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요약 :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법률을 제정하고 중요사항을 의결
하기 위하여 회의를 여는 곳으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다.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모여 회의를 여는 장소로, 1975년 준공되었다. 부지면적은 서울 여의도 전체 면적의 약 1/8인 330,579m²(약 10만 평)이다. 건물은 지하 1층·지상 7층 규모로, 연면적 81,443m²에 이른다. 길이 122m, 폭 81m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단일 의사당 건물로는 동양 최대라 알려져 있다. 주변으로는 의원회관, 국회도서관, 국회의정관, 국회소통관, 헌정기념관(방문자센터), 국회한옥(사랑재) 등의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여의도동 1)이다.
외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높이 32.5m의 거대한 기둥 24개와 지붕의 푸른 돔(dome)이다. 경회루의 석주를 닮은 화강석 팔각기둥 24개는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뜻하며, 24개 중 앞면의 기둥 8개는 전국 8도를 상징한다. 이 기둥들은 구조적으로 건물의 하중을 전혀 받지 않는 장식용이다. 지붕의 돔은 밑지름 64m, 무게 1000t 규모이다. 토론을 거쳐 국민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의회민주정치의 본질을 상징한다. 재질은 구리로, 처음에는 붉은색이었다가 세월이 지나 녹이 슬면서 현재의 회녹색으로 변하였다. 건축가들은 본래 한옥 처마 모양의 중층 캐노피가 있는 평지붕으로 설계하였고 돔을 반대하였지만, 권위와 위엄이 드러나도록 돔을 세워달라는 국회의원들의 요구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내부는 회의장, 각종 회의실, 의장실, 부의장실, 중앙홀, 기타 의원활동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의장은 양원제 구성을 대비하여 두 개가 마련되었다. 하나는 300석 규모(이동식 의석으로 400석까지 확장 가능)의 민의원 회의장으로 현재 본회의장으로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100석 규모의 참의원 회의장으로 현재 예산결산특별심의회 회의장으로 사용된다. 두 회의장은 크기는 다르지만 동일한 구조로, 의장석을 중심으로 의석들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로텐더 홀(law tender hall)이라고도 불리는 3층의 중앙홀은 본회의장 앞 로비이다. 중앙홀 바로 위로는 돔 지붕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없이 뻥 뚫려 있다. 4층부터는 아래쪽의 중앙홀을 둘러싸고 '口'자형으로 회의실 등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현재의 국회의사당이 건립되기까지 국회는 여러 임시거처를 옮겨 다녔다. 1948년 개원한 제헌국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1995년 철거)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대전 충남도청, 대구 문화극장, 서울 구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 부산 문화극장과 부산극장, 부산 경남도청 내 무덕전이 임시 국회의사당 역할을 하였다. 휴전 직후 잠시 중앙청을 사용하다가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다시 현 서울시의회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양원제로 구성된 제5대 국회(1960.7~1961.5) 때에는 대한공론사와 해군본부가 민의원 의사당으로 사용된 바 있다.
건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66년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를 발족한 뒤 1967년 말 남산을 비롯한 10여 곳의 후보지 중 여의도를 최종 건립지로 결정하였다. 1969년 제헌절에 기공식을 열며 공사를 시작하였고, 1973년 상량식을 올렸다. 1975년 8월 15일 준공하였으며, 9월 1일 준공식을 열었다. 국회의사당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해 9월 22일 정기국회부터이다. 대형 국책사업이었던 국회의사당 건립에 투여된 총공사비는 135억 원으로, 이는 1975년 정부 예산의 약 1%에 해당하였다.
설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건립위원회는 김중업, 김수근 등 6인의 유명건축가를 지명하여 설계공모를 한 뒤 일반공모도 이중으로 실시하는가 하면 짧은 응모기간과 미미한 설계비, 설계 저작권 및 본설계 실사권 불인정 등의 조건을 달아 건축계의 반발을 샀다. 김수근 등 3인과 건축가협회 회원 100여 명은 참여와 응모를 거부하였고, 결국 김중업 등 남은 3인의 지명 건축가와 일반공모 우수작 건축가 안영배가 공동으로 설계안을 제시하였다. 설계안 또한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권력자들의 요구에 따라 계속 변경되었다. 당시 시공은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이 맡았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04-24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