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서,
저주 받을까 또는 심판받을까 두려워 그 분 앞에 벌서듯 쩔쩔 매지 않습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 엄청나고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할 말을 잃고 그 사랑 앞에 늘 빚진 자로서 평생 갚아도
빚진 자되어 주님 가신 길 택하였건만 눈물만 솟구치네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들처럼 주님 앞에서 ‘주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께서
왜 눈을 감으십니까, 왜 주무십니까, 왜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는데 잠잠하십니까,
언제까지 홀로 갈등하며 주님을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주님 내게 임하시옵소서,
주님이 떠나시면 나의 생명 헛됩니다. 저 혼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아와 같은 지난날이 너무 싫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고 혼자 내 맘대로
살던 어두운 지난날이 너무 슬프고 아프오니 나를 홀로 두지 마시옵소서’
이런 징징거림의 기도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시편 전부는 시편1장이
기본이 된 하늘적 차원의 의인들의 노래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회개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세례를 통해 죄 사함과 성령을 받아서 다윗처럼
주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의 실력을 갖추어야 되는 겁니다.
신앙은 나 홀로 자주 독립 만세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돈을, 건강을,
명예나 권세나 직위나 세상의 것을 주시면 내가 하나님께 보답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지요. 신앙은 말 그대로 항상 하나님만 믿고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사모하고 기다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인 것입니다.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이지만 신앙은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공로와 성령을 보내심을 알고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고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요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만일 그 속에 그리스도가 안 계시면 그야말로 빈 양철동이처럼 헛방이지요.
어차피 우리는 한 많은 인생이며 어차피 무엇인가 결핍된 인생입니다.
건강의 결핍이든지 아니면 돈의 결핍이든지 사랑의 결핍이든지 지식의
결핍이든지 뭔가 빠져 있습니다. 애플 창립자 스티브 잡스가 죽을 때에 자신은
사업에는 성공을 했지만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아서 그게 가치인지 관계인지
문화인지 몰라서 답답했다고 하잖아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우주의
원리를 알아냈지만 우주를 움직이는 그 동력이 뭔지를 결국 알아내지 못하여
씁쓸한 최후를 맞이한 겁니다. 둘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거죠. 불행입니다.
주께서 너희가 구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결핍을 아십니다. 그건 모든 인간의 영혼에 필요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게 빠지면 울리는 꽹과리와 소리 나는 구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복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자격입니다.
다윗이란 사람의 특징은 이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께 달려갑니다.
다윗은 급하고 어려우면 항상 제사장을 찾아가고,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자빠져도 제사장을 찾아가고, 넘어져도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 얻어먹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날 마지막
오늘 날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하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가 주를 기다리나이다’ 이렇게 간구하는 복이 있어야죠.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직접 목적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라는
간접목적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바로 찾는 직접목적의 인격적인 기다림이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문장의 형식으로 ~~에게는 간접목적이고
~~을, 를은 직접목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편은 다 하나님이 직접목적입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 주신 주 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받혀서 주님 경배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믿음에 구원의 능력이 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빛과 어두움의 분기점이며 생명과 사망의 분기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80을 살다 가든지 100을 살다 가든지 내가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할까 이런 말 하지 마시고 내가 받은 큰 사랑과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고 주님께 갈까 이런 마음으로 사신다면 행복한 사역을 하게 될 겁니다.
이 자본주의가 이 넝마와 같은 인간들에게 얄팍한 자존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주의 종들이 욥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거지가 얻어먹으려면 자존심을
내던져버리고 큰 깡통을 차고 다녀야 됩니다. 그러나 돈 있는 자들을 대우하다
보니 그만 교회가 생명을 얻는 일보다 사업을 위해 돈을 내어 이름을 내고 존재감이
높아지는 기독교 장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는 사고팔고가 그 원칙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유대성전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달음박질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아보겠다. 내가 주님의 복을 받아보겠다’하는 결단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질 좋은 풍선이 크게 부풀어 지듯 하나님 앞에 내 미는 깡통
곧 믿음의 그릇이 커야 됩니다. 이게 바로 다윗과 같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은혜를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은사도 다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겁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고 있는 자(현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되어 가는, 현재진행)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되어가는 권세 자격지심 곧 authority를 주셨으니(요1:1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난 다 받았다. 기껏 소나무 뿌리 뽑다가 화끈하게 불같이 뜨거운 체험을
했다거나 빈 야드나 관상의 기도 같은 곳에서 한번 자빠졌다든가 희한한
광경을 봤거나 꿈으로 천국 지옥을 본다든가 하면 난 다 봤다 은혜를 다 받았다’
그때부터 자기는 간증하고 전도하고 남에게 가르치는 선생노릇하고 교회에서
어른 행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의 일의 전부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가 천국지옥을 보고는 전국방방곡곡 간증하려
다닙니다. 겨우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대하는 신호인데 그게 자랑인 줄 알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고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이 되어 진리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서
받은 그 복이 우리 속에 더 커질 수 있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주님 앞에 항상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의 죽음을 자동으로 지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십니다(고후4:10) 간절히 사모해야죠.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이 그의 자랑이랍니다(고전15:31) 우리도 그래야죠.
바울은 그랬단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가 아니라 어느덧 자신이 주와 함께 멍에를
매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게 신앙의 기본임을 알고 밤낮지고 사는 게 바로 복입니다.
첫댓글 하나님만이 직접 목적인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어 하늘 향한 직선주루를
달려가도록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보이신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