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라성
김부식과 일연 같은 역사를 다르게 쓰다(1) - 일연의 삼국유사
우리 민족의 현전하며 공인된 역사서는 두 가지가 정한다. 아마도 한국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역사책 바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그것이다. 삼국유사는 다소 황당무계한 환타지가 담겨 있어 역사서라기 보다는 성경처럼 불교적 이적같은 것을 주로 담은 일연의 역사서술이란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고려시대 그 이전의 역사서들을 참고하여 오랜동안 많은 역사서를 연구 참고하고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고려왕실의 삼국역사 기록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김부식과 일연스님 초상
이번 기획은 2회에 걸쳐 같은 고려 시대에 저술된 두 역사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특징을 간단히 비교하는 기행으로 주요 기행지는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이다. 일연이 삼국사기를 저술했다고 추정되는 인각사지 (현 인각사) 일연의 삼국유사의 저작 배경과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금은 가볼 수 없지만 개경에서 진행되었을 김부식의 삼국유사 편찬 작업과 김부식의 엇갈린 역사적 평가에 대해 재조명해 보고 김부식과 일연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는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를 함께 이해해 보는 기행이다.
경북 군위의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수행하며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군위는 관광객 유치와 귀농인을 통한 지역 발전을 꾀하며 자체의 관광자원인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인각사는 거의 폐사되었던 것은 경종 때 약간 자리를 옮겨 중건해 현 위치 옆의 인각사지가 원래 인각사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인각사는 1991년 말 경북대학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基壇部)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는 전국 굴지의 명찰로 번성하여 국존(國尊:國師) 일연(一然)이 1284년(충렬왕 10)부터 임종할 때까지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이름은 옛날에 기린이 네모진 바위(촉석)에 뿔을 걸었다 해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심히 퇴락하여 거의 폐사가 되었으나, 1721년(경종 1) 화주승(化主僧) 성화(性和)와 시주 배흥일(裵興逸) 등의 힘으로 크게 중수되어 대웅전 ·극락전 ·승방 ·종루 등이 다시 갖추어졌다.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 원래 인각사가 있었던 인각사지이다.
일연스님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승려.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일연스님 부도와 불상
일연이 살아간 시대를 보면 그리 만만치 않은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강화에서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의 충이 붙은 임금의 시대였으니 온갖 굴욕과 수탈과 비정한 역사가 흘러가던 그런 시대를 맞이해 왕실과 귀족이 버린 어린 백성을 어떻게든지 이끌고 나아가야 했던 시대다. 팔만대장경은 다시 만들어졌지만 불타버린 황룡사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그런 암울한 시대에 일연은 무언가 다시금 일어설 희망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을 지난 역사인 삼국의 역사 서술로 자기 할 바를 정한 것인지도.
삼국유사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역사서로서의 가치에 준한다면야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훨씬 우위에 있다고 평할 수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사실적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그전에 있었던 많은 역사서들을 참고해 최대한 충실하게 역사와 인물들을 기록해 나갔기 때문에 일연의 삼국유사처럼 수많은 이적이라든지 허구와 과장 가필과 서술자의 평가 등이 포함되지 않아 훨씬 사실로서의 역사에 접근해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삼국유사의 가치는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삼국사기에 비해 그 역사서로서의 가치는 떨어지는 단점이 있더라도 삼국유사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은 충분히 있다. 무엇보다도 단군신화를 비롯해 삼국의 신화와 전설 설화 등을 충분히 복원 수록해 놓았다는 점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록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가치 이외에도 우리 민족 문화와 유서 깊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대해 당대부터 어떻게 인식 평가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는 점에서 결코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 뒤쳐지는 가치를 가진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군위의 인각사 주변에는 군위쪽에서 시행한 벽화 거리 등이 있다. 어느 집 벽에 그려진 일연스님과 매화나무는 군위가 분명 일연스님과 큰 인연이 있는 거리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인각사 경내에 만들어진 일연선사생애 기념관
원래는 콘테이너 박스건물로 지어져 있던 기념관이 새롭게 단장해서 개관해 있으며 인각사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사진과 일연선사의 생애를 전시해 놓았다. 물론 실물들이나 직접적인 일연선사의 유품 등을 만날 수는 없지만 말년에 삼국유사 집필해 몰입한 후 이 인각사에서 입적한 그의 잠깐의 짬을 내어 살펴보는 게 좋겠다.
일연스님 보각국사탑과 비
1965년 9월 1일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재료 화강석, 높이 약 2.42m이다.
자연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8각 하대석이 놓였고 상면은 급경사를 이루었으며 중앙에 얕은 8각 괴임이 표출되었고 이 괴임과 연접하여 작은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중석(中石)도 8각이며 각면에는 넓은 광곽(框廓)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동물상이 양각되었으나 명료하지는 않다. 상대석도 8각이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워졌고 밑에는 얕은 받침이 있으며, 주위에는 소대(素大)한 연판(蓮瓣) 8엽(葉)이 두 줄 음각되어 있다.
탑신도 8각이며 앞면의 1면에는 광곽 안에 “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고 쓴 자경(字徑) 6cm의 해서(楷書)로 된 제명(題銘)이 있고, 후면에는 문비형(門扉型)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상, 연좌 위의 보살입상이 양각되었다. 상륜부에는 보개 앙련(仰蓮)과 화염에 싸인 보구(寶球)로 된 1석이 놓였다.
인각사의 산령각(산신각)
인각사 보각국사비
탑비는 크게 손상되었고 1295년(충렬왕 2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파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석공들이 새겨넣은 보각국사 일연의 삶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보각국사비는 실물 석비는 사라졌지만 다행히 그 명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400년만에 복원될 수 있었다.
400년만에 제모습을 다시 찾은 보각국사비 일연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경북 군위군 인각사 보각국사비가 4백여 년 만에 복원됐다. 임진왜란 당시 심하게 훼손돼 그동안 내용조차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연구자들의 노력 끝에 완벽한 재현된 것이다.
국사라 하면 율사 선사 법사 등과 달리 국가가 인정하는 불교계 최고 지위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일연은 무량사 인흥사 등 수많은 몽골에 의해 파괴된 절, 남은 절 등을 떠돌며 꺼져가는 불교의 운명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전개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가 존경해 마지 않던 의상에 견줄만한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가 입적한 인각사에서 그의 자취를 느껴보자.
한번 폐사되었던 절이라 그 크기는 이름난 절처럼 웅장하지는 않다. 하지만 일연스님의 수도도량, 그리고 삼국유사의 저술처로서 인각사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절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곳 인각사에서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의의를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에 저술된 삼국의 역사서 중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가 쌍벽으로서 불분명한 우리 고대사를 그나마 추리해 나갈 수 있는 부정될 수 없는 실마리로서 그 의의를 갖는다.
《삼국유사》의 저술은 저자가 사관(史官)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이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冊名)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逸事遺聞的)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다.
또한 당시의 민속·고어휘(古語彙)·성씨록(姓氏錄)·지명 기원(地名起源)·사상·신앙 및 일화(逸話) 등을 대부분 금석(金石) 및 고적(古籍)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見聞)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한국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遺影)으로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敍事詩)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의의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思考) 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되었다고도 보여지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寶典)이라 일컬을 만하다.
義湘傳敎讚詩(의상전교찬시)-一然(일연)
의상전교찬시-一然(일연)
披榛跨海冒煙塵(피진과해모연진) : 개암나무 헤치고 바다 건너서 안개, 먼지 무릅쓰니
至相門開接瑞珍(지상문개접서진) : 지상사 문 열려 보배로운 부처님 진리 접했네
采采雜花我故國(채채잡화아고국) : 빛나는 온갖 꽃 내 나라에 심으니
終南太伯一般春(종남태백일반춘) : 종남산과, 태백산 모두가 화창한 봄이라네.
일연은 선시와 함께 찬시로 유명한데 의상대사와 같이 불교계의 선배가 되는 승려들의 찬시를 많이 지었으며 대표적으로 의상대사의 찬시가 일연선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밤중 달빛 보며 자리 잡고 있으니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아 날도다
거적자리에 가로누어도 단잠 들 것이니
티끌세상 꿈 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
- 젊은 시절 수도하는 승려로서 의지를 다짐하며 쓴 시
연오랑과 세오녀 혹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군위의 한 벽화
연오랑세오녀상 (경북포항 호미곶)
일연의 삼국유사는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 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설화 전설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되살려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물론 필원잡기에도 실렸지만 삼국유사에 이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기록되지 않았다면 박인량의 수이전 등에 소개되면서 전승되기에는 무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 조차 왕들의 정확한 대수를 정리하기 힘들었을 만큼 초기 신라왕실은 안정화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연은 `제8대 아달라왕 4년`이라며 자신있게 기록했다. 이는 운수납자 (雲水衲子)로 바람과 구름처럼 전국을 떠돈 승려였던 일연이 지금 포항 오천읍의 천년 고찰인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민속학자처럼 주민들로 부터 인근에 전해오는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듣고 취재했을 것이며 자신이 쓴 역작에서 첫 설화로 싣기에 이르렀다.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가 바다로 나가 해조류를 채취하다가 갑자기 바위가 그를 업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다”라며 왕으로 세웠다(일본 제기帝紀를 살펴 보면 그 전후로 신라 사람이 왕이 된 자가 없으므로 이것은 변방 읍의 소왕이지 진짜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찾으러 갔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았는데 역시 그 바위에 오르자 그 바위가 또한 그녀를 싣고서 전처럼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뢰며 왕에게 바쳐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으니 일관이 아뢰길 “해와 달의 정기가 내려와 우리나라에 있었으나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괴이한 일이 초래된 것입니다”하니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오도록 하였다. 연오가 말하길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짠 고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하면서 곧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고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해와 달이 그 전처럼 되니 그 비단을 어고에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 이름을 `귀비고`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장소 이름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3권 영일현조 김종직(金宗直)記`등을 인용한 `일월사적비`에 따르면 (포항의)일월지(日月池) 근처에 일월신을 모시는 천제당(또는 일월사당)이 있어 신라 때는 조정에서, 고려·조선 때는 영일현감이 친히 제사를 올리고 이 사당에 모신 신위를 일월신이라 부르고, 이 신위가 연오랑 세오녀 신위라고 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해병부대 내에 3천여평의 일월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9월 중양절에 일월 제의를 행했으나 강점기 때 제단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군위의 벽화
어린이들에게 삼국유사에 대해 알기 쉽게 적은 글
김부식이 버린 것을 일연은 살려 담다.
김부식은 왕의 명령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아 역사책을 만든 관료였다. 무엇보다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의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미 사라지고 없는 나라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당연히 패망해야만 했던 나라로 서술해야만 고려의 전통성과 고려왕조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으므로 철저하게 유학자로서의 시각으로 서술할 수밖에는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런 점에서 일연은 유학자도 아니었고 승려의 신분이었으며 왕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고려 이전의 역사서들을 차분한 시각으로 연구 집대성하면서 굳이 가리거나 숨겨야 할 것이 없는 역사서술이 가능했으며 특히 불교의 이적과 부처의 호국과 자비 등에 대해서는 조금더 가필과 과장된 묘사를 섞어 서술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뚜렷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는다. 우선 공통점으로 명백하게 같은 시대와 국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몇몇 기록의 신빙성은 무령왕릉의 발굴조사로 그 연대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차이점으로는 삼국사기는 기전체의 서술방식을 택한 반면 삼국유사는 편년체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기전체 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
기전체란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되어 중국·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사(正史) 서술의 기본 형식이다.
기사본말체는 사건별로 제목을 앞세우고 관계된 기사를 한데 모아 서술한다. 어떤 일의 원인과 발단, 전개과정, 후에 미친 영향까지 일관되게 서술하기 때문에 대상사건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록의 사실성의 차이도 그렇게 크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삼국유사는 천명공주가 선덕여왕보다 나이가 많은 장녀로 그리고 있으며 선화공주를 셋째 공주로 상정하여 서동요설화를 자세히 싣고 있지만 삼국사기는 천명공주를 둘째이며 선화공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는 것 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연 그는 무사히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일까? 그가 돌아오게 하는 건 경주 김윤근 선생님 말씀대로 황룡사 목탑을 복원해서 다시 세우는 일, 그렇게 또 한번의 통일을 위해 우리가 여유를 갖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황룡사 목탑을 다시 세우면 그는 우리와 더불어 한바탕 흥겹게 놀 수 있는 걸까? 티벳의 달라이처럼 환생을 할까?
충렬왕이 일연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시 한수
일연선사기면관 내부 전경
일연선사기념관 내부 전경
일연선사 기념관 내부 전경
일연선사기념관 내부 전경
인각사에서 발굴된 유물들
지금까지 삼국유사를 평가할 때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간직하고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려왔다. 그는 쌍벽을 이루는 삼국사기에 대한 혹은 김부식에 대한 평가의 반대급부로서 이 삼국사기가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연이 만일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 역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 성공한 역사가이기도 하다.
일연은 무량사를 비롯한 수많은 절에서 수행을 이어가다가 군위 인각사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걸쳐 이렇게 끊임없이 떠돌아 다니는 수행승을 한 것은 그가 한 곳에 안주해 편안히 수행 생활을 하기엔 사치라 느껴질 정도로 당시 고려 사회가 풍전등화이자 불안하고 암울하며 고통스런 세월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달성 인흥사지
달성의 인흥사지 일연스님은 이곳에서 몇년간 머물며 인근 지역의 중생들을 만나 그들을 구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는 고려 남부의 전역을 골고루 돌면서 몽고군에 의해 핍박받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무했을 것 같다.
삼국유사의 저술을 시작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청도의 운문사의 위치 지도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경주에서 김윤근 선생님은 황룡사지에서 일연이 불타버린 황룡사 앞에서 얼마나 황망한 마음이 되었을지 현장 강의를 해 주신 적이 있다. 몽고군에 의해 참혹하게 불타 사라져 버린 워낙 큰 목조 건축물이라 무려 일주일이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탔다는 황룡사가 건재했던 모습에서 잿더미로 무너진 순간 일연은 아마도 망국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의상대사를 존경하여 선시를 헌정하고 불국정토였던 경주를 사랑했던 불제자 일연은 부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조국 고려를 사랑했으며 대장경의 힘으로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의 힘으로 몽고의 침략을 반드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을 터다. 그러나 불타버린 황룡사 목탑을 보고 그는 마지막 희망을 놓으려 했지만 고통받는 고려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래도 희망 하나씩을 가슴 속에 심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서 일연이 어떤 심경으로 삼국의 역사책인 삼국유사를 저술하였고 당시 고려 민중들에게 우리 민족이 어떤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 주면서 국난을 반드시 극복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 반드시 부처께서 큰 복을 내리실 것이라는 등의 심심한 위로라도 하고 싶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민중에게 건넨 위로와 격려의 산물이 삼국유사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보전되어온 삼국유사의 존재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말며, 심지어는 삼국유사의 구체적인 내용조차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가 없듯이 우리는 삼국유사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면서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전해고 있는 가치를 고스란히 후세에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이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 백제 미륵사지탑을 해체한 결과 그곳의 사리하에서 사리봉안에 관한 기록에서 우리는 백제 무왕의 아내가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삼국유사에서 기록한 것처럼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덕적의 딸로 기록되어 있어 크게 이슈화된 적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무왕은 무강왕이고 백제 왕들의 연표에는 무강왕이 없기 때문에 무왕이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 역사 속 서동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이 아니라 무령왕 혹은 동성왕일 가능성을 제시한 상태이다.
이렇게 삼국유사의 기록을 전면적으로 모두 믿거나 혹은 전면적으로 모두 부정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차츰 차츰 역사속 비밀, 기록의 신빙성을 하나 하나 밝혀 나가야 할 것이며 기록적으로 믿기 힘든 기적이나 이적 등을 포함한 삼국유사를 그냥 말도 안 되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떤 비유와 은유로 당대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밝혀내는 연구에 박차를 가해 가야만 할 것이다.
경북 경산시 삼성현 공원
이 공원은 경산 출신으로 볼 수 있는 원효스님, 일연스님, 그리고 설총을 기리기 위해 그들을 세명의 성현으로 기념하고 있는 공원이다.
무애행을 행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법장을 짚은 원효스님, 삼국유사를 편찬해 우리 고대사에 담긴 민족혼을 간직하고 보전할 수 있도록 한 일연스님, 그리고 이두를 발명하여 지식의 대중화에 앞장선 신라왕실의 후손 설총이 한 자리에서 기념된다.
경산 삼성현 공원 일연선사상
우리 민족의 뿌리가 단군왕검에 대한 사상에 있음을 고대로부터 이어받아 무사히 현재로까지 전달할 수 있게 한 일연의 삼국유사, 그런 점에서 분명 김부식의 삼국유사는 과감히 생략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겨 기록하지 않은 우리의 문화 역사 정서를 삼국유사는 담아내어 전달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소중한 역사서가 삼국사기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후세에 전달되고 전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 등을 보면 어쩌면 기적처럼 여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800년정도가 흐른 뒤에도 우리가 이천년전의 우리 역사에 대한 실마리로 삼국유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세계가 인정할 만한 행운 중에 행운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다음 시간에는 이번 시간에 다루지 못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좀더 자세히 이해해 보도록 하겠다.
출처: https://theplace2012.tistory.com/133?category=383012 [문화와 역사가 여행을 만나는 그곳]
--------------------------------------------
김부식과 일연 같은 역사를 다르게 쓰다(2) - 김부식은 진짜 사대주의자였나
지난 시간에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삶과 선시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비교했을 때 삼국유사가 갖는 문제점과 장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연은 승려의 신분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최대한 참고하여 자신이 당대에 보고 들은 것 그리고 고려 이전의 역사서들의 내용을 참조하여 삼국사기와는 사뭇 다른 역사를 후손들에게 선사하였으며 역사서로서의 사실 기록서의 가치보다 우리 민족의 민족혼과 삼국의 신화와 전설 민담 설화 등을 최대한 수집해 수록해 낸 기록물로 저술하였다는 점을 알게 된다.
지난 회차에서는 일연스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면 이번에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저자라는 것만으로 우리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고려 이전에 저술된 각종 역사서, 지금은 현전하지 않는 역사서를 수집 참고하여 고려의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를 저술하라는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기를 집필했다. 삼국사기는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져간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다시 연구할 수 있게끔 만든 중요한 역사사료다. 기전체의 서술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되살려 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무령왕릉의 지석의 발견되었을 때 묘지석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통해 일본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원이 분명 사실이었음을 확증시켜 준 소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였는가?
이러한 소중한 사료인 삼국사기의 저자라서 분명 그는 존경할만 한 인물이지만 한쪽에서는 김부식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버리고 사대의식이 충만한 역사서로 삼국사기를 만들어 민족의식과 사상을 심하게 왜곡하였으며 그 이유는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 때문이었다라는 평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평가의 시작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인물 한 사람을 언급해야만 한다. 바로 신채호선생이다.
단재 신채호는 일제 강점기 국혼이라고 불리웠을 정도로 민족혼을 되살려 내는 일을 독립을 이루는 가장 최고의 방식이라 생각했고 우리 고대사를 대동이 사상에 기대어 좀더 폭넓고 확대하여 해석하고 재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상고사는 선생의 독립투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환단고기
조선상고사
환단고기는 우리 고대사를 단군사상 혹은 대동이사상에 기초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반도내에 한정짓지 않고 중국의 중원과 요동 요서를 아우르는 지역에 우리 역사의 실재가 있었다고 보는 책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러한 환단고기의 역사적 시각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단순히 믿음이나 신념으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연구로서 고대 역사서에 나타난 지명들이 실재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인식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역사서에 나타난 지명은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중국땅에 있었다는 시각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그 지명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았던 지명들이 일제가 강조해서 왜곡시키듯이 한반도 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황해의 서쪽인 중국 땅에 그 지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 내고 우리 역사가 일제와 일부 사대주의자에 의해 엄청나게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단재선생의 역사 인식은 조선상고사와 독사신론같은 저서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 중 하나가 흔히 묘청의 난이라고 부르는 묘청에 대한 재평가이다. 묘청의 난은 단순히 왕조에 저항한 반란 사건이 아니라 고구려 역사를 되살리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만주땅을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개경에서 서경으로 고려의 수도를 옮기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서경천도운동이었으며 당시 고려 조정은 이를 무력으로 탄압해 이를 좌절시켰는데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백제 패망 이후 우리 역사를 바로 잡아 만주의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던 절호의 찬스를 놓치게 만든 반믹족적 행위였으며 그 진압군의 주장이 바로 김부식이었으므로 김부식은 천하의 사대주의자요, 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다.
묘청
건국된지 200년만에 중기로 접어든 고려는 엄청난 혼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몇몇 부패한 귀족과 승려집단 등에 의해 국가의 모든 재산이 잠식당하고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혼란상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라든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다. 고려 중후기의 승려로서 묘청은 고려가 고토 회복을 위해 떨쳐 나서 잃어버린 고구려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역사 인식을 가진 우리 민족 최초로 실재하는 권력에 저항한 인물이라고 신채호 선생은 평가한다.
그러나 묘청 당시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괘씸하고 불측한 진압해야 할 난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묘청의 서경천도와 고토회복의 열망을 단지 조정과 왕실의 권력에 반기를 든 혹세무민의 우두머리요 반란의 수괴로 규정했으며 이를 고스란히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라고 인식한 것이 단재의 문제의식이었다.
실제로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고려후기는 물론 조선 중기 효종의 북벌의 꿈까지 우리는 북벌의 꿈을 줄곧 꾸게 되지만 역사적으로는 묘청 때가 가장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가능성은 낮아졌다고 보는 시각은 타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묘청의 난이 있기 전 고려 조정은 보수파를 대표하는 김부식과 개혁파를 대표하는 묘청 정지안 등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김부식은 서경천도라든지 북벌이 허황된 사고라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허황된 주장을 하는 개혁파의 묘청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김부식에게 묘청은 정적이었고 그러한 정적을 제거한 공으로 그는 중용되어 결국 삼국사기를 집필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상력에 입각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 김부식은 이기고 묘청은 죽어야만 했던 역사를 가슴아프게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다음의 조선상고사의 기록만 보아도 십분 짐작되리라.
신채호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소루함이 사료의 부족이 아니라고 지적한 뒤에,
"선학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역사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한 것이다." --『조선상고사』-일천년래제일사건--
"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이어 대동강 혹은 한강을 국경으로 정하는 한편 사대적 유교적인 입장의 사료를 부연찬탄 개작하고 그의 불합한 사료는 논폄도개 혹은 산제하였다."
--- 『조선상고사』-일천년래제일사건--
신채호는 일연의 삼국유사는 좋은 기록으로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적 유교윤리에 의해 왜곡되고 폄훼된 역사라고 인식한 것이다.
위의 백제사에 대한 기록가 사관으로서의 김부식의 평가는 좀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백제 멸망의 당위성과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그 신라를 멸망시키고 고려가 건국되는 과정을 미화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백제사를 심하게 폄훼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를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직접 대놓고 김부식의 잘못을 꼬집는다.
"김부식은 김춘추 최치원 이래에 모화주의의 결정이니 그 저한 [삼국사기]에 고주몽은 고신씨의 후예라, 김수로는 금천씨의 후예라, 진한은 진인의 동래자라 하며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가지도 같은데가 없는 지나족을 동종으로 보아 말살에 쇠 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벽견을 갈파한 자가 없었다." --조선상고사 48--
신라고기, 해동고기, 구삼국사 삼한고기 등 책의 이름만 남은 역사서들은 아쉽게도 현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말미에 저술에 참가한 이름들의 맨마지막에 자기 이름을 쓰고 삼국사기가 어떤 책들을 참고했는지만 적어놓았는데 그렇게 김부식이 수많은 역사서를 참고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김부식은 그는 누구인가?
일연스님은 분명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모티브로 해서 삼국유사를 저술했고 상당부분 삼국사기를 참고하고 있다는 것이 두 책을 모두 일람한 사람들의 평가다. 아마 일연이 다시 살아온다해도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책은 사대주의적 관점으로 우리 역사를 심하게 왜곡한 저술이며 한 책은 그나마 민족혼을 읽을 수 있다라는 신채호의 평가는 과연 문제는 없는 것일까?
김부식을 위한 변명
2007년 쯤에 전장관 유인촌씨에서 탤런트 고두심씨로 진행자가 바뀐 HD역사스페셜에서 김부식은 과연 사대주의자였는가를 주제로 삼국사기에 대한 재평가와 김부식에 대한 재인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몇몇 역사가들의 김부식에 대한 재평가는 수긍할 만한 부분이 많았다.
고려사에 기록된 김부식에 관한 기록을 보면 김부식이 정말 사대주의자였나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김부식이 북벌을 하러 군사를 내서 맞서 싸우자는 주장에 여러차례 전란으로 군민이 모두 피폐해져 휴식이 필요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군사를 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말하고 있다. 그저 중국을 사대하기 때문에 북벌에 나설 군사를 내는 것이라이 아니라 무리한 전쟁을 반대하고 국력을 키워나가는 것, 그렇게 고려를 유지하고 수호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 평범한 관리는 아니었을까라는 힌트를 얻게 된다.
고려사의 기록 이외에도 삼국사기를 꼼꼼히 들여다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 그것을 당나라와 연합해 이루어 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해서 그를 외세를 끌어들인 통일을 지지하는 사대주의자고 평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즉 내물왕 때 기록을 보면 신라의 문란하다 싶은 근친혼 풍습을 단지 중국의 유학적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중국의 사상과 습속 그리고 예법에 준한 판단이므로 부당하다고 평가하며 신라를 문화상대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하고 있는 대목이 있어 과연 김부식이 맹목적인 사대주의자인가를 새삼 돌이켜 생각토록 하고 있다.
그밖에도 삼국사기 곳곳에서는 김부식이 과연 사대주의자나 유학자로서 중국을 신봉하기 민족의 전통이나 민족혼을 외면하고 폄훼하기만 한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기록들이 많다. 특히 일연스님이 고대의 신화나 설화를 바탕으로 고대 역사서가 기록한 이적들을 그대로 적어 역사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장면, 예를 들어 미륵사지 건축에서 미륵사를 건축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단 하루만에 미륵사지에 있던 연못을 메워져 그곳에 절을 지었다 같은 기록을 삼국사기는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해 은유와 과장 비현실적인 기록을 사실적으로 만들어 냈다. 그 것을 그저 왜곡과 폄훼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아닐까.
분명 역사적 기록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 자세이다.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한 기적 같은 이야기를 과거의 사가가 적었다고 해서 그를 그대로 옮겨적는 것을 역사의 책무라고 보기 힘들 때 김부식은 역사적, 정치적 은유로 신비화된 역사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려고 노력한 역사가로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채호가 보기엔 그것이 지나치게 심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역사를 마구잡이 편집 왜곡한 것이라 평가할 수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가장 지탄을 받게 된 이유가 알 수 없는 지명, 저술 당시의 시점에서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업는 지명들을 따로 적어 모아 두었는데 그 지명들을 보면 김부식이 고대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대륙기반설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잇는 수준에서 왜곡해 모조리 한반도 내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지명들을 불분명하다고만 저술했지만 실제로 그 지명들은 중국 본토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된다.
허나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였다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대동이 사상에 고무되어 신화화된 이야기를 사실로 꿰어맞추기 위해 또한 우리 역사적 인물들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이야기들을 침소봉대하거나 과장하는 것이 오히려 더 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편타당하게 인정할 수 없는 정사가 아닌 기록들이나 야사들을 아직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부식은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집필하는 일을 맡아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일을 끝내고도 결코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거나 스스로 추켜세우려 하지 않고 삼국사기를 완성하고서 그 집필에 참가한 말직 관료들을 우선하여 적은 후 맨마지막에야 자기 이름을 집어 넣을 정도로 사실은 겸손한 역사가는 아니었을까?
김부식에 대한 평가
고려사에 김부식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후한 편이다.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김춘추가 술에 취해 김유신의 동생 보희와 자게 된 것을 알게 된 장면
김부식은 김춘추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낸 것을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을 의지와 재기로 이겨낸 행위로 삼국사기에 묘사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신채호 선생의 김춘추에 대한 인식을 또한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종을 초하여 동종을 멸함은 구적을 위하여 형제를 살함과 무이한 자니 차의가 심명하여 비록 삼척동자라고 가히 지득할 바이어늘(중략) 황차동국통일한 공으로 기죄를 엄하려오 (중략) 연칙 김춘추 일생에는 죄만 유하고 공은 무하거늘 (하략) 이종으로 하여금 동족을 멸한 김춘추여, 차등주의를 고취하여 오국을 삭약케 한 역사가여."
--독사신론--
단재는 독사신론에서 실로 김춘추에게 심한 독설을 날리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 대왕의 꿈의 기획 취지에서처럼 과연 김춘추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협의점은 없을까를 찾고 그렇게 보다 정당한 평가를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일연은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여 난생과 같은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한 기록도 그 의미가 크고 높다고 생각하여 모조리 옮겨서 삼국유사를 썼으나 김부식은 그것은 그저 신화요 설화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논평하며 과장되고 신비화된 이적들도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도록 해석되고 추리된 내용으로 깔끔하게 다듬어 제시한다. 물론 고려를 중심으로 승자의 시각에서 패자들의 역사를 애써 빛나지 않도록 서술하였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지만 그래도 김춘추가 악의적으로 사대주의 사상으로 우리 역사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수괴라고 평가하는 것 또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빛날 우리의 역사 사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지금까지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가 우리 역사에서 갖는 지위와 가치 그리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기록유산으로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이 기획에서 엿본 것은 그저 단편적인 하나의 의문의 출발일 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질문과 역사적 상상력의 답은 아니다. 앞으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연구되고 교육되며 재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할 기록물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일 뿐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고 많은 부분 전자가 후자를 참고하여 만든 베낀 책이라는 느낌도 가질 수 있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많은 부분이 같고 많은 부분이 다른 엄연히 다른 역사서임을 우리는 잊지 말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첨삭되어 그 원류가 무엇인지도 헛갈리는 저 일본서기에 비하면야 우리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자랑스러워 할만 하고 일본처럼 우리 역사를 후대의 시각에서 입맛대로 바꾸는 짓따위는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상상하고 끊임없이 사실을 추론하는 길잡이로서 활용해 나가기를 마지막으로 바라게 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단재신채호 선생을 존경하며 환단고기가 상정하고 있는 대동이사상 배달겨레의 사상도 상당히 존중하는 편임을 언급해 두고 싶다. ㅋ
출처: https://theplace2012.tistory.com/135?category=383012 [문화와 역사가 여행을 만나는 그곳]