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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이론,정보 스크랩 [이론] 등석여론
새벽 추천 0 조회 57 09.12.18 08: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晥公山처럼 秀麗한 鄧石如   柳 濟 寔 (전북대 명예교수)


등석여(鄧石如)는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안휘성은 북동에서 남서로 양자강(揚子江)이 흐르고, 그 남부 북안(北岸)에 회녕이 있다. 그리고 강의 북쪽에는 환산산맥(喫山山脈), 남쪽에는 황산산맥(黃山山脈)이 있으며 환산산맥 중의 최고봉이 환공산(喫公山)이다. 회녕은 이 환공산의 서북편에 있는 셈이다. ‘완백산인’이란 호는 그의 운명의 명산이며, 자나깨나 서북의 하늘에 높이 솟아 그를 북돋아준 환공산의 ‘환(喫)’자를 둘로 나눈 것이다. 그는 힘이 절륜하여 장사(長沙)의 승단(僧團)에 있을 때 도적떼들이 달려들어 요란을 떠는데 이들 수십 명의 악당들을 혼자서 때려눕혔다는 일화가 전한다.


부친은 이름이 일지(一枝)이며 목재(木齋)라 호를 쓴 박학한 분으로 사체서(四體書)를 잘 모각(摹刻)했으며, 성품이 우뚝 두드러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해 완백은 어려서 마을 아이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양식을 바꾸어 먹는 간구한 생활이었으나 틈만 있으면 마을의 유식한 어른을 찾아 경서를 배우고, 부친 목재 선생의 전각과 예서 및 각 체를 본떠 흉내를 내었다 한다. 그의 서가(書家)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부친을 사사(師事)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문산은 완백을 강녕의 거인(擧人, 과거에 鄕試를 합격하여 중앙의 會試를 볼 자격을 얻은 사람) 매류(梅熊)에게 소개한다. 그는 북송(北宋) 이래의 명문가로 진한(秦漢) 이래의 금석(金石)의 명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부친 곡성(捻成)은 역술(曆術)과 산학(算學)의 대가로 강희제(康熙帝)의 수우(殊遇)를 받아 궁중에 비장한 보배를 많이 하사 받은 사람이다. 매류는 완백을 신임하여 그에게 의식(衣食)과 지묵(紙墨)의 비용을 아낌없이 주었으며, 원 없이 공부하게 해주었다. 완백은 환산산맥 최고봉의 기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매류를 매혹했던 것이다.


이 완백 최상의 패트론의 비호 아래 8년의 세월을 그는 무섭게 면학에 몰두했으며, 그가 공부하던 열광의 모습은 포세신(包世臣)의 『완백산인전(完白山人傳)』에 자세하다. 그는 먼저 전서(篆書)로부터 시작하였다. <석고문(石鼓文)>,  <역산각석(辣山刻石)>, <태산각석(泰山刻石)>, <개모묘석궐(開母廟石闕)>,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 <선국산비(禪國山碑)>,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및 이양빙(李陽啣)의 <성황묘비(城隍廟碑)>, <삼분기(三墳記)> 등을 각각 백 번 임서(臨書)하였다. 또한 전서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고심한 끝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스무 번 수사(手寫)하였다. 그밖에도 삼대(三代)의 종정(鐘鼎), 진한의 와당(瓦當), 또한 비액(碑額)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공부에 임해서는 매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큰그릇에 가득 채우고서 밤늦게까지 그 먹을 다 쓸 때까지는 자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정진하여 5년만에 전서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체력 또한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는 예서에 착수하여 3년이 걸려 예서를 습득한다. 완백이 매류와 작별하면서 새겨준 <청소당(淸素堂)>이란 전각과 <의여고회(意與古會)>란 인장은 건륭 45년(1780) 작이라 한다. 이로 보아 그가 매류의 비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건륭 37년 30세로 역산(逆算)된다. 그 뒤 완백은 폐의파모(弊衣破帽)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매예(賣藝)생활로 돌아간다. 때마침 양주(揚州)에서 『통예록(通藝錄)』이란 대저(大著)로 유명한 석학 정요전(程瑤田)의 지우를 얻는다. 요전과는 마음 깊이 허여하는 사이가 되며, 요전은 양주에서 김방(金姪), 장혜언(張惠言) 등을 소개한다. 『완백산인전』에 의하면 김방의 집에서 교수를 하던 장혜언이 시내에서 완백의 서를 보고 돌아와 김방에게 “오늘 이사(李斯)의 진적(眞蹟)을 보았다.”고 하면서 놀라는 김방에게 자상한 내용을 얘기하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자고 졸라, 둘이서 시내의 폐허가 된 절간에 유숙하던 완백을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서도사(書道史)에 희귀한 걸작들을 함께 남기게 된다.


완백의 『사마온공가의예서책(司馬溫公家儀隸書冊)』에 장혜언이 쓴 발(跋)에는 완백을 만난 것이 1786년, 건륭 51년이라 쓰여 있으므로 이때 완백의 나이는 44세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은 이미 완성된 자기 집의 장려(壯麗)한 가묘(家廟)의 현액(懸額)을 모두 완백에게 의뢰했으며, 또한 장혜언은 1년간 완백을 따라 전서를 배웠다 하니 이들이 완백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나를 알만 하다. 완백은 이 무렵 김방을 통해 향리에 돌아온 태자태부(太子太傅)이자 호조상서(戶曹尙書, 현 재무부장관) 조문식(曹文埴)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청으로 완백은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의 횡권(橫卷)을 휘호하여 하루 안에 완성하니 조상서는 그의 필력에 경탄하여 사람들에게 완백의 사체서는 온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유석암(劉石庵)이 72세 때에 완백의 서를 보고 크게 놀라서 “천수백년(千數百年) 내에 이런 걸작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05년 가경(嘉慶) 10년 10월, 63세로 고향 환공산 아래에서 죽기까지 12년간은 제국을 방랑하면서 매예생활 중 1802년 가경 7년 강소성(江蘇省)의 진강(鎭江)에서 일생의 지기(知己) 포세신을 만난다. 포세신이 완백을 만난 것은 장혜언의 아우 장기(張琦)에 의해서였다 한다. 뒤에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완원(阮元)의 유명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함께 청조의 서법을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세신은 그 자신 뛰어난 서가이면서도 자신의 서론(書論)의 중심에, 이를테면 자설(自說)의 심볼로서 놓은 것이 완백의 서, 그 중에서도 전서·예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세 때 만난 완백에의 존경심이 그에게 서론(書論)을 쓰게 했다 함이 옳을련지도 모르겠다.


『예주쌍즙』 중 청대(淸代) 101인의 작품을 품평(品評)한 「국조서품(國朝書品)」은 서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 최고의 신품(神品)으로 단 한 사람인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를 들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여러 『완백전(完白傳)』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완백산인전』이며 완백이 죽은지 한해 뒤 1806년의 것으로서 아쉬운 정에 찬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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