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달맞이행사 참관기(記)
2월 5일은 정월대보름날이다. 사실 집에서는 대보름 음식도 해 먹지 않아서 보름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 갔다가 오후에 귀가하는데 동네 입구 길에 차들이 줄을 이어 있고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동네 입구에 있는 문화예술회관에서 무슨 행사를 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차량의 행렬이 회관 방향이 아닌 태화강 둔치 쪽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차량뿐 아니라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 강변으로 걸어가고 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렇다. 오늘이 바로 정월대보름날이구나! 그렇다면 이 혼잡은 천상리와 구영리 사이 강변 둔치에서 있을 달맞이 행사 때문이구나! 나는 갑자가 이 행사에 대해 슬슬 구미가 당겼다. 요즘은 옛날처럼 자연부락 단위의 순수한 소규모 달맞이 행사는 사라졌다. 그러나 읍·면·동 단위의 지자체별 큰 행사가 정월대보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에도 퇴근을 하다가, 또는 운동을 하다가 빈터에 천막을 쳐 놓고 통나무와 대나무를 세워 달집을 만들어 놓은 걸 더러 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면서 ‘어, 보름이 내일이네’, 또는 ‘오늘이 대보름날이구나’ 등의 생각을 떠올린 적은 있지만, 직접 저녁에 그 행사를 보러 간 적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참 그만큼 바쁘게, 또는 여유도 없이 살아온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퇴직을 한 것이니 남는 게 시간 아닌가? 나는 폰을 꺼내 달 뜨는 시간을 검색해 보았다. ‘다섯 시 이십일 분!’ 현재은 시간 네 시 삼십 분! 집에 가서 이른 저녁을 먹고 둔치까지 오는데 오십 분! 시간상으로는 충분하다. 나는 오늘 밤 달맞이 행사에 구경갈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달이 동산 위에 두둥실 그 얼굴을 내밀면 달집에는 불이 점화될 것이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점화 장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며 돈 없는 빈 지갑이다. 강가 둔치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인파를 헤집고 앞질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확성기의 소리는 왕왕 귓전으로 울려오는데 나는 마음만 그저 급해지고 있었다.
내 아주 어렸던 소시적이 떠오른다.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어머니가 오곡밥애 두부조림에 미역, 고치미, 무, 콩나물, 취나물 등 여러 가지 나물을 만들고 김을 간장과 함께 밥상에 올렸다. 우리 형제들은 그 김을 한 장이라도 더 먹으려고 뜨거운 음식을 재빨리 목구멍으로 삼켰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초배기를 들고 동네 집집을 돌며 보름밥을 얻으러 다녔다. 이날만은 아이들이 그릇을 들고 오면 몇 숟갈씩 밥을 퍼주는 풍습이 있었다. 얻어온 음식을 나물과 섞어 비빔밥을 만들어 배불리 먹고 아이들과 어울려 떠들썩하게 온 동네를 누비며 다녔다. 닫아놓은 남의 집 삽짝문을 밀치고 들어가 마당에 금을 긋고 놀이를 하거나 새끼를 말아 짚공을 만들어 찼다. 그러면 먼지가 일어나 그 집의 마루와 장독대가 온통 먼지로 하얗게 덮였다. 저물녘 집주인이 돌아오면 먼지 난다고 호통을 쳤다. 우리는 주인의 기척을 느낀 순간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오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뿐 더 이상의 야단은 없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일찌감치 올라간 동네 청년들과 아이들로 앞산 만댕이는 북적댄다. 만댕이는 해마다 태운 달집으로 인해 나무는 없어지고 황토만이 불그스레 대머리를 드러내고 있다. 청년들은 준비해온 낫과 톱으로 어른 키보다도 더 높은 달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불에 잘 타는 마른 억새와 갈비를 놓아 불쏘시개를 마련해 놓았다. 이제 달이 신기부락 뒷산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떠오르기만 하면 이 달집은 활활 타오를 것이다. 저 아래 주막에는 남창 지서에서 순사가 와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순사도 이 마을의 행사를 그때는 억지로 막지는 못했다. 그저 산불이 나지 않고 무사히 행사가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이다.
동녘이 점점 불그레해지다가 드디어 나무 사이로 번들거리는 진짜배기 달의 본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산꼭대기에 모인 사람들은 두 손바닥을 모아 나발을 만들고는 목청껏 외친다.
“달 봤다 ~~, 달 봤다 ~~, 달 봤다 ~~”
이 소리는 거의 동시에 마을 뒷산마다 이구동성으로 퍼져나간다. 신기 뒷산에서, 귀지에서, 하방 뒷산, 중광 뒷산까지 광청골 골짜기가 온통 ‘달 봤다’는 함성과 함께 달집에서는 화염이 피어 오른다. 이때 사람들은 달에게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을 빈다. 두 손을 합장하고 소원을 기원하는 그들의 모습은 엄숙하고도 경건하다.
사람들은 왜 달을 그냥 보지 않고 달집이란 걸 지어 불을 지르는 것일까? 그때 구경하던 마을 어른 중 한 분은, 달이 너무 얼굴이 환하고 밝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불을 질러 그 연기로 달의 얼굴에 그을음을 칠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인 것 같다. 얼굴에다 그을음을 칠한 달에게 자신의 소망을 빈다는 게 말이다. 그리고 대자연의 일부인 달이 환하고 아름답다면 그 미(美)를 감탄하고 즐기면 그뿐이지 무슨 훼방을 놓겠는가 말이다. 그보다는 신성한 제의적 의식에 놀이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예로부터 불은 신성시 되어 왔다. 제사 때 촛불을 켜고 향불을 피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달 중에 가장 둥근 보름달,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먼저 오는 정월의 보름달에는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래서 1월의 보름날에 떠오르는 달에게 소원을 빌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달에게 그냥 소원을 말할 것이 아니라, 아침에는 오곡밥과 푸짐한 음식으로 빌고 저녁에는 달이 떠오를 때 달집이라는 걸 지어 달에게 바치며 비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달이 어떻게 지상에 지어진 집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달집을 불로 태워 달에게 바치는 의식으로 본다면 지나친 나의 억측일까? 민간 신앙에서도 있듯이 현상계의 사람들이 영계의 존재에게 무엇을 보내고 싶을 때 그 물건을 불에 태워 보내는 방식과 상통한 거로 볼 수는 없을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맞이 인파에 밀려 천상리와 구영리를 잇는 점촌교 다리 입구까지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구경꾼들은 세 패로 갈라졌다. 천상리 쪽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강가 고수부지에 마련된 행사장에 가는 패와 점촌교 다리 위에서 구경하는 패, 구영리 쪽 강둑으로 가서 강 건너편의 행사를 구경하려는 패이다. 어느 쪽이든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나는 다리 위에서 행사를 구경할 참이었다. 다리 위는 높은 위치라 행사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게 결정 이유였다.
나는 점촌교 중간쯤에 위치를 잡고 행사장을 보았다. 확성기에서는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큼직한 달집 앞으로 도포를 입은 제관 네 명이 올라가고 있다. 사회자는 그 네 명이 누구인지 한 명 한 명 소개하고 제주를 올리는 순서와 방법을 소개했다. 초헌관은 이 지방의 수령인 범서읍장이 되었다. 초헌관을 필두로 차례대로 그 네 명이 술을 올리고 재배(再拜)하고 각자 한마디씩 마이크를 받아 군중들에게 새해 덕담을 했다. 시간은 흘러가 달은 이미 구영리 아파트 옥상으로 둥글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은 지루한 덕담보다는 보름달을 보며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달이 떠올랐으니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달집 점화가 있을 것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저 달집은 활활 타오를 것이었다.
나는 그 점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기 위해 폰을 조작해 두고 기다렸다. 그러나 점화는 되지 않고 달갑지 않은 내빈 소개만 계속 이어졌다. 다음으로는 여성 대표 여섯 명이 단상으로 올랐다. 범서읍 여성회장, 범서 적십자사 회장, 범서 여성 청년 회장, 범서 무슨 여성 회장……. 한 명 한 명씩 자신의 직책과 이름이 불려 지면 두어 발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한마디씩 덕담을 했다. 그들도 술잔을 올리고 재배하고 들어가고……. 사회자의 진행은 계속되었다. “다음으로는 법서읍 의원을 소개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됐다 마! 고만하자!”
달은 구영리 아파트 옥상을 떠나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달 뜨는 시간에서 이미 한 시간 이 지나 있었다. ‘고만하자’는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동조의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멀찍이 다리 위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 내 주변에서도 불만의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사회자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눈치채고는 내빈 소개를 끊고, ‘애기달집’에서 불씨를 채화하는 다음 순서를 소개했다. 사회자의 말을 듣고 보니, 행사장 단상 앞에 있는 거대한 달집 외에도 행사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높이 두 길쯤 되는 조그마한 달집이 하나 더 있었다. 청년회 회원들이 큰 달집에 세워둔 깃발 이십여 개를 들고 농악대가 선도하는 풍악에 맞추어 애기달집으로 갔다. 애기달집이 점화되자 불길이 솟아올랐다. 선녀가 그 불길에 봉을 갖다 대어 불을 채화했다.
애기달집은 무엇이고 왠 선녀인가? 그렇다면 저 애기달집은 그리스 오림피아의 헤라 신전이나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 신성한 불을 선녀가 등장하여 채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선녀는 월궁항아(月宮姮娥)인가. 선녀의 불씨는 십여 명의 제관들에게 붙여지고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일시에 달집에 점화되었다. 기름에 잔뜩 절어 있던 달집은 세차게 타 올랐다. 바람따라 불길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 불길은 강물에 녹아 물결을 붉게 물들이며 흘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따분함을 떨치고 함성을 지르며 카메라를 눌러댔다.
그러나 정작 큰 함성은 그 뒤에 연어어 이어진 불꽃놀이에서 터져 나왔다. 이백여 발은 될 듯한 엄청난 양의 불꽃 축포에 사람들은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달집태우기는 그저 서막일 뿐이었다. 저 불꽃놀이야말로 저 군중들이 진정 바라던 하이라이트였던 모양이다. 저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이 지루한 행사를 끝까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구경꾼들의 기분은 절정에 닿아 있었다. 불꽃놀이는 십 분도 넘게 진행된 듯 내가 다리 위를 떠나 집을 향해 한참을 걷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이제 시대는 많이 변한 모양이다. 달집태우기만으로는 사람들의 기분을 충족시킬 수 없다. 좀더 시각적이고 자극적인 현대적 요소가 민속놀이에도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현대인들은 인내심이 많이 줄었고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다. ‘빨리빨리’ 문화가 결코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행사에든 있기 마련인 내빈 소개가 행사의 긴 시간을 잡아먹어 본말이 전도되는 일은 앞으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2023.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