쓴 삼국유사 첫 머리에 인용한 지혜롭지 못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해방된 지 57년이 된 지금도 한국의 사학교육을 상당부분 떠맡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각급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 민족은 곰의 자식이라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군신화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 중에는 그 속에는 한국 민족에 관한 심오한 철학과 종교적 함의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민족을 깎아 내리고 모욕하기 위한 가증스러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은 웅씨왕국의 공주인 초대 단군 왕검의 어머니를 웅녀 즉, 암곰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군요.“ ”바로 그것이 왜곡날조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지금도 모화사대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한국인들이 그릇된 견해를 우리의 교과서에 그대로 인용하여 싣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면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모화사대주의적 화이사관을 따르는 유학자들과 한국 학생의 역사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지금도 배달민족을 곰의 후손으로 깎아내린 단군 우화를 그대로 이용함으로써 민족 자해 행위를 여전히 자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아무리 식민사관에 환장을 한 사학자라고 해도 한웅이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와 결혼했다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얘기를 아무런 검토도 없이 교과서에 그대로 인용하여 가르친다는 것은 좀 무책임한 짓이 아닐까요?“ ”지극히 무책임한 짓일 뿐만 아니라 민족 자멸, 자해 행위이기도 합니다. 암곰이 어떻게 졸지에인간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천년 묵은 여우가 재주를 넘으면 미녀로 탈바꿈한다는 전실이 있기는 하지만 암곰이 여인으로 둔갑했다는 희한한 얘기는 단군신화에만 등장합니다.“
모화사대주의 여전 판쳐
“그러니까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 우화는 어디까지나 단군의 역사에서 힌트를 얻어 사람을 동물로 희화한 동화나 우화일 뿐 단군실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단군 우화는 민담, 전설, 신화 따위에 속하는 일종의 민속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인원(類人猿)이 사람으로 진화하는 데도 생물학적으로는 적어도 수백만년 내지 수천만년이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5천년 전의 곰이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버젓이 진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생물 진화상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식민사학에 길들여진 그대로 지금도 아무런 반성없이 단군신화를 교과서에 싣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제축구연맹(FIFA)의 2002월드컵 공식 사이트의 뉴스 코너에서도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은 5천여 년 전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의 아들 환웅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에서 1백일간 기도해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해 낳은 아들’이라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개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까 한국에는 세가지 종류의 고대사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시고,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연의 삼국유사가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고대사 기록에 대해서는 말씀하셨는데 세 번째 고대사 기록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의 역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도 첫 머리에 나오는 단군 우화 이외에는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빠진 한국 상고사 부문을 보완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바로 한단고기입니다.
한단고기 속에 나오는 안함노가 쓴 삼성기전 상과 원동중이 쓴 삼성기전 하와 이암이 쓴 단군세기 그리고 범장이 쓴 북부 여기 상하 및 가섭원부여기가 그것입니다. 이상 네가지 기록은 고려시대에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이맥이 쓴 태백이사는 이조 때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화사대주의 사상에 미쳐버린 유학자들이 득세하던 고려와 이조시대에는 이 책들을 도저히 드러내 놓고 읽거나 출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까딱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해야 하는 살벌한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사를 취급한 기록은 한단고기 외에는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전하는 것으로 한단고기 외에도 이조 때 북애가 쓴 규원사화와 대진국 때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