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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5호 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포덕 153년 4월 9일(월요일) | |
시일소식 |
포덕 153년 |
4월 둘째주 월요시일 | |
발행처:천도교 동천교구 발행인:박인준 편집인:김학봉 주소:부산시 남구 대연5동 1564번지 전 화:(051) 628~1302~6 Fax:624-0519 카 페:http://cafe.daum.net/dongcheon21 |
집례 : 학암 김학봉 교화부장
- 청 수 봉 전
- 개 식 심 고
- 주 문 삼 회 병 송
- 경 전 봉 독 --- 해월신사법설 [수도]외(경전 382~390쪽) ----- 이진용 학생동덕(2)
- 천 덕 송 합 창 ------------------------ 제7장 권학가(기1)(천덕송 18쪽, 1~2절)
- 설 교 ------------ 수운대신사의 탄생과 순도 ------------- 준암 박인준 교구장
- 천 덕 송 합 창 -------------------------- 송가, 일편단심가(천덕송 67쪽, 1~2절)
- 폐 식 심 고
* 음악준비 : 이정무 학생동덕(3)
[인식과 존재의 변증](최민자,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12)
■ 책소개 이 책은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유들을 망라하여 인류의 정신사와 문명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면서 그 진수를 갈파하고,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통섭하고 고양하여 지구생명공동체의 새로운 지평, 신문명을 전망하고 있다. 이로써 현재의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정치적 격변 그리고 환경재앙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지구적 위기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지구 문명이 도달한 총체적인 위기의 한 단면일 뿐임을 전제로 하면서, 이를 근원적으로 대체하기 위한, 전일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인식론과 존재론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이 책 제2부 동양사상 중에는 양반 지배층을 대체할 새로운 보국의 주체로서의 근대적 미중의 대두를 촉발시키고 근대 민족국가 형성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시대적 선각자요 위대한 민족 지도자로서의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와 해월 최시형의 ‘천지이기’, ‘천지부모’ 사상을 다루고 있으며, 동학사상의 세계사상사 속에서의 위상과 현시대 갖고 있는 의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
수운대신사의 탄생과 순도
준암 박인준 교구장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지난 4월 5일은 우리 천도교의 제1세 교조이신 수운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도를 받아 천하에 펼치신지 153주년이 되는 천일기념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대신사님의 탄생에서 순도까지의 일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학들이 대신사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실천하는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대신사의 이름은 재우요, 자는 성묵, 호는 수운재였습니다. 신라 말기의 석학 최고운 선생의 27대손이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7대손이셨습니다. 부친 근암공 최옥은 문장과 도덕이 높아 영남 사림의 사표였으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였습니다.
대신사께서는 포덕 전 36년(갑신. 1824) 10월 28일 경주 가정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태어날 때는 하늘이 아주 청명한 가운데, 해와 달이 밝은 빛을 발하였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집 주위에 둘러졌고, 구미산 봉우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사흘을 울었다고 합니다.
대신사 나이 겨우 4~5세에 용모가 남다르게 뛰어났으며, 총명하기가 사광과 같아서, 아버지 산림공이 항시 사랑하여 애지중지하였다고 합니다. 6세 때 한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8세 때 입학하여 학업이 대진하고 백가시서를 다 배우셨다고 합니다. 13세 때는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울산 박씨 가문에서 부인을 맞이하였습니다.
16세 되던 해 2월 20일에 아버지 근암공이 79세로 환원하시니 양친을 모두 잃은 외로운 몸이 되고 맙니다. 어려서 혼자가 된 대신사는 자신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하여 깊은 명상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세상사에 대한 회의 속에 빠져들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조국 조선의 정황과 도탄에 빠진 창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세구민의 뜻을 키우게 됩니다. ‘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부자…’라고 간파하시고 낡은 도덕과 타락된 윤리를 개탄하시면서, 스스로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건지리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신사는 기성 종교들을 체험하고 연구하고 발섭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불․선 등의 종교로서는 제세안민의 과업을 달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진리를 창출하실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20세 때에 화재로 가재가 다 타버렸으므로 가정을 유지해 나갈 생업조차 막연한 형편에 놓이게 되자, 가솔을 울산 처가에 의탁한 후 구도행각의 고행길에 나서, 명산 대첩을 역방하고 인심풍속을 살피고, 궁술과 승마를 하고, 장사를 하고, 음양복술의 글까지 연구해 봅니다. 그러나 필경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합니다. 대신사께서는 계속해서 시운시변 등 사회현상을 살피기에 전념하면서 편답강산의 나날을 보냅니다. 동쪽으로는 금강산, 서쪽으로는 구월산, 남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묘향산 등 조선의 산천을 10여년 간에 걸쳐 유리방항하면서 심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대신사 나이 31세 되던 해(1854)에 이르러서는 행려의 길을 끝내고 정착하여 수련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울산 처가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함께 나날을 보내지만 거처가 지나치게 협소한지라 유곡동에 삼간초옥을 짓고 논밭을 마련하여 침사명상의 수련을 하시면서 우주자연의 무왕불복하는 이치와 인간사회의 영고성쇠하는 상도를 깊이 연구하는 데 정성을 다하십니다.
그러던 중, 포덕 전 5년(을묘, 1855) 3월 3일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선사가 책 한 권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대신사께서는 마음이 항상 신이하여 그 선사가 신인임을 알고, 그 신인이 주고 간 책을 깊이 찾고 투리해 본 즉, 글에 49일을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병진년(1856) 중하지절이 되어, 삼가 폐백을 받들고 한 사람의 중과 함께 양산 통도 천성산에 들어가 3층 단을 짓고 49일을 계획하여 축원하는데, 마음속에 항시 생각하는 것은 한울님 강령과 더불어 다만 명교 내리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축원한지 47일에 이르러 지극히 정성을 드리던 중 문득 숙부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신통으로 알게 되어, 산을 내려 와 보니 정말 숙부께서 환원하셨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윈 대신사라 숙부를 잃은 슬픔은 컸습니다. 기복 상을 마치고 생각하니, 헤아릴 다른 방책이 없고, 집에 남아 있는 재산이라고는 다만 논 여섯 두락뿐이었습니다. 가세를 어찌할 수가 없어 논 여섯 두락을 팔아서 다시 천성산에 들어가 기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인목을 피하기 위하여 동구 밖에는 철점을 세우고 시오리 안 적멸굴에 기도소를 설치하여 기도를 시작한지 49일만에 성공적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이것이 이후 49일 기도의 정형이 됩니다. 때는 정사년(1858) 가을이었습니다.
포덕 전 1년(기미. 1859)에 이르러 거처할 곳을 정하지 못하여 마음만 답답하던 차,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고향 용담에 돌아가 용담정에 칩거하면서 의관을 벗어던지고 불출산외의 중한 맹세를 하게 됩니다. 동시에 처음 이름 제선을 제우로 고치고 자 도언을 성묵으로 고쳤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건지겠다는 제세주로서의 자신감을 나타낸 것입니다.
포덕 원년(경신. 1860) 4월 5일. 대신사 나이 37세 때였습니다. 그 날은 조카 세조의 생일이었는데, 대신사를 청하는 지라, 세조의 집에 이르자 갑자기 심신이 이상하므로 곧 용담정으로 돌아오시니, 이미 11시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뜩해지고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어본즉,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고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매 대답이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이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것은 포덕문 6절의 내용으로 천사문답의 장면입니다.
천사문답 이후 대신사는 포덕 2년(신유, 1861) 봄에「포덕문을」지으시고 포덕을 시작하자 세상의 어진 사람들이 풍운같이 모여들었습니다. 대신사께서는 그 도를 이름하여 ‘천도’라 하고 또 이름을 ‘동학’이라고 하니, 이는 무왕불복의 이치요, 또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무위이화인 것입니다.
대신사는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스물한 자 주문을 가르치고, 시문을 가르치고, 친히 목검을 들고 검무를 추며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청수봉전을 가르치고 독서와 작문, 서예와 예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이 왕희지와 같은 글씨를 쓰고, 시를 읊으면 두공과 같은 명작이 나오는 초부도 있었습니다. 우둔하던 사람이 갑자기 총명해지는 수도 있었으며, 용모가 환태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래된 병이 스스로 낫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유포덕 이후 이렇게 도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세상의 시비가 높아가고 관리의 지목도 날로 심하여 갔습니다. 포덕 2년(1861) 11월, 대신사께서 지목을 피하여 수많은 제자들과 이별하고 오직 동자 최중희만을 데리고 비밀히 용담을 떠나게 됩니다. 방방곡곡의 인심풍속을 살피면서 12월 말경 남원시 서쪽 10리 밖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에 들어가 한 암자를 빌어 은적암이라 하고 수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고향에 있는 제자들은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도수사」와「논학문」․「권학가」․「검가」를 지으시고 달 밝은 밤에는 목검을 들고 검무를 추셨습니다. 대신사는 또「교훈가」․「몽중노소문답가」등을 지으셨습니다.
신유년이 가고 임술년(포덕 3년, 1862) 새해에는「수덕문」을 지으셨습니다. 봄이 오자 대신사께서는 경주로 돌아오셔서 박대여의 집에 은거합니다. 이곳에서 생각지도 않던 최경상이 문득 찾아와 그를 만나게 됩니다. 11월에는 최경상의 요청으로 처소를 흥해 매곡에 있는 손봉조의 집으로 옮겨 자리를 잡으니 각처의 도인들이 와서 절하며 뵙기에 분분하였습니다.
임술년 세모에 이르러 친히 각처의 접주를 정하니 이로부터 접주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포덕 4년(1863)7월에는 대신사께서 최경상에게 해월당이라는 도호를 주면서 북접주인으로 정하셨습니다. 12월 초열흘 밤 대신사께서는 홀로 협방에 침소를 정하시고 등불을 높이 밝히고 앉았는데, 선전관 정운구가 나졸들을 이끌고 들이닥쳤습니다. 전일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제자들이 피신하기를 강력하게 청하였지만, 대신사께서는 “도는 곧 나에게서 연유하여 나온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내가 당해야지, 어찌 제군들에게 해를 미치게 하겠는가” 하며 그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명이라 하니 어찌 하겠습니까. 순순히 명을 받아 체포되니, 그 때의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운구 일행은 용담에서 수련하던 도제 23명도 체포하여 함께 포박하여 송치하고, 대신사를 서울로 압송하는데, 영천, 대구, 선산, 상주를 거쳐, 화령, 보령, 청산, 청주를 거처 길 떠난 수 삭 만에 과천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철종이 승하하자 죄인을 해당 영으로 보내어 문초하라는 전교가 내려져 대신사는 다시 조령으로 길을 잡고 문경 초곡을 지나게 됩니다. 이때 수백, 수천의 도인들이 대신사를 탈환하고자 길을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대신사께서 친히 바위위에 올라 문도들에게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암상설법입니다. “그대들은 폭력으로써 나를 탈환코자 하느냐! 이는 이포역포가 아니냐! 천도가 폭력으로써 만물을 생장케 하더냐! 더욱이 너희들은 나의 육신을 구하고자 하느냐? 육신은 짧고 성령은 긴 것이니, 너희들이 진실로 나를 구하고자 하면 성령장생과 도덕을 믿으라.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장생한다는 것을 몇 번이고 말하지 않더냐. 이는 한울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니 거짓이 없다. 나는 천명을 믿고 천명대로 좇을 뿐이다. 내가 이 길을 걷는 것도 역시 천명이니 너희들도 천명을 믿거든 안심하고 돌아가 수도에 힘쓰라.”
이때 문도 중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천명은 거룩하오나 어찌하여 스승님을 이처럼 곤액에 빠지게 합니까? 천명도 믿기 어렵습니다.” 하니 대신사께서 얼굴에 미소를 지으시면서 조용히, 그리고 엄숙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사지사견에서 나온 생각이니라, 대저 살아도 악한 인생이 있고 죽어도 착한 죽음이 있으니, 내 죽음으로써 너희들을 살리고 대도를 살리고, 중생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 나는 오히려 그러한 죽음이 있기를 바라노라. 천명은 사생을 초월한 것이니 무엇을 걱정하리오. 내 항상 말하기를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결코 죽지 않으니 너희는 이 죽지 않는 이치의 진실을 깨달으라. 그리고 이 말을 널리 세상에 전하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일제히 사퇴의 인사를 하고 눈물로써 대신사를 하직하였습니다. 다시 대구로 압송된 대신사는 포덕 5년(갑자. 1864) 1월 6일 대구감영에 이르러 옥에 갇히셨습니다. 공판날이 되어 감사 서헌순이 “네 이단의 도로써 무리를 모아 민심을 혼란케 하니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하는 지라, 대신사께서 득도할 때의 일을 설명한 후 정색하고 말씀하시기를 “내 천도로써 사람을 가르쳐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기울어지는 나라를 돕고자 하노라. 이 도가 세상에 나온 것은 천명으로 나온 것이요 나의 사의가 아니며, 나의 교화는 천명에서 나온 것이요 인위로써 조작한 것이 아니며, 내 또한 일신으로 도에 순하여 덕을 후세 만대에 전코자 함도 역시 천명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서헌순이 다시 묻기를 “네 도로써 사람을 가르친다 하면서 목검을 만들어 사용하고 또 제자에게 가르쳤으니 그것은 무슨 뜻으로 한 것이냐?” 대신사 대답하기를 “도를 닦는 것은 천심을 지키고 정기를 양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 사람의 정기를 양하기 위하여 목검을 만들어 검무를 추게 한 것이요. 다른 뜻이 없노라.” 이 말을 들은 서헌순은 크게 꾸짖으며 “검은 무인의 행사요 또 흉기이거늘 이 태평성세에 일개 백성으로 검가와 검술을 사람에게 가르쳤으니. 네 말로 천도를 세상에 편다는 것은 세상을 속임이요. 그 실인즉 도당을 모아 반역을 도모하는 뜻이 명백한 것을 조정에서부터 이미 알았으니 속히 자백하여 양심을 속이지 말라.”하고 혹독한 고문을 하였으나, 대신사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해월신사께서 대신사가 대구감영에 환수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옥리를 회유하여 옥중의 대신사를 만나 뵙게 됩니다. 3월 3일 술시 경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제지간의 최후의 만남이었습니다.
대신사께서는 신사를 보시고 아무 말씀이 없다가 담뱃대 한 개를 주며 급히 돌아가라는 뜻을 표합니다. 신사께서 옥에서 나와 담뱃대를 쪼개어 보니, 그 속에 심지가 있고 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혐극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 나는 천명을 순히 받을 터이니 너는 높이 날아 멀리 가거라)
대신사께서는 드디어 포덕 5년(갑자. 1864) 2월 29일 조정으로부터 좌도 난정률로 다스리라는 국명에 의하여 3월 10일 대구 장대 관덕정 앞에서 참형을 받게 됩니다. 이 때 망나니가 여러 번 칼을 내리쳤지만 목에 흔적조차 나지 않으므로, 감사 이하 모두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였습니다. 이 때 대신사께서 천연한 언사로 형졸에게 일러 청수 일기를 모셔오게 하고, 청수 앞에서 마지막 심고를 드린 후 형졸에게 일러 이제 안심하고 베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 조용히 형에 이르러 도에 순하였습니다. 이때 청명하던 일기가 갑자기 변하여 광풍이 일어 폭우가 내렸습니다. 하늘과 땅마저도 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하였습니다. 대신사의 나이 41세였습니다.
대신사 가신지 46년, 지금 우리는 그 때 대신사의 바람만큼 천도의 세상을 이룩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4월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대신사님의 일생을 더듬어보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참다운 천도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 제153주년 천일기념일 특성금 내역(4/5) : 운암 이내운, 선수당 박경희(30,000원),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30,000원) * 총특성금 : 60,000(원). 특성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흥신포 구암 하경구 직접도훈님 환원(4/5) : 지난 4월 5일(목) 저녁 늦은 시간에 구암 하경구 천도교 흥신포 직접도훈님께서 지병으로 환원하셨습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이었고, 영결식은 4월 7일(토) 저녁 9시에 천도교중앙총부 주관으로 봉행하였습니다. 다음날인 4월 8일(일) 오전 5시에 발인한 뒤 화장하여 유해는 경남 창녕 선영에 안치하고, 다수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4시 우리교구 김학봉 교화부장의 집례로 하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구암장님은 동천고등학교 교장과 천도교 동천교구 교구장, 천도교 중앙총부 종무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삼가 구암장님의 성령출세를 심고합니다.
☞ (주) 신인간사 주관 ‘제5회 한울문예상’ 공모 안내(4/18) : 천도교 기관지인 (주) 신인간사가 천도교어린이들의 문예적 정서 함양을 기하고 ‘개벽사’의 『어린이』 잡지의 정신을 창의적으로 계승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으로 한울문예상을 공모합니다. ① 공모내용 : 수필, 시. 수필은 주제의 제한이 없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 8매 내외, 부문은 일기, 생활글, 독서논술(독후감)입니다. 시는 주제와 분량 모두 제한이 없습니다. ② 공모대상 : 초등학생(천도교인 자녀 및 천도교인의 소개서를 첨부한 일반 어린이) ③ 원고 모집기간 : 2012년 4월 18일(수)까지이고, 원고를 <종학실>로 제출하시면 일괄 수합하여 (주)신인간사로 우편 접수할 계획입니다. 발표는 신인간 5월호를 통해 발표하며 입상자는 개별 통지를 합니다. ④ 시상내역 : 대상(천도교교령 시상), 최우수상(천도교 연원회의장 시상), 우수상(천도교종무원장 시상), 장려상(신인간사 사장 시상), 참가상(기념품) ⑤ 기타 : 응모 시, 응모자의 사진, 소속 교구(동천), 주소, 연락처를 함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수상 작품과 투고된 작품 중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한울어린이』지에 수록합니다. 우리교구 동덕 선생님 자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 집례 : 열암 김상열 경리부장
* 경전봉독 : 김재한 학생동덕(2)(해월신사법설 '오도지운', 경전 391~396쪽)
* 천덕송 합창
(1) 제8장 권학가(기2)(천덕송 20쪽, 1~2절)
(2) 송가, 낙도가(천덕송 68쪽, 1~2절)
* 설교 :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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