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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석송 이종호님의 개인전
일시 : 5월 6일부터 11일까지 장소 :서울 예술의 전당 3층 초대 : 5월 6일 오후
아래는 석송 이종호님의 작품세계에 대한 월간 묵가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노자를 닮고자 하는 석송 이종호의 서예세계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서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워 왔기에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일컬어진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서예가들은 다양한 서풍으로 독특한 작품을 발표해 오고 있는데 지역의 독특한 문화예술환경과 무관하지 않은듯 하다. 2009년 5월 6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3층 전관에서 개인전을 펼치는 대구출신 중견서예가 석송 이종호를 만나 그의 생각과 서예관에 대해 들어보았다.(글쓴이 ; 정태수, 한국서예사연구소장, jts2003@hanmail.net) * 이 글은 월간 묵가 2009년 5월호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정 : 대구의 서예문화와 인적 인프라는 개성이 뚜렷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이 : 대구는 무엇보다 문인묵객의 도시, 혹은 미술의 도시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교육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대구의 문화예술인은 민족의 애환을 그리는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는데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는 그의 글씨는 대구문인묵객풍의 전통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근대시기 석재 서병오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그 맥을 이어받은 이래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미술분야로만 보자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작가를 배출하고 있으며, 또한 전국의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컬렉터들 역시 서울 다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대구의 문화예술전통 및 이와 관련된 인적 인프라는 어느 도시보다 풍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해 타지역에 비해 개성이 다양한 서예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 서예입문과 학서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이 : 저의 서예입문은 초등학교 4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문중의 대소사를 붓으로 정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복사하듯이 흉내를 내어 천자문을 임서하곤 하였는데 집에서 배운 글씨로 중학교 때 대구시학생서예대전 중등부 최고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께서 직접 제 손을 잡고 죽헌 현해봉선생님의 서예연구실에 정식으로 입문시켰습니다. 영남대 경제과에 입학한 뒤에도 서예서클인 한묵연에 가입하여 먹향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성인이 된 1979년 율산 리홍재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993년 평생 동안 먹향과 함께 하기 위해 단허서실을 개원하였습니다. 정 : 이번 두 번째 전시의 특징이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 저에게 있어 지난 첫 번째 전시의 의미가 그 동안 공부해 온 서사역량을 보여주는데 있었다면, 이번 두 번째 전시는 제가 지향하고 있는 생각의 일단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지난 전시 이후 저는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면서 노자(老子)를 공부하였습니다. 2천 6백년 전의 노자는 하늘을 담는 허공,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빈 마음의 도(道)를 오천여자의 글자를 사용하여 세상에 남겨놓았습니다. 그 글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입니다. 그런 연유로 도덕경 1장부터 81장까지를 면밀히 검토한 뒤 그 가운데 35장을 골라 작품으로 꾸며보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가지에 대해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의 모든 작품을 행초서(行草書) 위주로 제작하였는데, 행초서는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임의성(任意性)이 크기 때문에 고전적인 틀에 고정되지 않고 가장 원활하게 저만의 글씨를 써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노자의 도덕경에 담긴 철학적인 내용의 중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의 처세술로 널리 인용되는 화광동진(和光同塵) 등 노자사상을 대표할만한 글귀들을 하나씩 독립된 작품으로 창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즉 문자의 외적인 형태만큼이나 도덕경을 읽은 저의 내면정신을 전하는데도 비중을 두어 형신(形神)일치를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정 : 앞으로 작가로서의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 서예는 다른 조형예술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곧 객체(客體)에 대한 재현을 위주로 하는 예술이 아닌 작가의 내면세계를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예가에게는 기본적인 서사역량과 함께 뚜렷한 예술철학을 갖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20년 넘게 다양한 서체의 기법연마를 위해 촌각을 다투어왔던 제가 이제 스스로 철학을 갖추어야 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동양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저의 내면을 채우고 시야를 넓혀 새로운 서예관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전시를 자신을 냉정히 돌아보고 비워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내면을 살찌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정 : 출강한 학교에서 졸업한 학생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등 서예지도에 있어서도 탁월한 노하우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문하생들을 지도할 때 어떤 자세로 지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 “서여기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글씨는 결국 그 사람의 학식이나 교양을 총체적으로 담아낸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서예는 단순한 문자의 조형놀음이 아니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담아내는 사상과 감정의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정동고등학교에 오랫동안 출강하면서 학생들에게 글씨 이전에 사람이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인성과 예의염치를 가르쳐 왔는데 졸업한 이후에도 학생들이 찾아와 따르는 것을 보람으로 여깁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듯이 같은 길을 간다는 마음으로 기예전수보다 인성함양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예는 ‘예(藝)’보다 ‘도(道)‘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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