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유정
“삶이 하루살이 같건만 어찌 세월을 허송하나” (사명대사 오도송 中)
사명대사 유정은 전란 때도 늘 백성의 안위를 먼저 챙기며
구국의 길을 걸어온 진정한 수행자였다.
사진은 서울 동국대 앞 장충공원에 있는 ‘사명대사 성상(聖像).
“부처도 내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 밖으로만 내달리는가!”
자력ㆍ타력 수행 모두 허용
“禪詩, 뜻이 맑고 격조 높아 唐 아홉 승려와 비교할 만”
임란 당시 수많은 공훈에도 영의정 사양…
수행자로 살며 늘 명예보다 백성위한 ‘호국’
중국 당대(唐代)에 ‘행도승(行道僧)· 행승(行僧)’이 있었다.
‘걸어가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혜교의 <고승전>과 도선의 <속고승전>에서는
산야를 두루 돌아다니며 중생을 제도하는 승려들을 ‘행도’라고 표현했다.
한편 문맹인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들려주는 속강승(俗講僧)도 있었다.
일명 대중강사인데, 이들은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비구들도 길 위의 삶, 유행(遊行)의 연속이었다.
천하를 다니면서 밥을 빌어먹고, 법을 설해주며,
잠은 나무 밑에서 자는 것이 비구의 삶이었다.
승려 본연의 행(실천)이란 무엇일까?
중국의 행도승이나 남방 비구의 유행은 자신만의 해탈이 아닌
중생과 더불어 중생을 보듬는 이타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에서 비롯돼 어록에는
화광동진(和光同塵)· 회두토면(灰頭土面)· 말토도회(抹土塗灰)·
대수타니(帶水拖泥)· 입니입수(入泥入水) 등 단어가 등장한다.
곧 중생이 살고 있는 진흙 밭에 들어가고 재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승려본연의 삶
<대승기신론>의 마명 보살은 논을 저술하게 된 인연을
“중생들이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속의 명예나 이익, 존경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爲令衆生 離一切苦 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라고 했다.
<돈오입도요문론>에도 똑같은 내용이 있다.
간혹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라 잃은 시대,
혹은 전란의 시대에 승려였다면
나는 전쟁터에 나가 목탁대신 총칼을 들었을까?
필자는“No”라고 할 것 같다.
올해 2019년은 3ㆍ1운동의 100주년으로 불교계에서도
한용운· 백용성 스님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행사가 많았다.
전란의 의승(義僧)들은 자신과 국적이 동일한 중생이 화살과 칼을 맞아
고통 받으니, 상대 중생에게 칼을 들어야 했다.
한국사에서는 불교를 ‘호국불교’라는 타이틀을 주지만, 왠지 씁쓸할 때가 있다.
‘호국(護國)’이라는 말속에는 불교 본연의 정신이 조금 결여된 점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어떻든 조국이 있어야 종교도 존재하는 법, 의승들을 보자.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미 한 마리 남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들은 모든 생명을 도륙하는 매우 잔인한 민족이었다.
고려시대,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이 있었다.
살리타이가 이끌던 몽골군은 기병 500여 기로 처인성 일대를 공격하려 했다.
이때 김윤후 스님이 화살로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쏴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몽골군은 기가 죽어 줄행랑을 쳤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승은
사명 유정과 기허 영규(騎虛 靈圭, ?~1592)대사다.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은 자가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증조부가 문과에 급제해 장락원정(掌樂院正)을 거쳐 대구의 수령으로 재직하다 밀양에 살았다.
7세 전후 <사략>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맹자> 등 유학을 공부했다.
15세 전후 부모를 모두 여의고, 김천 직지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됐다.
마침 승과제도가 부활되자, 18세에 승과에 합격했다.
사명의 행적에서 20대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아마 출가자 신분이지만
유생들과 교류가 잦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후 사명은 직지사 주지를 역임한 뒤
1575년 31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으나 사양한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서산 휴정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휴정 문하에서 3년간 수행했고, 휴정의 <선가귀감>에 발문을 썼다.
이후 팔공산ㆍ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지를 행각하며 수행하다
43세에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사명이 읊은 오도송을 보자.
“어제 핀 꽃, 오늘은 빈 가지뿐 인생도 이와 같은 법.
삶 역시 하루살이 같건만 세월을 어찌 허송할 건가. …
부처도 내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 밖으로만 내달리는가!”
1589년 46세 때 사명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유생들이 항변해주어 석방됐다. 47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머물러 있는데,
2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입적할 때까지 사명은 구국의 길에 앞장섰다.
해인사 홍제암에서 세수 66세에 법을 설한 뒤 결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탑비.
호국정신과 역사상 위치
1592년 임진란이 발생하자, 사명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했다.
이어 1593년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는데,
네 차례 회담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여러 조항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들어 논리적인 담판으로 왜장을 물리쳤다.
사명은 이렇게 회담하는 와중에 선조에게 백성을 편안토록 해야 하며,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군수 무기를 준비할 것 등을 건의했다.
이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여덟 가지를 제안하는 상소도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승려들에 대한 침해가 너무 심해 고통 받고 있으니,
국가적인 배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선조는 철썩 같이 약속했지만,
막상 임란이 끝나고 유생들의 반발로 승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물거품이 됐다. 1594년 사명이 의령에 주둔했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했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벼슬을 내렸다.
사명은 1604년 서산 휴정이 입적했을 무렵에도
선조의 부탁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사명은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선조는 왜란이 종결된 뒤 몇 고승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 가운데 유정을 도성 가까이 두고자 요청해 사명은 잠시 도성에 머물렀다.
영의정 벼슬을 받았지만 유정은 곧바로 물리치고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유정의 선사상적 면모
유정은 스승 휴정과 같이 수행 방편으로 자력과 타력을 모두 제시했다.
첫째, “자력(自力)은 일념회기(一念回機)로서 본각(本覺)과 동일해지는 것이요,
타력(他力)은 자부(慈父)에 귀의하여 십념(十念)의 공(功)을 이루는 것이다.”
즉 어리석은 사람도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一念回機) 단박에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됨으로서
범부와 성인의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설파하고 있다.
다만 근기가 각각이므로 개인에 따라 아미타불에게 정성껏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타력문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어 고인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자비사상에서 염불정토를 강조한 점이라고 사료된다.
둘째, 그의 선사상적 면모(禪詩)를 보자. <사명집>에는 교학으로
<화엄경>과 <법화경> 발문만이 전하고, 대부분이 선시이다.
사명집의 서문을 쓴 허균(1569~1618)은 사명의 선시에 대해
“또 그의 시를 보았다. 뜻이 맑고도 격조가 높다. 내 중형도 몹시 칭찬하면서
그는 족히 당나라의 아홉 승려와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사명의 선시 하나를 보자.
“낭떠러지 깎아지른 절벽에 발붙일 곳 없어도 목숨 버리고
내 몸 잊고 의심하지 말고 나가야 하리.
다시 칼날 향해서 몸을 한번 뒤쳐야만 비로소 공겁 이전의 일을
알 수 있으리라.” <사명당대사집>
한 재가자가 도를 물었을 때, 사명이 그에게 화답한 시로
화두참구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시구는 일본 적장과 만난 뒤에
쓴 선시이다.
“만나고 헤어짐은 모두 과거세의 인연
누가 이 자리에 함께할 줄 알았으리.
시원한 정자에서 달여 주는 차 마시노니
푸른 풀잎 연기 꽃이 눈앞에 가득하네.” <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의 의승군 활동은 승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물론,
법맥의 흐름까지 변화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초기 법맥의 주류는
나옹 혜근-무학 자초-함허 득통 법맥이었다.
이후 조선 중기와 후기로 들어가면서
태고 보우, 즉 서산 휴정과 사명 유정의 법맥이 주류 중심을 이어간다.
그 원인은 사명·기허 영규·의엄 등 여러 의승군 가운데
사명대사의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의승군들의 사회적인 인식이 높아지면서,
나옹 혜근에서 태고 보우 법맥 (환암 혼수-구곡 각운-벽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
청허 휴정-사명· 편양 언기)으로 전환됐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 법맥은 근자에 이르기까지 따르고 있다.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2019년 3월 16일
불교신문
출처 : 봉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